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5)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5)

마음은 집시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도나우강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두 개의 나라로 나누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코마롬이라는 도시는 도나우 강가에 있는 휴양도시이다. 헝가리는 유럽의 보물(寶物)이라고 불린다. 수천 년 동안 도나우강을 따라 여러 도시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다. 옥수수밭이 끝나고 감청색의 숲이 시작되었다. 헝가리의 숲은 지금까지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에서 보던 뻘쭘하게 키가 크고 위압적인 전나무 숲하고는 다르다. 나무들도 아기자기하다. 숲에는 떨어진 낙엽을 밟고 달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다인 줄 알았다. 내 기침 소리에도 스스로 화들짝 놀랄 만큼 한적한 곳이다. 그 숲속에서 인적(人迹) 소리가 들린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수풀 속에서 공터가 시작했다. 공터는 좁은 숲을 지나 사람의 발길이 닿아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태고의 모습처럼 울창한 잡목 사이에 있었다. 요정들이 나타나야 할 것 같은 숲속에 이른 아침인데 간이 테이블에 네댓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람들은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오는 캐릭터보다 작아 보였다. 혼령이나 엘프의 영역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내 감각이 열려있나 확인해보고 싶었다. 팔등을 꼬집어 보았다. 아픈 것 같기도 했고 아프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꿈결인지 현실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정말이지 이런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반가움보다 무서움이 앞선다. 말로만 듣던 집시들이다. 숲속의 작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서 야행성 동물의 광채가 났다. 모든 것에 감동할 준비가 되었던 나는 숲속에서 같이 기념촬영이라도 하자고 말을 거는 대신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피해 달음박질을 쳐왔다. 감동을 안 한 것도 아니었지만 꿩처럼 소심해졌다. 모든 두려움의 외투를 담대하게 벗어 던지고 나선 길이지만 내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다. 이런 근거도 없는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벗어나는 길은 유모와 해학을 발휘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최소한 두 사람은 있어야 한다. 그 근처에는 지저분하게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지금도 유럽에서는 자동차나 마차를 타고 방랑 생활을 하며 들판에 텐트를 친 집시(Gypsy)를 흔히 본다. 집시족은 9세기부터 인도 북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유랑민족으로,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계열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다. 집시, 보헤미안 등으로도 불리는데, ‘집시’라는 말은 이들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착각한 영국인들이 이집트인(Egyptian)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그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국경이 없었던 시대에 말과 마차를 타고 민첩하게 이동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유럽 전체에 퍼져 살았다.

 

집시들이 지금은 유럽 전역에 흩어져 구걸이나 하는 집단으로 여겨지지만, 말은 집시들의 이동수단이며 생계수단이기도 했었다. 싼 곳에서 말을 사다 비싼 값을 받고 팔고 아픈 말을 고쳐주고 말을 조련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집시들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대장장이, 목공일, 굴뚝 청소 등 각종 궂은일, 또는 점을 봐주며 생계를 이었다. 그들은 이쪽 마을의 소식을 저쪽 마을에 전해주는 미디어 역할을 하기도 했고, 지금의 연예 기획사 역할을 담당했었다. 마을 축제나 큰 잔치를 기획했다. 그들은 타고난 음악가이며 무용수이기도 했다. 그들은 바이올린, 아코디언, 탬버린 등을 기가 막히게 연주를 한다. 유랑의 민족 집시는 그 특이한 생활양식과 정열적인 음악성으로 많은 명곡, 오페라, 소설의 소재로 쓰여 왔다.

 

‘마음은 집시’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1971년 제21회 이탈리아 산 레모 가요제에서 당시 Nada(나다)는 19세 때 니콜라 디 바리(Nicola di Bari)와 듀엣으로 불러 대상을 차지한 음악이다. 몸은 언제나 강시(殭屍)처럼 움직이지 못해도 마음은 늘 집시처럼 어디론가 달려갔었다. 그러다 이제 집시도 놀라자빠질 방랑길에 나서 달리고 있다. "나한테 무슨 잘못이 있나요./ 마음이 떠도는 집시라면/ 얽매려 하지 말아 주세요./ 마음은 떠도는 집시랍니다./ 풀밭이 더 푸르러질 때까지/ 난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별들을 딸 겁니다."

 

헝가리의 자랑하는 리스트는 ‘헝가리 광시곡’에서 집시민요와 민간 춤곡에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서 작곡하였다. 그는 이 곡에서 헝가리의 선명한 민족적 색채를 담았다. 헝가리는 확실히 유럽에서도 특이한 문화를 가졌다. 어느 날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그는 깊은 감동에 빠져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를 결심하였다. 그는 ‘헝가리 영웅 행진곡’과 ‘헝가리 폭풍 행진곡’, ‘헝가리 광시곡 제1번’, ‘헝가리 광시곡 제2번’을 썼다. 리스트는 가장 먼저 헝가리 음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민족음악가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두 손을 두 발에 꽁꽁 묶인 한 여인이 저 아름다운 도나우강에 던져졌다. 아그네스라는 이름의 이 여인의 죄목은 ‘마녀’였다. 그녀는 목욕탕집 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목욕탕은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목욕하러 왔던 공작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 때문에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지만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못마땅했다. 그는 며느리를 마녀재판에 넘겼다. 중세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넣었다. 단순히 이웃과 말다툼하다가도 상대방을 마녀라 몰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수많은 집시들이 마녀재판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이 터무니없는 마녀사냥은 유럽에만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다. ‘빨갱이, 친북, 종북좌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계속되고 미국은 자기 나라의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쓰는 나라를 ‘악의 축’이라는 주홍글씨를 덧 입힌다. 중국은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이들을 테러집단으로 몰아 중형에 처한다.

 

헝가리가 최고로 세력을 확장했을 때는 아틸라 때의 일이다. 그러니 헝가리를 이야기하면서 아틸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5세기경 훈의 왕으로 등극(登極)하였다. 부왕인 문주크왕이 죽자 숙부인 루아 왕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유럽에서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으며, 그의 제국은 알프스에서 우랄 산맥, 도나우강부터 발트 해 발칸반도까지 이어졌다.

 

훈족의 아틸라가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해서 유럽인들은 아틸라를 ‘전쟁의 신 아레스의 검이 아틸라에게 주어졌다’라고 생각했다. 이 무렵 발렌티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가 로마 원로원 의원과의 정략적인 강제 결혼을 피하기위해 아틸라에게 약혼반지와 편지를 썼다. “어서 와서 저를 구해주세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로마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가져가겠어요.” 아틸라는 호노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일 의사를 전했다.

 

아틸라는 여제의 부군 자격으로 서로마 영토의 절반을 요구했다.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와 결혼을 약속했으니 결혼 선물로 로마제국의 절반을 원하노라! 지금 당장 그것을 가지러 가겠노라!” 호노리아는 아우구스타 여제란 칭호를 얻으며 실제로 서로마를 지배했던 여자이다. 발렌티아누스 3세는 격노했으나 아틸라는 곧바로 로마를 공격했고, 로마의 황제는 결국 거액의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화친을 청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칭기즈칸이 단숨에 초원을 정복하고 아시아를 평정하고 호라즘 제국을 쳐부순 소식을 유럽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가 몽골군에 함락되면서 유럽은 전율(戰慄)하였다. 대규모 난민이 서쪽으로 대이동을 하면서 유럽은 몽골군이 오기도 전에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몽골의 기병(騎兵)은 언 강을 넘어 헝가리에 순식간에 진입했다. 기록에는 “번개의 힘으로 기독교의 영토에 진입하여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학살을 자행하고 모든 사람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고 이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우구데이가 이끄는 몽골의 5만의 군대는 헝가리로 진격했고 2만의 군대는 폴란드를 가로질러 독일 북부로 진격했다. 당시 독일의 헨리크 2세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의 연합군 3만 명을 모았다. 1241년 두 군대는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 근처 레그니차에서 처음 격전을 벌였다. 몽골군은 두 번째 공격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럽의 기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추격해왔다. 몽골군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아났다. 유럽의 기사들의 갑옷과 투구는 엄청난 무게였지만 몽골의 군대는 기동성에 초점을 두었다. 유럽의 말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몽골군은 일제히 말머리를 돌리고 반격에 나섰다. 몽골군은 연합군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진짜 목표는 헝가리의 초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게르만 군을 격파한 똑같은 전술이 헝가리에서 되풀이되었다. 몽골을 추적하던 헝가리군은 똑같이 처절하게 패배했다. “비참한 주검이 겨울 낙엽처럼 길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퍼붓는 비처럼 피가 흘렀다.”고 당시 상황이 묘사되어 남아있다. 이 승리는 유럽 봉건제와 중세의 완전한 붕괴(崩壞)의 예고편이었다.

 

몽골군이 러시아, 불가리아, 폴란드, 독일, 헝가리를 다 정벌하는 동안에도 유럽은 아직 이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극심했다. 더욱이 그해 10월 6일 일요일에 일식(日蝕)이 일어나 해가 사라지자 유럽의 불안은 공황(恐惶)으로 바뀌었다. 루이 9세는 전 유럽이 함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전선으로 나갔다. 전선으로 나가면서 그는 왕비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번 원정은 우리가 몽골군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몽골군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헝가리에서 몽골군은 발을 멈추었다. 그들은 전사 일 인 당 말 다섯 마리가 함께 움직였다. 숲과 강과 밭에서는 그들의 기동성이 떨어지고 만다. 특히 습한 기후에서는 그들의 활이 거리와 정확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우구데아가 죽었다. 몽골은 미리 왕위 세습자를 지명하지 않는다. 유고(有故)가 생겼을 때 회의를 통해서 선출한다. 왕위 세습 투표를 위해서 본국으로 귀국하여야 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유럽이 생각보다 너무 가난해서 약탈할 물건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세 가지 이유로 도나우강 너머를 정찰하기는 했지만 서유럽 전면 침공은 포기하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터터바녀 시내를 지나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앞을 가로막더니 차에서 급하게 사람이 내린다. 나의 달리기 명상 시간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깜짝 놀랐다. 자신을 피터 팔라스티라고 소개하고 신문기자인데 아침에 코마롬에서 달리는 나를 보고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는데 좋은 기삿거리가 될 것 같았는데 지금 다시 보게 되어 쫓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일정, 달리는 거리, 목적 등을 세세히 물어보고는 사진 촬영도 부탁한다. 신문에 기사가 나가면 알려주겠다고 나의 이메일 주소까지 적어갔다. 내일 아침이면 터너바녀 시민들은 출근 시간에 버스에서 내 평화마라톤 소식을 읽으면서 출근할 것이다.

 

칭기즈칸은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려는 꿈을 가졌었다. 그의 방법은 잔인한 전쟁이었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다져놓은 ‘팍스 몽골리카’는 한동안 낙타의 등에 비단을 싣고 안전하게 동서양을 왕래하게 되었다. 나도 세계가 하나가 되는 꿈을 꾼다는 의미에서 그와 동급이다. 나는 ‘유라시아 평화의 시대’에 고속열차를 타고 한국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헤이그에서 저녁을 먹는 날을 꿈꾼다. 나는 평화가 그 일을 해줄 거라고 믿는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