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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87)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87)

백학(白鶴)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나는 가끔 병사들을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이/ 잠시 고향 땅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버린 듯 하여/ 그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지/ 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잃어야 하는지?/ 음~ 음~ 음~ 음~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의 지친 학의 무리/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런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의 이름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 놓아 부르면서.../ 음~ 음~ 음~ 음~”

 

러시아 국민가수로 사랑받는 저음의 가수 이오시프 꼬브존의 노래로 우리에게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알려지면서 우리의 한의 정서와 비슷해 유명해진 곡이다. 이 노래는 사실 러시아와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체첸공화국의 음유시인 감자토비치가 1940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와서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러시아와의 오랜 전투로 체첸의 병사들이 다시 귀향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 이제는 카스피 연안으로 날아드는 백학이 되어 날아온다는 피에 물든 아픔이 짙게 배어있는 내용이다.

 

이곳 알마티 고려인들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나의 최고의 고려사항은 어떻게 피로를 풀고, 어떻게 영양을 보충하는 가이기 때문이다. 숙소에 차려진 저녁 식사를 하고 쉬면 세 시간은 더 쉴 수 있다는 계산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갔다. 잠시 망설였을 뿐 바로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고려인’ 그들은 나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국적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만 핏줄이 땅긴다는 이유로 내게 시간을 내어 밥을 사주며 나의 ‘평화통일’ 일정에 함께 자랑스러워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도 핏줄이 땅겼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밥보다도 그들과 가슴을 맞대고 싶었다. 그들이 살아온 고달픈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고 싶었다. 그들이 조국에서 백 년의 분리 속에서 지켜낸 우리 조국의 오랜 맛과 지금의 맛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맛보고 싶었다. 언어는 지켜내지 못하면서도 기필코 지켜낸 맛의 비밀이 알고 싶었다. 맛을 통해서 느껴지는 동질성의 전류에 감전되는 체험을 하고 싶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나는 아차 싶었다. 큰 홀에 테이블이 있는 게 아니라 노래방 식의 개별 방이었다. 노래까지 부르다가는 소련군의 ‘붉은 명령서’처럼 막무가내식으로 밀려오는 피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 증편부터 나왔다. 쌀로 만든 얇은 술떡이다. 그리고 나온 것이 국시이다. 우리의 잔치 국수 같은 것인데 국수 종류의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아주 맛있는 음식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주문한 감자 만두와 찐빵 만두, 그리고 묵은지 돼지갈비가 나왔다. 거기에 우즈베키스탄식 볶음밥이 곁들여졌다. 이 집의 유명한 아바이 순대가 준비가 안 된 것이 안타까웠다.

 

백 년 이상을 이역만리 타국에 떨어져 살면서 재료가 충분하지 않았을 터인데도 이렇게 훌륭하게 맛을 지켜내고 이어온 것이 놀라웠다. 어찌 맛만 지켰으랴? 맛을 통해서 우리의 혼을 지켜낸 것이다. 그 맛을 통해서 그들은 고향이 한국임을 각인하면서 음식을 섭취한 것이다. 그 맛의 혈류를 통해서 연어의 유전자가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맛을 통해서 백 년을 떨어져 살아도 우리는 하나임을 확인했고 그들이 왜 통일된 조국을 간절히 원하는지 확인했다.

 

 

하나임을 확인하는 것은 맛뿐만 아니라 노래도 있었다. 처음에 그 식당에 들어서며 감을 잡았던 대로 노래까지 마쳐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던 기억의 저 끄트머리에서 간당간당하는 옛 노래와 요즘 조국에서 유행하는 노래까지 잃어버린 조국의 언어로 불러대며 즐거워했다.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조국이 그리워도 못 가는 사람들 대대로 유랑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카레이스키 디아스포라.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떠내려오면서 부르던 노래 ‘나의 살던 고향’ ‘아리랑’에 이어서 러시아어로 ‘백만 송이 장미’와 ‘백학’이 이어졌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디아스포라, ‘흩어진다’는 이산(離散)의 상태를 의미이지만 떠나온 곳의 규범과 관습, 문화를 지키며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흩어진 이후 정주한 땅의 지리적, 공간적 특성과 그곳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공동체,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할 ‘역사적 조국’을 향한 집단적 열망을 아우르는 개념일 것이다. 동시에 여기도 저기도 속하기도 하며, 여기도 저기도 아니기도 하다.

 

연해주는 230년 동안 발해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주인 없는 땅이었다. 그러다 청나라 땅이 되었다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넘어갔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18년 일본이 연해주를 점령하게 된다. 1922년에 다시 러시아로 다시 넘어가게 되었다.

 

1937년 가을 ‘붉은 명령서’가 떨어지자 연해주의 17만여 명의 카레이스키는 강제이주 열차에 태워졌다. 총을 찬 내무인민위원이 들고 온 붉은 명령서에는 사흘 후 씨앗과 가재도구만 챙겨서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집결하라고 쓰여있다. 여름내 농사지은 곡식은 아직 추수도 끝나지 않았다. 농터와 집은? 가축은? 얼마 전 끌려간 남편은? 도대체 왜 떠나라는 거요? 어디로? 그곳에 가서 뭘 합니까? 의문은 많았지만 답은 없었다. 사흘 후에 떠난다는 것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간다는 것만 확실할 뿐. 군과 경찰에 의해 마을이 봉쇄되어 도망갈 길조차 없었다.

 

 

임신한 소도 돼지도 눈을 크게 뜨고 달을 올려다보며 짖어대는 누렁이도 데려갈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갇혀있으면 굶어 죽을까 봐 가축우리의 문을 열어두고 떠나는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의 초기 정착지인 우슈토베까지 6천km, 지금은 기차로 7일이 걸리는 거리라 하는데 그때는 40여 일이나 걸려서 혹한의 추위와 눈보라 속에 화물칸에 실려 왔다. 고려인들은 이곳에 버려지듯 내려져서 눈을 걷어내고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고 갈대를 꺾어 바닥에 깔다가 나중에 온돌을 놓고 겨울을 났다. 그리고 학교를 지어 2세 교육을 했으며 카자흐인들에게 농경문화를 가르쳐줬다. 그들은 스스로 ‘인간이 적응하지 못할 환경은 없다.’는 명제를 증명하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고려인이라 불리는 카레이스키. 그들은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존재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시민 지배를 받던 시절에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 러시아에 자리 잡고 살던 우리 민족이다. 조국이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하던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국은 둘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잘 배운 사람의 대명사라고 한다. 타국에서 인정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독일의 유대인이 그랬고 일본의 조선인이 그랬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몰인정하고 돈에만 눈먼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뿐이다. 강인하고 근면한 민족성은 벼농사할 수 없었던 그곳의 갈대밭을 논으로 바꾸고 밭을 일구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인구 비율은 1.5%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30대 부호 가운데 5명이 고려인들이라고 한다.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도 많고 교수 학자도 많다. 그들은 이 조국의 음식을 먹으면서 악착같이 살아서 이 카자흐스탄의 초원에 깊이 뿌리를 내린 민들레처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카자흐스탄 한인회에서 매년 어린이날 전후로 한인과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대상으로 어린이날 기념 백일장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평화통일 기원 백일장은 나의 평화통일 기원 평화마라톤과 알마라산 캠프장에서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조우를 했다. 알마라산은 톈산의 한 지산이다. 카자흐 사람들은 톈산을 메데우산이라 부르고 몽골인들은 탱그리 산이라 부르는 그 산이다. 우리는 행사가 끝나고 그 산에 올라 중간에 있는 눈 녹아 고여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호수를 구경하였고 3200m 정상에 올라 그 너머 키르기스스탄 쪽의 톈산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

 

아이들은 “한반도에 봄이 온다, 한반도 행복 뉴스, 한반도 이모저모 이야기, 북한 친구들에게, 문재인 대통령께, 내가 한국인이라고 느껴질 때” 등의 주제로 글을 썼고 나는 영광스럽게도 원불교에서 준비한 상품을 시상하였다. 나는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대로 여러분들이 자라서 우리나라의 일꾼이 되었을 때는 꼭 통일되어서 평화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꿈을 펼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알마티에서의 뜻깊은 행사는 이어졌다. 다음날 오전 9시에 원불교 교당으로 가서 김태원 교무님의 평화기원 법회를 보고 사과나무 기념 식수를 하고 시청 앞 독립 기념탑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의 평화행진을 호위하기 위해서 경찰차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한인들과 고려인들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하여 알고 지내던 송경원 씨가 멀리 시애틀에서 와서 마음을 모아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가 되는 연습을 제대로 했다. 하나가 되어 알마티 도심 6km를 행진할 때 거리를 지나는 차들은 경적을 울려주고 사람들은 손을 흔들고 손뼉을 치고 사진을 찍었다.

 

엊그제 한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 원불교 교단 차원에서 나에게 힘을 실어주려 강해윤 교무와 한울안 신문 편집장 박대성 교무를 보내주었고 나와 연원이 있는 강석준 교무를 가장 힘들고 어려운 구간을 나와 동반해서 평화마라톤을 한 달간 하라고 보내주었다. 이제부터는 홀로 달리지 않고 같이 달릴 도반이 생긴 것이다. 어깨를 맞대고 마음을 맞대고 달릴 사람이 있으면 발걸음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그리고 시애틀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교제를 나누던 송경원씨가 나를 응원하고 만나기 위해서 날아왔다. 평소 그녀의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에 반했고, 그녀의 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나로서는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었다.

 

나는 멀고 먼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평소 그리웠던 사람들과 언제나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먹먹하고 아련했던 고려인들을 만났다. 나는 바다처럼 넓고 망망한 초원을 달리며 마치 베링해까지 유영해 가서 대동강을 모강으로 하는 연어들을 만난 듯이 반갑고 기뻐서 눈시울을 적셨다.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서라도 가고픈 고향의 정을 나눈다. 내 마음 벌써 아버지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대동 강가에 날아간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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