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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14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14

세계를 뒤흔든 마오쩌둥의 368일간 통일마라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오늘은 칭비안에서 운 좋게 아침에 문을 연 식당을 만나서 중국인들이 아침으로 즐겨 먹는 뜨끈한 떠우지앙(콩국)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먹을 수 있었다. 떠우지앙은 우리의 콩국과는 다르고 오히려 두유에 가깝다. 이 떠우지앙과 두부가 중국혁명의 초석이 된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1907년 프랑스 유학 중이던 리스쩡은 콩에 관한 연구 서적을 프랑스어로 출간해 두부를 서양에 최초로 소개했다. 서구인들은 아침마다 우유를 마셨는데 고향에서 마시던 떠우지앙이 그리웠던 그는 두부 공장을 세우기를 결심했다. 그는 광고를 십분 활용했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중국 두부의 진미를 선보이겠다.” 광고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그는 프랑스인의 입맛을 고려해 부두 코코아, 두부커피까지 만들어냈다.

 

리스쩡이 사업에 성공하자 부친이 고관으로 있던 청왕조의 전복을 위해 쑨원에게 혁명자금을 지원하고 파리에 야학을 개설했다. 그리고 근검공학(勤儉功學)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1910년에서 1920년까지 10년간 3000여 명의 가난한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에 건너와 일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이 근검공학이 리쉬진, 저우언라이, 차이허썬, 리리싼, 덩샤오핑, 천이, 리푸춘, 샹징위, 차이창,네룽전 등 당대의 전설적인 혁명가를 배출하는 토양이 되었다. 두부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한고조 유방의 손자 회남왕으로 알려졌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든든하게 먹고 소화시키려고 걷고 있는데 길옆에 종잇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눈의 동공이 더 크게 열리며 그것이 돈이라는 것을 알았다. 5위안짜리 지폐이다. 그것을 집어 드는 손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5위안이면 따뜻한 떠우지앙 두 그릇을 살 수 있는 돈이다. 마오쩌둥의 초상이 새겨진 적은 돈이지만 그것이 내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중국의 돈은 1위안, 5위안, 10, 20, 50, 100위안 모든 지폐에 마오쩌둥이 초상이 새겨졌다.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신사임당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다 골고루 들어간 것과는 다르다.

 

지나고 생각하니 어제 삼거리를 지나면서 본 거대한 조형물이 홍군 대장정 기념비였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리긴 했어도 정작 어떤 조형물인지 알지 못했다. 역사적 기념물이란 시민들의 하루하루 행복했던 일상을 조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역사적 조형물이란 많은 사람을 죽인 전쟁영웅을 자랑스럽게 묘사한다. 그것은 대부분 정권의 체제 유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역사가 강조하는 지점은 언제나 무겁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이곳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은 마오쩌둥의 홍군이 중국 남부의 장시성에서 장제스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해 길고 고통스러운 대장정(이라 쓰고 삼십육계 줄행랑이라 생각하면서 통일마라톤이라 의미를 부여한다.)을 마치고 자리 잡은 곳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춘추전국시대 이래 다시 여러 군벌세력으로 갈라졌던 중국통일의 기틀을 잡은 곳이다. 이곳은 중국공산당 혁명사령부와 인민 정부를 두고 중일 전쟁을 지휘하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실이자 혁명의 성지이다. 그리고 초창기 김일성과 함께 권력 지형의 한 축을 이루었던 화북 조선 독립동맹의 옌안파와 연관이 있기도 하다.

 

86천여 명이 출발하여 12,500km에 달하는 통일마라톤(사실은 줄행랑이었지만)을 하고 옌안(延安)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7천 명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한 이는 3천여 명이었다. 그러니 완주율은 3%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 완주자 중에서 중국 현대사의 최고지도자 2명과 존경받는 국무원 총리, 3명의 국가주석, 5명의 국방장관을 배출했다. 그리고 현재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그들의 2세이다. 골인지점에서 마오쩌둥에게 통일마라톤 완주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이 섬서성 소비에트 정부의 주석 시중신이었다. 그가 지금 중국의 최고 권력자 시진핑의 아버지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그들은 통일 마라톤을 하면서 미국 및 유럽 열강들의 후원을 입은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밀어내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위대한 혁명가, 사상가, 전략가이자 중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대장정을 출발하는 그날에는 들것에 실려 가는 환자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별 볼 일 없던 마오쩌둥은 이 통일마라톤을 통해서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얻고 강해지면서 마침내 중국 인민들의 우상으로 숭배자로 치닫게 된다.

 

19217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부터 1949101일 천안문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기까지의 시기의 중국공산당은 인간의 언설로 찬양할 수 있는 모든 현실적 도덕성을 유감없이 구현해낸 시기라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모든 지폐와 천안문광장에 마오쩌둥의 얼굴이 걸려있는 것은 이 시기에 마오가 구현한 최고의 도덕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을 도시 임금노동자에서 농민대중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침 내가 지금 368일에서 열흘 빠지는 358일째 달리고 있고 거리도 12,500km쯤 달리고 있을 때라 더욱 감회가 새롭다. 지금 지나고 있는 션무시 근교에는 석탄광산이 산재해있다. 중국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 션무지역이다. 지금까지는 바퀴 22개 달린 트럭이 지나갈 때 일으키는 황사 먼지구름 때문에 고생했다면 이곳에는 검정 연탄 먼지구름이 달리는 나를 고문한다. 아마 마오쩌둥의 홍군이 이곳을 지날 때는 저 바퀴 22개 달린 괴물들은 없었으리라! 14억 중국 인민들이 다가오는 겨울을 따뜻하게 나려면 저 괴물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1928년 말까지 북벌을 완료하고 이제 공산당만 제거하면 중국통일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1930년에서 19333월까지 4차례 장시성 루이진에 있던 공산당 토벌 작전에 나서지만 모두 실패하자 193310월부터 50만 대군과 외세인 구미열강의 원조로 들여온 항공기와 최신무기를 앞세워 제5차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공산당의 86천여 명이 포위망을 뚫고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고난의 행군을 강행했다.

 

통일마라톤을 할 때 마오쩌둥은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이었고 행정부의 수장이었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는 왕따였다. 당시 코민테른에서 군사고문으로 파견한 오토 브라운과 중국공산당 최고 책임자인 보구와 저우언라이가 실세였고 모든 일을 결정하고 준비했다. 그는 실권도 없는 데다 줄행랑 당시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위두하를 건너야 했다. 그의 재기에는 저우언라이의 도움이 컸다. 19341212일 그는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늘상 열던 3인 단 회의 대신 대장정 이후 처음으로 1년 동안 중요한 당정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마오쩌둥을 참석시켰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불만을 샀지만 새로운 리더십을 끌어내기 위한 절묘한 한 수였고 이 자리가 마오쩌둥의 재기의 발판이 된다.

 

마오쩌둥이 대장정, 통일마라톤을 하면서 국민당의 장제스와의 대결 장면은 항우와 유방의 대결보다 더 극적이다. 모두 11개의 성과 24개의 강, 천여 개의 산을 넘으며 뚜렷한 골인 지점도 없이 이어지던 통일마라톤은 19351020일 산시성 옌안에 도착하면서 끝이 났다. 현대 중국이 탄생한 곳을 물으면 사람에 따라서 중국공산당이 창당한 상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통일마라톤을 마친 옌안을 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내가 16km 유라시아 평화마라톤을 뛰면서 내 본연의 모습으로 거듭나듯이 중국은 통일마라톤을 하는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며 오늘의 중국이 되어갔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은 36계 줄행랑을 치면서 승리를 거둔 36계 병법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현대중국의 시원은 바로 368일간 12,500km를 돌파했던 통일마라톤에서 찾을 수 있다. 368일간 통일마라톤을 통해 단련되고 거듭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등 인재들은 그 이후 마오쩌둥의 뒤를 이었고 그들은 중국을 결국 21세기에 G2에 올려놓았다. 현대중국은 끝없이 달리면서 잉태됐고 달리면서 생존본능을 키웠고, 죽음의 행군 속에서 인재가 키워졌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스펜스가 쓴 마오쩌둥 평전,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에는 그들이 돌파할 수 있었던 힘은 모든 고난을 함께, 평등하게 짊어진다.’라는 원칙이었지요.”라고 쓰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중국 민중을 구한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난을 인민들과 병사들과 나누어 짊어지고 인민들의 민심을 얻었다. 그 힘으로 아편전쟁 이후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나라의 절반을 유린당하는 굴욕의 근대 100년의 역사를 끝내고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여 인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었고 관료들을 견제하고 인민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여 중국 자립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두 가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나는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해방시키고 중국을 재통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이가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임무에 성공했으나 두 번째 임무는 실패했다. 창업보다는 수성이 더 어렵다는 당태종의 말을 그는 외면해버렸다. 이미 그는 인민의 벗이 아닌 무소불위의 황제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도 크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수천 년의 문화를 파괴하고 인민의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그는 크나큰 과오도 남겼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무려 4천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역대 중국의 그 어떤 포악한 군주도 그렇게까지 자기 백성을 죽인 일은 없었다. "마오 주석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그의 업적은 불멸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1966년에 죽었더라면 과오는 있지만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죽었다.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천윈(陳雲)은 이렇게 마오에 대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과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국 인민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자 숭배의 대상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에 이어 중국의 운명을 한 손에 움켜쥔 이는 그와 함께 통일마라톤을 완주한 저우언라이였고 덩샤오핑이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마오의 사회주의 정책을 거의 폐기했다. 마오의 정책은 중국을 낙후시키고 중국을 가난에 빠지게 했다고 여겼다. 그는 마오의 정책과 반대의 정책을 채택하면서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확대하면서 중국을 미국과 함께 G2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마오를 신성시하며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영구 보존하고 있다.

 

유엔군의 북상으로 심장부인 평양을 버리고 강계의 두메산골로 밀려난 패망 직전의 위기에 내몰렸던 김일성을 구원한 것도 마오쩌둥의 중국이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은 이후 한국전쟁의 당사자는 미국과 중국이었고 남북한은 주변 세력으로 밀려났다. 이승만이 작전권을 미국에 넘겼듯 김일성도 그러했다. 지금 중국이 종전 협상의 당사자로 나서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닌 동아시아 현대사이다. 장강의 물결처럼 장대한 행군의 흔적, 마오쩌둥의 통일마라톤. 불굴의 의지와 정신 그리고 혁명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물리적 어려움도 이겨내며 상황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신념과 연결되어 있다. 80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날에는 시진핑의 담대한 도전인 일대일로(一带一路)가 유라시아의 평화 시대를 막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여는 평화마라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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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