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6)
서울이와 평양이의 오작교 만들자!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10월 19일, 길 떠난지 한 달 20일이 지났다. 거침없이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를 지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들어왔다. 내게 들이닥치는 육체적인 고통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게되니 몸의 기름기가 다 빠졌다. 피부는 짐승의 가죽처럼 검고 눈은 야수의 그것처럼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몸무게가 줄어 가벼움이 느껴졌다. 길 위에서도 많은 부조리를 만나지만 삶의 부조리보다는 훨씬 젊잖은 편이어서 마음도 가볍다. 유라시아 대륙, 헝가리 평원이 내가 이 여정에서 기대했던 알 수 없는 기쁩의 일부를 제공하여주는 건 확실하다. 나는 이런 기쁨들을 가을 들판의 농부가 추수를 하듯 한 톨 한 톨 정성스레 거둬들여 삶의 양식으로 쓸 것이다.
1번 국도를 타고 부다지역의 도나우강 서안까지는 잘 찾아왔는데 페스트지역으로 넘어가는 다리 입구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물었지만 확신이 가지 않아 가다 되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다 뿔테 안경을 쓴 여학교 기숙사 사감 같은 인상의 만삭의 배를 한 여인에게 길을 물었다. 도시의 바쁜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일은 아무리 머나먼 동방에서 온 손님일지언정 쉬운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만삭의 배를 한손으로 받쳐들고 앞장서며 유창한 영어로 길을 안내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어렵사리 페스트 지역으로 건널 수 있었다.
9개의 멋지고 개성 있는 다리가 강서의 부다와 강동의 페스트를 하나의 도시로 엮어준다. 다리로 인해 강은 분단과 단절의 강이 아니라 평안과 풍요를 선사하는 화합(和合)의 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세체니 다리는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이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두 도시를 이어주는 다리는 없었다. 언덕이 많고 전망 좋은 부다 지역에는 왕족과 귀족이 그 건너편의 평지인 페스트에는 서민들이 살았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다리를 놓지 않았다.
헝가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의 하나인 세체니 백작은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고 급히 비엔나로 가야 할 때 갑자기 불어난 강물의 물살이 거세 나룻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때 백작은 강 양편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화합의 다리를 세우겠다고 결심을 했다. 1849년 다리가 완공되자 부다와 페스트는 부다페스트로 통합되었다. 다리는 세체니 다리로 명명되었고 ‘사슬 다리’라고도 불린다.
예약한 숙소는 페스트에 있었다. 다음 날 하루 휴식하면서 교민들과 만날 예정이었다. 언덕 중간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 들어서자 평창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과 반다비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전시실에는 마침 이 철수 판화가의 ‘새들 날아오르다’라는 주제의 판화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판화전을 감상하고 있는데 김재환 문화원장이 내 옷차림으로 단박에 나를 알아보고는 직접 안내를 하여 안으로 들어가 신기재 목사님을 비롯해 나중에 오신 평통위원들과 다과회를 가졌다.
한국문화원에서 다음 주에 한국영화제가 시작되어 분주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마웠다. 고된 여행 중에 각국에 살아가는 교민들과의 만남은 즉러움과 유일함을 선사아여주었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교민들이 응원을 해주고 격려를 해주니 얼마나 힘이 나는 줄 모르겠다. 평화통일을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민간외교를 펼치는 교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일은 중요하다. 재외동포를 포함한 우리 8천만 동포가 힘을 합쳐야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재 목사님이 직접운전을 하면서 마치 관광 안내원처럼 깨알 같은 해설과 함께 부다페스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겔레르트 언덕에 올랐다.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해주는 다리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흥얼거려본다. “당신이 맥이 빠져 어두운 기분일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넘칠 때, 내가 눈물을 닦아 드리지요. 나는 당신 편이거든요. 세상의 바람이 차갑고 친구도 없을 때, 고뇌의 강에 걸린 다리처럼 내가 당신의 다리가 되어 드리지요.”
겔레르트 언덕에 있는 치타델라 성은 보통의 요새와는 다르다. 보통 성은 도시나 왕궁, 시민들과 그 재산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짓는다. 그런데 이 성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헝가리 왕궁과 도시의 시민들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왕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 언덕에 올라서면 다 보인다. 1848년에 일어난 헝가리인들의 독립투쟁이 이 요새(要塞) 때문에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오스트리아가 물러나자 이번엔 나치가 이 요새를 차지했고 결국은 소련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 장소이기도 했다. 이 요새 앞에서 한 남자가 여자들이 지나갈 때만 여자들을 도취시키려고 노래를 불렀는데 여자들의 마음은 요새처럼 굳건하고 도취되는 건 그 남자 자신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스스로에 도취되어 노래를 불렀는데 여자들이 이미 지나간 것도 모르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치욕의 치타렐라 성 맨 꼭대기에는 소련이 승전 기념으로 높이 40m에 달하는 평화의 여인상을 세웠다. 여인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를 치켜들고 시내를 굽어보고 서있다. 헝가리인들의 승리가 아닌 소련 승리의 상징으로 세워진 상은 지금은 헝가리인의 승리 상징으로 당당하게 겔레르트 언덕에 부는 바람에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있다. 치욕의 역사도 지워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면 승리의 역사가 된다.
다시 발걸음을 움직여 차를 적당한 곳에 파킹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니 네오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어부의 요새가 있다. 신기재 목사님은 이곳에서 현지인들을 상대로 목회를 오래 해서 한국에서 친구들이나 손님이 오면 수도 없이 관광 안내를 하여서 전문 관광가이드 이상으로 알차게 안내를 해준다.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아프리카나 아시아처럼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을 선택하지 않고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가진 국가에서 선교하냐고 물었다. 그는 헝가리에 기독교 전통은 있어도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이 좀 있다고 했다.
1900년경 지어진 이 요새는 헝가리 애국정신의 한 상징으로 어부들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어부의 요새’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차시교회 앞에는 헝가리 최초의 왕으로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슈트반 왕의 조각상이 있다. 마차시교회와 어부의 요새, 부다성이 함께 어우러져 동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다. 헝가리의 건축양식은 서유럽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 느낌과 같았다. 마차시교회는 여기서 두 번이나 결혼한 마차시왕의 이름을 딴 곳이다.
지붕의 기와는 도자기를 구워서 얹어서 더욱 반짝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 위협 속에서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왕국의 재건을 위해 마차시왕이 비엔나의 슈테판 대성당을 본떠 증축했는데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오스만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이 교회는 오스만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바뀌었다. 나중에 오스만이 물러나면서 복구되었다. 성당에 들어가 위압적으로 높은 천장을 바라보니
10세기 말 헝가리에 정착한 마자르족은 이슈트반 1세가 즉위(卽位)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나갔다. 그가 정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대가로 로마교황청은 그에게 왕관을 선사한다. 이슈트반에 대한 헝가리 사람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이슈트반 성당은 그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유라시아를 달리며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 관습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說話)가 비슷한 것들이 수없이 발견된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의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증거가 된다. 나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 흔적들을 따라갈 것이며 그 일은 내게 엄청난 자부심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위해 거주이전의 자유를 최대한 누렸고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교역을 해왔다. 결국 인류의 뿌리는 하나이고 이는 ‘한 울안 한 가족’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이제 스마트 시대에 우리에게 그 자유가 더욱더 소중하고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이제 부다페스트의 일정을 마치고 더버시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길을 가다 골목길에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20~30명 나와 웃고 떠들고 있어 어린 강아지의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문 안에는 더 많은 여자가 따뜻한 햇살 아래 나와서 옹기종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큰 집 같이 보였는데 수공업을 하는 공장이었는 모양이다. 여자들은 대부분 30대 이상이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떠들썩하고 난리가 났다. 여자들도 나처럼 호기심이 많았고 군중심리까지 더해져서 작은 소란까지 벌어졌다. 내가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여자들은 ‘대장금’이나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찍은 드라마 ‘아이리스’를 물어본다. 내가 한 여자에게 다가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니 그녀는 부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저쪽으로 꽁무니를 빼고 대신 옆에 있던 여자가 더 호기심이 많은 듯 다가와 팔짱까지 끼고 포즈를 취하자 다른 여자들이 우르르 웃으면서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많은 여자에게 관심을 받아본 적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이면 왠지 실속 없이 기분이 좋다. 사진 속에 감출 수 없는 기분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오늘은 그냥 5번 국도를 따라 쭉 가면 된다. 길을 찾아 헤매지 않아서 좋다. 거기다 서울에서는 2,000km 주파 기념으로 나를 후원하는 일일호프를 열어 350여 명이 모이는 대 성황을 이뤘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가을은 첼로의 현처럼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들을 흔들어 떨려 울리게 한다. 이 들판에서 생령있는 모든 것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풀벌레가 화음을 넣고 들판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은 민들레를 꺾어 바람에 훨훨 날려 보내며 즐거워한다. “...어느새 내 마음 민들레 홀씨 되어 강바람타고 훨훨 네 곁으로 간다.” 내 마음은 벌써 5,000km, 만km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도나우강 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가 그 사이에 다리가 생기자마자 정분이 나서 한 살림을 차리면서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과연 서울이와 평양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서울이와 평양이가 연분(緣分)이 날 수 있도록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교포들과 한반도에 사는 남, 북 시민들과 세계인들의 작은 마음 하나하나를 엮어서 오작교(烏鵲橋)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서울과 평양을 잇는 고속 전철이 놓여지면 멋진 청춘남녀처럼 바로 서울이와 평양이는 정분이 날 것같다.
세체니 다리는 뿔뿔이 흩어져 돌아다니는 돌들을 모아 다듬고 차곡차곡 쌓고 이어서 만들었다. 뿔뿔이 흩어져 돌아다니는 작은 마음들을 쌓고 잇는 일, 그것이 이념의 분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고, 강대국들의 거칠고 험한 자국 이기주의를 넘어서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다리가 될 것이다. 나는 바람 좋은 오늘도 그저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흥얼거리면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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