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86)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86)

초원의 빛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그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빛을 찾으리.”

 

8개월 전 나는 길을 떠났고 지금은 맑고 순결한 키르기스스탄의 5월 속 깊은 곳까지 달려왔다. 솟구쳐 올라오는 대지의 봄의 기운과 이슬처럼 내려앉는 하늘의 기운이 내 몸에서 만나 알 수 없는 특별한 기운을 선사한다. 나는 바람이 거셀수록 마음의 돛을 활짝 폈다.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듯 초원을 달려나갔다. 살아 움직이는 듯 뒤척이는 풀잎이 싱싱하고 힘차게 느껴졌다. 소와 말과 양은 초록으로 배를 채우고 지금 한민족은 통일의 희망으로 영혼을 채운다. 초원의 하늘은 내 아버지의 생애처럼 좁지 않고 드넓고 푸르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곳에 오면 누구든 잃었던 시력 되찾고 잃었던 희망 되찾을 것 같다. 잃었던 소중한 기억을 되찾을 것 같다. 초원은 말 그대로 풀밭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목가적 풍광. 양 떼들. 목동. 낙타들의 행렬, 그리고 뭉게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연상되는 곳이다. 그러나 초원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겠는가? 사실 어떤 삶인들 보이는 대로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하겠나! 초원은 온대 지방의 반건조기후로 산림지대와 사막지대 사이에 나타난다. 이 드넓은 초원은 중국의 동북지방의 대흥안령산맥에서 시작해 몽골 초원과 카자흐 초원을 지나서 동유럽의 헝가리까지 푸른 띠를 이룬다. 이 초원길이 비단길의 옛 고속도로인 셈이다.

 

다 말라죽은 듯 황폐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생령들이 봄을 맞아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여름이 오면 초원은 충만하고 가축들은 살이 찌고 하늘은 푸르고 드높다. 들판은 온갖 생명이 환희로 넘쳐난다. 목동은 말을 타고 푸른 초원을 달리며 가축을 돌보며, 하늘과 땅, 천지의 온 생명과 자신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체감을 느낀다. 그러다 기나긴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오면 세상은 순식간에 척박해진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대자연의 원리다. 그때는 모든 생령들은 봄이 올 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국경 마을에서 숙소를 잡는 데 실패하고 다음 마을인 카라발타까지 가서도 엄청 고생하며 여기저기 물어본 후에야 잠 잘만 한 곳을 찾았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장기 투숙을 하며 몸을 파는 것이 분명한 여자가 야릇한 땀 냄새를 풍기며 방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물고 지나간다. 피할 수만 있으면 이런 분위기는 피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피곤한 몸을 쉬어가야 했다. 냄새나는 목욕탕에서 샤워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러시아의 작곡가 알렉산더 보르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찾아내 다시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어보았다.

 

좋은 음악을 만나는 것은 항상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 곡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마치 세밀화를 그리듯이 음으로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지나는 이곳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초원을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고 낙타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귀에 아련하다. 음악 자체는 훌륭하고 나무랄 데 없는데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약간 비위가 뒤틀린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무역을 하려고 지날 때 러시아 병사들이 호위를 해주는 곳, 러시아의 통치에 이었고 계속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현악기의 고음으로 광활하고 고독한 초원을 표현하고 이어서 목관악기가 이어지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말과 낙타의 발굽 소리, 잉글리쉬호른의 동방 음악이 신비롭게 클라리넷과 호른이 뿜어내는 러시아 서양 음악과 조화를 이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유목 생활을 하는 키르기스인들은 예부터 몽골이나 중국, 그리고 아랍세계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삶을 이어왔다. 키르기스 서사시는 대부분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영웅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았다. 서사시 그 자체를 ‘마나스’라고도 하지만 주인공의 이름 또한 ‘마나스’라고 불린다. 키리기스인들은 자신들의 서사시 ‘마나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다. 이 서사시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때 키르기스인들을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나스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친 것보다 두 배 반이나 길고 내용이 다채롭다고 한다. 마나스를 구송하는 이들을 ‘마나스치’라 부르는데 그 긴 마나스를 다 외워서 구송한다. 위대한 마나스치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에 비견될 만큼 하늘을 찌른다. 그들은 천국에서 온 음송자로 칭송받으며 키르기스어는 이들에 의해서 천국에서 천국으로 흐른다. 화폐에도 마나스치가 등장한다.

 

마나스가 속한 키르기스민족은 몽골고원과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유목민의 후예다. 이들은 현재 파미르고원 북부, 타림 분지 서부, 톈산산맥의 남부 지역과 페르가나 동부지역에 거주한다. 특히 키르기스 민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돌궐계열 민족 중 하나로 고구려나 발해의 이웃 민족이였다.

 

이 아름다운 초원의 길을 달리는 것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차들이, 특히 트럭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엄청난 먼지구름에 감싸 안겨야 했다. 포장은 구소련 시대 이후 한번도 보수공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곳곳이 패어있었다.

 

초원의 야생화(野生花)는 척박한 땅에서도 꽃을 피우고 진한 향기를 뿜는다. 말발굽 소발굽에 밟혀도 다시 일어나 자라 세대를 이어간다. 이곳 중앙아시아에 이주해온 고려인들은 초원의 야생화보다 더 강인하게 살아남아 한국인 특유의 향을 흩뿌린다. 길을 나서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가졌다. 키르기스스탄에도 우리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흐른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양종씨는 20년 전 몸이 안 좋아 공기 좋고 물 좋고 약초가 많은 이곳에 휴양하러 왔다가 정착해 살고 있다. 그는 한국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건축자재 사업도 하면서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는 나의 평화마라톤 소식을 듣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주고 싶어 했다. 자신의 엘림 게스트하우스에 마음 편하게 있으라 해서 그곳을 거점(據點) 삼아 며칠 왔다 갔다 하며 달렸다. 덕분에 엘림에서 잠도 편히 자고 잘 차려주는 밥상으로 영양도 충분히 보충했다. 길 위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편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 주는 사람이 제일 사랑스럽더라! 저녁을 사준 평통위원인 정지성씨도 여기서 한식당과 여행사를 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장군 후손들도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경상도 구미가 본관인 그들은 거의 백 년 전 8000km를 흘러들어와 이곳에 살고 있고, 나는 서쪽 끝에서 8000km를 달려와 그들을 만났다. 허 블라디슬라브씨는 9형제 중 형님 한 분 누나 한 분만 살아있다. 그가 맏형님은 16세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동사했다는 말을 할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한마디가 혹독한 삶을 다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나그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가 초대한 고려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잘 먹고 아침에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는 길에 허 블라디슬라브씨와 그의 조카 허 블라디미르씨가 나와 배웅해주었다. 블라디미르씨는 다음 주에 이식쿨 호수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처음으로 풀코스 도전을 한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국경까지 15km를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독립군 손자와 증손자는 그들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조국 자주독립의 꿈을 나를 통해서라도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심정으로 나에게 극진했다. 그들은 헤어질 때 선물로 준 휴대폰 케이스에 200달러를 넣어주었다. 마치 독립자금이라도 받은 듯 결연함이 울컥 올라온다. 아마도 또 누군가는 그들 할아버지의 주머니에 눈물 젖은 독립자금을 꼬깃꼬깃 집어 넣어주었을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사실 늘 지나다니던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역에 이르는 왕산로가 왕산 허위선 생을 기리는 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왕산 허위선생은 구미 태생 조선말 의병장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조직한 13도 의병 연합부대 총군사장으로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펼쳐 왜적(倭敵)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후일 "우리 2천만 동포에게 허위 선생과 같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날 같은 국치(國恥)의 굴욕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고 그를 흠모하였다.

 

왕산 허위 가문은 우당 이회영 가문, 안중근 가문, 석주 이상룡 가문과 함께 항일운동 최고 명문 가문 중 하나이다. 허위 가문은 충효를 중시하는 가풍 덕분에 그의 4형제와 그의 직계 후손들 그리고 이육사까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이육사 모친은 허위의 4촌 허길의 딸이다.

 

왕산 허위는 성균관 박사와 평리원 수반 판사를 지낸 문관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는 양주에서 서울 탈환 작전을 펼치며 일거에 동대문 밖까지 밀고 들어왔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잡혀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가 된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남긴 유언이 또 나를 찡하게 만든다. "아버지 장사도 아직 지내지 못했고 국권을 회복하지도 못한 불충과 불효를 지었으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이제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우리 영토를 넓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넓히고 활동 반경을 확장할 수는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닭장 안에서 모이가 없다고 한숨 짓지 말지어다. 유라시아 한복판에 뛰어들어 바라보니 초원의 풀처럼 기회는 널렸다. 혹여 닭장 속이 답답하면 배낭을 메고 닭장 속을 뛰쳐나오라!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주유(周遊)하라! 그러면 답을 얻으리라. 우리의 영역은 한없이 확장되리라!

 

한때 그렇게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젠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찾을 길 없을지라도 우리 서러워 말지니

도리어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소서!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