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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3)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3)

“대동강 맥주 파티를 제의합니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보다 덜 사색적이고 덜 철학적인 것 같다. 호기심 가는 것이 나타나면 캥거루의 눈처럼 동공(瞳孔)이 커진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즐겨하는 농담 중에 하나가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어요’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캥거루같이 맑고 크다. 여정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를 아주 특이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그 사람들에게 나의 복잡한 내면은 설명해줄 방법은 없다. 다만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러 세상에서 제일 먼 길을 가는 중이라고 이야기 하는 수밖에 없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신호등에 걸려 서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다 역시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여자가 내게 어디로 가냐고 물어서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이렇게 한국까지 달려간다고 설명해주었더니 엄지를 척 올린다. 하지만 표정은 내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기도 한다. 나의 행색이 평범한 행색은 아니어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달라야 하는데 독일에서는 영 그걸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길 위에 나서면 새로운 생각과 버릇에 적응할 자세가 갖추어진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에 관한 것일 뿐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길 위에서 호기심은 왕성해지고 직관은 날카로워지는 것을 알게 된다.

 

경찰을 만나는 일은 법을 어기지 않아도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두 번쯤은 나를 세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다가 오스트리아 경찰이 지나가다가 돌아와 저만치 차를 세우고 카메라로 나를 담고 있다. 당연히 그의 앞에 섰다. 그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자는지 왜 이렇게 달리는지 묻는다. 나는 충분히 준비된 답변을 했다. 우리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달린다고. 아마 그 경찰은 들어가 업무일지를 쓸 것이고 그의 상관이나 동료가 그것을 볼 것이니 나의 홍보 활동은 잘 된 것이 틀림없다.

 

경찰뿐 아니라 도나우강도 유럽을 지나는 동안 자주 만날 것 같다. 도나우강은 유럽에서 두 번째 긴 강으로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검은 삼림지대에서 발원하여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의 나라를 유유히 지나며 흑해(黑海)로 흘러 들어간다. 비엔나는 아직 강 상류에 해당하고 고색창연한 건축물이 신비로움을 더하는 오랜 전통의 도시이다. 질척한 평원을 지나고 좁은 계곡을 지나서 비엔나를 만났다. 여기서 오랜만에 갖는 휴식일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도시를 구경하는 대신 단잠을 선택했으니 나의 선택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호텔은 중앙역 근처로 잡았다. 나는 하루 종일 누워있는 날도 밥 세 끼는 챙겨서 먹는다. 아침은 호텔 아침 시간에 맞춰 일어나 먹고 다시 자리에 눕고 점심은 식당에 가서 주문하고 기다리는 것이 내 정서에 맞지 않아 슈퍼마켓에서 이것저것 사서 저녁까지 호텔에서 나오지 않고 휴식을 취했으니 그것도 옳은 결정인지 확신이 가질 않는다. 그래도 에델바이스 스노후레쉬 맥주 한 병 사는 건 잊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슈퍼에서 사 온 슈니첼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한잔하는 맛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19세기 전반 동안 비엔나는 제국의 번영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謳歌)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원래 스위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는데 차츰 세력을 오스트리아로 확장시켰다. 그 후 600년간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다. 그러다 카를 5세 때는 유럽 대부분의 땅을 다스리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제국은 대부분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정략결혼의 결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비엔나에는 “아,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자!”란 말이 유행하기고 했다.

 

중세 유럽도 조선 시대처럼 첫날밤에 신랑, 신부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상대의 인물이 너무 못생겨서 줄행랑을 치는 경우도 속출했다고 하니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귀족들의 결혼은 정략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함스부르크가(家)의 카를 5세의 여동생 마리아는 한 살 때 아직도 태어나지 않은 신랑과 혼약이 정해졌다. 다행히 미래의 시어머니는 1년 후 아들을 낳았다. 유럽에도 우리나라의 민며느리 제도 같은 것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정략결혼에 의해서 영토를 늘려갔으니 전쟁으로 영토를 늘려간 제국보다는 평화로운 제국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런 화려한 도시에는 예나 지금이나 혹시나 잡을 수 있을 성공을 찾아 날아드는 부나비 같은 청년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빈민굴에서 서성일 뿐이다. 23세의 청년 히틀러도 그중의 하나였다. 비엔나에는 이런 청년들이 낙오(落伍)하여 거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에서 마련한 허름한 숙소가 있었다. 그도 그런 곳에 거주하였다. 히틀러도 그곳에 거주하였지만 아무도 그가 어머니와 이모로부터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아 좋은 집에 머물러도 될 좋은 형편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비엔나에 온 것은 1907년이었다. 미술학교 입학시험도 두 번이나 실패하였지만 크게 실망도 않고 푸른 도나우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그림만 열심히 그렸다. 여느 젊은이들과 달리 무도회나 술판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가끔 한 번씩 미친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도덕과 인종의 순수성, 게르만 민족의 사명과 슬라브족의 교활함에 대하여 열변을 토할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것만 빼고는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 무관심했다. 그는 이곳에서 징집을 기피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913년과 1914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중심으로 세계의 역사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비엔나라는 멋진 무대 위에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걸출(傑出)한 유명배우들이 여럿 등장한다. 제국을 지키려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제국을 바꾸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십 대 암살범 프란치프. 이런 배우만으로도 뭔가 긴박하고 최고의 영화가 될 것 같은 흥분을 자아내게 하는데 여기게 아직 연습생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될 초호화 성격파 배우들이 등장한다. 프로이트, 히틀러, 트로츠키, 레닌, 스탈린 등이 그들이다.

 

그때 그들이 비엔나라는 같은 무대에 연습생으로 있었지만 나중에 그렇게 인류 역사를 뒤흔드는 인물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그들이 남긴 나쁜 그림자가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스탈린은 우리 38선의 직접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뒤 전쟁과 이념의 귀재들의 거친 기가 흐르는 이곳에 그들보다 더 거친 기를 몰고 그들의 기를 눌러버릴 기세로 내가 유모차를 몰고 들어왔다. 평화를 노래하면서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생지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이곳에서 나의 평화의 노래를 더욱 증폭(增幅)시켜야 할 이유는 충분히 많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전미자 한국문화원 관장이 나의 편의를 위해서 차를 숙소까지 보냈다. 차 안에는 전미자 관장과 함께 금발의 미녀가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폴란드 여자라고 한다. 남편은 일본사람인데 이곳에서 일식점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이 해주는 음식을 먹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웃으며 말했는데 덧니가 참 매력적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 셋이 함께 카페에 들어가서 우유 거품이 가득한 카페라떼 비슷한 멜랑체를 한잔 시키고 초코렛스폰지케이크 자허토르테를 주문했다. 때마침 비치는 따뜻한 햇살은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광장을 금방 기분 좋은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다. 무도회장의 사이키 조명처럼 햇살이 비치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금방 왈츠의 리듬을 타듯 경쾌해졌다. 비엔나의 잔잔한 시간이 도나우강의 물결 따라 그렇게 흐른다.

 

비엔나의 한국문화회관은 시내 중심가에서는 많이 떨어진 도나우 섬 내에 있었다. 보통은 중심가에 있어서 한국을 알리는 전초기지로 정부 기관에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순수 교민들의 모금으로 오스트리아 정부의 건물을 60년간 임대를 받아 운영한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한국문화회관이라고 자랑을 한다. 거기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도나우 공원의 경관(景觀)은 정말 빼어나다. 전미자 관장의 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하니 이른 시간인데도 이미 10여 명이 와있었다.

 

시간이 되자 바쁜 가운데도 한인회장, 평통 관계자, 국제부인협회 등 30명의 교민이 모여 나의 강연에 귀를 기울여 경청(傾聽)하고 꼭 평양을 거쳐 판문점으로 귀국하라며 굳게 손을 잡아준다. 처음에 혼자 상상하고 꿈꾸며 거의 무모하게 시작했지만 이제 나의 발걸음으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눈덩이처럼 굴려 커지는 모습이 보인다. 몸은 외국에 와서 살지만 평화통일을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조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크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마음을 모으면 여러분과 제가 상상하는 이상의 일이 벌어지는 기쁜 날이 곧 올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평양을 통과해서 판문점으로 입국하게 되면 나는 북한 당국자들에게 남한 시민 5만 명, 북한 시민 5만 명, 그리고 재외교포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시민 5만 명이 함께 어우러지는 맥주, 막걸리 축제를 대동강 가에서 열 것을 제의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마무리를 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제 내 삶은 뜨거워졌다. 처음엔 내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무엇으로 뜨거워졌고 차츰 그것은 사람들의 호응으로 더 뜨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곧 그것을 충분히 즐기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히틀러나 레닌, 스탈린도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30여 명 앞에서 말하는 기회는 갖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남긴 100년 넘는 검은 그림자를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지우고 있는 중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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