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4)
헝가리 평원에 눈부신 평화의 햇살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넘어서는 길은 산도 없고 강도 없고 햇살만이 들판에 축복처럼 가득하였고 거미가 햇살에 날리는 거미줄이 수도 없이 얼굴에 와서 걸리곤 하였다. 또 하나의 국경 너머에는 얼마나 다른 삶이 펼쳐질지 자못 기대가 된다. 1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헝가리어로는 두나강이라 불리는 도나우강과 평행을 이르며 뻗어있다. 국경을 넘어서자 사람들의 모습이 왠지 친근하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인들 같은 체격이 아니라 갈색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이 더 귀엽고 예뻐 보인다. 마을 앞에 여러 형태로 서 있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도 어디서 많이 본 듯 친근감이 간다.
어쩌면 그들의 선조가 마자르족이기 때문이리라. 마자르족은 우랄산맥 동쪽에 살던 아시아계 유목 기마민족이다. 아직 학자들이 증거를 찾지는 못 했지만 마자르족이 우리가 아는 말갈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우리의 북쪽에 이웃하며 살며 말갈족으로 불리다가 여진족으로 불리다가 만주족으로 불리던 그 사람들 말이다. 마자르인들은 유럽 역사 속에 한번도 묻히지 않고 아틸라 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고, 국명도 훈족의 후예임을 명시하며 훈족(Hun)의 영토(Gary)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최고의 기마 전사들이었던 선조들을 그리워하며 판노니아 대평원에 정착하며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이곳 도나우강 중,하류에서 시작되는 유라시아 초원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쪽 몽고까지 이르는 8,000km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초원을 일컫는다. 이 광대한 초원에서 모든 생명은 살아남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하여 저마다의 생생한 음표를 변주곡(變奏曲)으로 찍어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기분 좋게 자극하여 두나 강물처럼 넘실거리게 한다. 끝없는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노루들이 나를 저 멀리서 보고 놀라 질주하는 모습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간혹 놀란 토끼들도 보인다. 평화로운 초원에 침입자가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초원은 고대 인류의 문명이 오고간 고속도로와 같은 곳이다. 지금껏 밟아보지 못했던 거대한 초원의 서쪽 끝에 서니 좁은 땅에서 바둥바둥 살았던 삶 자체가 드넓게 펼쳐지는 것 같고 가슴이 찌지직 펼쳐지면서 내 자신이 거인이 된 것 같다. 거친 땅 초원에서는 유목민, 가축, 야생동물 모두가 강인한 것들만 살아남아 세대를 이어간다. 점심에 들어간 식당에서 메뉴판을 뒤지다 붉은 색깔의 뜨거운 국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주문하였다.
헝가리에는 아시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곳엔 우리의 육개장과 비슷한 음식인 굴라쉬가 있다. 음식에 다양한 마늘과 고추가 사용되는 것도 신기하다. 고추는 우리 고추보다 더 맵다고 한다. 음식점에 들를 때마다 쌀밥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굴라쉬를 시켜 빵과 함께 먹는다. 김치 대신 저린 양배추로 만족한다. 길거리 음식으로는 랑고스가 있다. 기름에 뛰긴 빵 위에 사워크림과 치즈를 올려서 먹는데 식당을 못 만나는 날에 길거리에 이것이 보이면 두어 개 사 먹으면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내가 랑고스를 사들고 게걸스럽게 먹자 옆에서 먹고 있던 한 소녀가 멋쩍게 웃음을 보내준다. 함께 랑고스를 먹으면서 생긴 우정의 표시이리라! 나도 웃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가 헝가리 평원의 가을바람에 살랑거렸다. 약간 다갈색 피부, 특히 비취색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신기한 양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곳이 그 옛날 훈족들의 말발굽 먼지가 천하를 덮을 것 같이 일어났던 곳이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유목민에 관한한 그것은 맞지않다. 그들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승자는 그들이었지만 역사는 그들이 얼마나 무섭고 야만적이었는지를 묘사한 것이 전부이다. 헝가리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조차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으니까. 다만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쓸 때 성을 먼저 쓰고 연월일 표시도 그렇고 주소도 우리와 같은 순서로 쓴다. 음악도 우리와 같은 5음계로 구성되어 우리의 전통가락과 비슷한 음률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끝없이 초원길을 따라 이동하며 자손을 낳고 그 자식들이 이어서 서쪽으로 이동해왔을 뿐이다. 다만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질 뿐이다. 중국 북쪽에는 끊임없이 중국을 약탈해 역대 중국 황제들의 골칫덩이였던 민족들이 있었다고 전해질 뿐이다. 진시황은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곽거병 같은 장군을 파견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이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었다.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지구에서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듯하다가 4세기 중반 ‘훈’이라는 이름으로 서양 역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온 그들이 어떻게 초원길은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4세기 말 서양문명의 경계인 도나우강까지 뻗어 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대륙에서 민족대이동의 단초를 만들었다. 공포에 질린 게르만 민족은 밀물처럼 로마국경으로 쫓겨 간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서로마제국은 결국 종말을 고하고 만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로마는 몰락(沒落)의 길을 걷고 있었고 406년 로마는 훈족과의 충돌을 막기 위하여 볼모를 보내기로 하고 조공도 바쳤다. 훈족은 당시 세계 최고의 기병대였다. 그들은 먼 거리에서 엄청난 활을 쏟아붓고 순식간에 적을 초토화시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서에는 그들을 언급하기를 꺼려했지만 유목민족들은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질러 인류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그들은 문화의 전파자였으며 한때 세계를 지배하고 지금은 중앙아시아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흉노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 중국 역사에 등장한다. 이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세계 문명을 형성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 거대한 세력은 흉노족으로, 튀르크 족으로, 몽골족 또는 스키타이족으로 알고 있지만 문화 복합체 성격을 띠고 있다. 단지 주도세력이 흉노냐, 튀르크냐, 몽골이냐의 문제였다.
훈족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로마로부터 조공(租貢)을 받고 로마의 장군의 아들 아이티우스는 훈족에 볼모로 가 살게 된다. 볼모로 훈족들과 함께 살면서 훈족의 왕세자인 루빌라이와 친하게 지냈다. 성인이 되어 볼모에서 풀려난 아이티우스는 훈족과 동맹을 맺고 훈족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433년 그는 전쟁 때 도와준 대가로 훈족에게 정착할 땅을 주었다. 그곳이 헝가리이다. 헝가리의 국명도 ‘훈’에서 유래를 했다.
이제 훈족은 약탈하고 조공을 받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더 이상 불안정한 유목 생활은 필요 없어졌다. 그들은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아틸라는 더 이상 동방에서 온 약탈자의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황제였다. 이제 훈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아랄 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해안에 닿았고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 북쪽으로는 발트 해까지 이르렀다. 아틸라가 죽자마자 네 명의 왕자들이 왕위를 놓고 싸우고 피지배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훈족은 분열했고 분열된 나라는 오래가지 않았다. 훈족은 이제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훈족이 헝가리나 유럽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훈족은 그곳에 녹아들어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칭기즈칸의 기병대가 대초원을 가로질러 세계로 돌격하여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를 넘어 독일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제 마음껏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다. 지금의 거대한 러시아나 중국, 인도의 경계가 그의 통치 시절 만들어졌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유럽은 아시아를 몰랐고 아시아는 유럽을 몰랐다. 그는 실크로드를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놓았다. 이 길을 통해 물자만이 아니라 문화와 지식과 종교가 왕복하게 됐다. 실크로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였지만 지금은 국가이기주의의 음습함 습기 때문에 전설의 이끼를 벗지 못한 채 현실의 길이 되지 못하고 있다.
몽골의 말발굽을 벗어나자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고, 또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탈과 억압을 자행했다. 오스트리아 동맹국으로 불가피하게 참가한 1차 대전과 히틀러가 헝가리의 옛 영토를 회복해준다는 약속하여 치룬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패전국이 되어 경제는 파탄에 빠졌는데 이번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주해 들어왔다. 헝가리는 그렇게 피멍이 들어왔었다.
헝가리에서 둘째 날 묵은 곳은 죄르이다. 죄르는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가는 중간 무역지로 번영을 누리던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한 조그만 도시이다. 마자르인들이 정착을 시작하던 곳이며 마자르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녹아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죄르 대성당은 헝가리 최초의 국왕인 이슈트반 1세의 명령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는데 내부에 헝가리 국왕 중 가장 존경받는 라슬로 1세 국왕의 무덤이 안치(安置)되어있다고 한다. 이곳이 오스만 튀르크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하던 슬픈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의 민족 정서가 한이라면 헝가리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살률이 한국 다음으로 2위이고 알코올중독자 수가 늘어난다고 한다. 건물은 지으면 파괴되고, 그 잔해 위에 다시 지었고 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치면 우리보다 몇 곱절 더 할 헝가리의 하늘에 이젠 전쟁의 먹구름이 싹 가신 청명하고 평화로운 가을 하늘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이들에게는 이제 슬픈 역사를 끝내고 평화를 구가(謳歌)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도 평화협정이 빨리 체결되고 조속히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는 모든 조치가 하나씩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평화의 성지(聖地)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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