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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9)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9)

까레이스키와 함께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4월 16일, 그 옛날 석국(石國)이라 부르던 타슈켄트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힘이 붙었다. 습도가 없는 초원의 봄 공기가 상쾌하다. 이 나라에 보석과 보석가공 기술자가 많아 중국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곳은 750년 고선지 장군이 한때 점령하고, 이 나라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 장안까지 데려갔었던 곳이다. 이렇게 시작한 우리와의 슬픈 인연은 한참 후에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고려인의 이주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또 81년 후 나의 평화마라톤의 중간지점으로 내게는 잊지 못할 도시가 되었다. 타쉬켄트는 내 여정의 절반을 우여곡절 끝에 마치고 새로운 절반을 달리기 시작해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 우리말을 더듬더듬 쓰고 삼시 세끼 김치를 먹는 사람들이 20만 명 가까이 산다. 고려인은 경제와 학문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지인들은 고려인을 일컬어 ‘부자’ ‘근면 성실한 사람들’ ‘가족끼리 화목한 민족’이라고 평가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처음 러시아는 변방인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하여 연해주로 이주해오는 한국인들에게 토지도 제공하고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많은 동포가 수월하게 연해주에 정착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민족운동도 펼치며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20년부터 태도를 돌변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팽창을 우려한 소련은 숫자가 많고 단합력이 강한 연해주에 살던 카레이스키를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10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 강제이주 결정을 내리고 2~3일 내로 갑자기 이동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탈린이 동원한 124대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가축 운반 칸과 화물 운반 칸에 짐짝처럼 실린 동포들은 11월의 혹한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그날 그 짐칸에서 얼마나 무섭고 기가 막히고 막막했을까? 상상하는 내 가슴이 금방 먹먹해진다. 무력감에 빠져 실낱같은 희망마저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았다. 일말의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면 그들에게는 그런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어서 기차에서 내려야 했다. 기찻속이 아니라면 그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기가 있었을 것이다.

 

 

연해주는 한때 발해의 땅이었다가 여진족의 금나라가 지배하던 곳이었다. 이곳에 최초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아시아인들과 퉁구스인들이었다. 금나라는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인구 대부분은 살해되었다. 이후 오랜 기간 이 지역은 비옥한 땅에도 문명이 발달하지 못하고 버려진 땅이었다. 청나라에 속하다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아무르강 이북지역의 연해주 지역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카레이스키를 생각하면 잃었던 가족처럼 안타깝고 슬프고, 또 잘 살아줘서 고맙고 자랑스럽다.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죄 밖에 없는 이들은 이때 우즈베키스탄에 7만 6천 명, 카자흐스탄에 9만5천 명이 분산 이주되었다. 이들은 다시 다른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으로 옮겨 5대에 걸쳐 거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소련 정부는 이들에게 한국말 사용을 금지하고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였으나 고려인들은 이곳 우즈벡인들의 따뜻한 환대와 도움으로 토굴과 움막을 짓고 씨를 뿌리며 꿋꿋하게 정착해 삶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성실하게 사막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고 벼농사 등 농작물을 심었다. 그들은 이곳을 전 세계에서 벼농사가 가능한 가장 북쪽 지역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구었다. 이곳은 북위 47도이다. 그들이 모여 살던 곳은 카레이스키 콜호스(한인 집단 농장)라고 불렀다.

 

그들은 억척스럽게 살았고, 자식들을 공부시켰고 소련 시절 노력 영웅 200명 가운데 120명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들을 잊고 살았으나 그들은 조국을 잊지 않았고, 우리의 조국은 둘로 갈라졌지만 그들의 기억 속의 조국은 언제나 하나였으므로 그들이 되돌아갈 조국도 하나였다. 그러니 카레이스키는 조국의 통일이 우리보다도 더 절실할지도 모르겠다. 그 간절한 카레이스키의 염원이 나의 평화마라톤 절반의 성공을 열광적으로 축하해주는 이유일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아침에 거리행진이 시작되는 그랑미르호텔 앞으로 나갔더니 이미 사람들이 구름ㅊ럼 몰려와 있었다. 애초 경찰 에스코트 차가 한 대만 나오기로 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두 대가 더 따라붙었다. 카레이스키의 후손들과 우리 교민들 그리고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는 현지인들이 500여 명의 환호는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이어서 통일된 조국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주(駐)우즈베키스탄 한국 대사에게 인사말을 부탁했었는데 그날 저녁 강경화 외무장관 방문이 잊어 준비로 바뻐 나오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자 재사와 참사관 서기관까지 여서일곱 명이 나와서 함께해주었다.

 

공산주의 소련연방에 속해 있다가 독립해서도 독재자의 통제를 받던 우즈베키스탄에서 정부의 공식행사가 아닌 행사에 시민들이 500여 명이나 모여 경찰 사이드카의 호위를 받으며 타슈켄트 한복판에서 거리행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들판에서 저 들판으로 이동할 때 큰 깃발을 들고 풍물패를 앞세워 이동했다. 우리도 그렇게 천천히 신명나게 어깨를 덩실거리며 그간의 아픔 그리움 다 날려버리며 함께 ‘우리의 소원’과 ‘아리랑’을 부르며 하나가 되는 의식을 장엄하게 치르며 행진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회오리쳤다. 이런 행진은 고려인 이민역사에도 길이 남을 일이라고 한다. 풍물놀이패의 북과 꽹과리의 장단에 맞춘 신명나는 한민족의 행진이 타슈켄트 도심 한복판에서는 진행되는 장면은 한국에서 취재를 위해서 날아온 KBS 취재팀과 우즈벡 공영 TV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랜드 미르 호텔 앞에서 시작된 평화행진은 바브로 공원까지 아이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를 아우르는 현지 동포와 고려인들이 어깨를 덩실거리며 하나가 되었다.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았지만 블루투스처럼 플러그를 열결하지 않아도 흐르는 핏줄의 감동이 서로에게 전이되었다. 그곳엔 사랑과 평화의 한마당 열기로 가득 찼다.

 

중앙아시아의 그 척박한 땅에도 우리 고려인이 씨 뿌리고 농사 지으며 자리 잡았듯이 평화의 씨도 이 격랑이 몰아치는 시대에도 싹을 피워내고 있다. 이곳 바브르 공원 한가운데에 80여 년 전 고려인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한겨울에 내던져지다시피 이곳에 왔을 때 따뜻하게 맞아 준 우즈베키스탄 시민들의 우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국정부가 조성한 서울공원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서울공원에는 서울에서 응원 오신 분들과 LA의 정연진, 파리의 임남희님 등이 한자리에 했다. 특히 8000km를 달려온 내 발을 닦아주는 세족식 행사에는 김종근 님이 특별히 지리산 계곡물을 떠와서 역시 LA에서 온 김현숙님이 내 발을 씻겨주었다. 8000km를 달려온 발의 피로뿐 아니라 몸과 마음의 피로도 한꺼번에 싹 가시는 듯했다. 분위기는 고조되고 ‘아리랑’이 울려 퍼졌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이 터져라 함께 부르니 금방 눈시울이 적셔졌다.

 

나는 머나먼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과분한 환영을 받았다. 전직 교육부 장관인 지랏씨가 호텔까지 찾아와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유라시아를 달려온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피곤하지만 세계언어 대학과 이슬람 대학 두 군데 송인엽교수님과 함께 나가서 내가 지나온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분들이 주인이 될 미래에는 이 유라시아에 강물 같은 평화가 넘쳐 맘껏 여행도 다니며 더 나은 삶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학생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하였고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학생들에게 강연하며 나누었던 시간은 내게 소중하고 귀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나는 60에 비로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계 기록 도전에 나섰으니 이제 20세 전후일 그들에게 절대 조급해하지 말고 당신들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므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나이가 71세이신 지랏씨는 이 도시에 들어오는 길에는 나와 함께 10여 km 같이 동반주도 해주고 떠나는 날에는 손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우즈베키스탄 전통의상을 손수 입혀주면서 내게 몇 번이고 ‘영웅’으로 불러주었다. 지금 우즈베키스 탄은 한국을 배우고 따라잡기에 최선의 노력을 한다고 한다. 지난해 이곳 대통령이 사상 처음 국회 연설을 하였는데 이때 한국을 배우겠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전직 행자부 차장을 영입하기도 하고 이 날 나의 환영행사 때 이참씨가 나와서 악수를 청해서 깜짝 놀라서 물어보았더니 이곳 관광청에서 일한다고 한다. 관광청에서 그가 지난 정부에서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일했던 경험을 배우고자 한 모양이다. 또 이날 행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세종학교 교장 허신행씨는 26 년 전 이곳에 와서 어려운 가운데 한국어 학교를 세우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국어 학교로 키워놓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제 세상은 변화의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 진원지는 한반도이다. 그 변화의 흐름은 기존의 냉전적 사고로는 읽어내기 힘든 새로운 바람이다. 보다 넓은 공간과 관념을 아우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가 집착해왔던 자본의 논리, 패권 경쟁과 냉전질서, 좌파 우파로 편 가르기 등은 편협한 사고라는 것이 이제 확연히 드러났다.

 

광대무량한 대륙에 서니 그동안 우리가 사소한 이기주의적 통념에 갇혀서 좁은 공간에서 이유도 모르는 채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끼리 치열하게 싸워온 우매한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제 상식으로 몰상식을 걷어내는 간단한 일만 남았을 뿐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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