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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인규 씨의 잘못된 삼위일체관

이인규 씨의 잘못된 삼위일체관

 

그리스도는 여호와가 아니라는 이인규 씨의 삼위일체관을 비판한다

 

 

[시사타임즈 = 진용식 목사] 서론: 왜 필자는 개인 이인규 씨의 주장에 대하여 답변해야 하는가?

 

<미주 세이연>이 필자를 이단시 결의하는 악한 짓을 하여 필자는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이 이단연구가들끼리 이단 논쟁해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던 중에 개인 이인규 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에 몇 차례 필자의 글에 대한 반박 내지 답변의 글을 올렸다. 그후 지난 3월 10일에는 “예수와 여호와의 명칭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인규 씨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성을 더 확실하게 나타내고 말았다. 물론 위 글은 어디까지나 <미주 세이연>이 공식 답변이 아니라 이인규 한 개인의 사상이요 글이다. 필자는 <미주 세이연>의 공식적인 글이 나오고 본격적으로 지상논쟁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이인규 씨는 비록 개인이지만 대답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인규 씨의 이단적인 삼위일체 주장이 <미주 세이연>의 견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만일 <미주 세이연>이 공식적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이인규의 견해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미주 세이연>은 붕괴될 것이다. 만일 필자의 변증의 글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비겁한 자들이 될 것이고 한국교회는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그간 <미주 세이연>은 공식적으로 필자의 글에 대하여 적극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무려 18번이나 글을 썼고 대답을 종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두 차례 소극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을뿐이다. 그러나 그 공적 답변 속에 오히려 이단적인 삼위일체관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사람이 필자에 대한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 박형택 목사였다. 결국 그는 지난 3월 11일 삼위일체 문제와 이원론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비판하였음을 한국교회 앞에 시인하고 필자에게 사과하는 진실과 큰 용기를 보였다.

 

 

보고서를 작성한 박형택 목사가 잘못을 깨닫고 개인적으로 사과하였으니 필자는 자연히 <미주 세이연>도 박 목사를 따라서 공적으로 사과하고 취소할 것을 기대하였다. 박형택 목사가 사과문을 필자에게 보내온 날자는 3월 9일이었다. 그 때 필자는 박형택 목사에게 이인규 씨도 그간 개인적으로 반박문을 올렸고 잘못된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하여 나를 공격하였으니 사과문을 이인규 씨와 공동으로 내서 유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권고하였다.

 

 

그 후 박형택 목사는 ‘이인규 씨를 설득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인규 씨는 사과하고 철회하기는커녕 자신의 삼위일체 관에는 잘못이 없고 오히려 필자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글을 3월 10일에 게재하였다. 계산해 보면 9일 날, 이인규 씨는 박형택 목사가 한 권유를 거절하고 평소의 그답게 그 다음 날인 10일에 즉시 글을 써서 올렸다.

그리고 3일 후인 3월 13일부터 미국에서 <미주 세이연>의 총회가 열렸는데, <미주 세이연>은 회개하고 사과하기는커녕 박형택 목사가 필자에게 한 사과를 엄중히 문책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미주 세이연>은 박형택 목사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인규 씨의 주장을 받아드렸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거기에 참석한 상임위원들은 물론 참석자와 기자들까지 포함하여 어느 한 사람도 바른 삼위일체 관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참여한 모든 목사 내지 이단 연구가는 물론 기자 중에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신학을 전공한 기자라면 그를 포함하여 삼위일체도 모르면서 이단연구 기관인 <미주 세이연>에 발을 딛고 있다는 말이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금번 <미주 세이연>의 모임은 삼위일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집합소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개인 이인규 씨의 글에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 이인규 씨의 반론은 필자에게 하는 반론이었다.

 

 

이인규 씨와 <미주 세이연>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왔다. ‘여호와’의 명칭은 성부 하나님의 명칭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하면 양태론이 된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명칭을 성부 하나님께만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성령도 ‘여호와’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이 앞서의 주장이다. 그 후 무슨 연고인지 성령에 대하여는 변명도 변호도 하지 않고,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라는 말로 변하고 말았다. 독자들은 저들이 성령도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고 한 주장을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칼빈을 비롯한 신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여호와’라는 명칭을 성부 하나님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이단적이라는 것을 반박하자, 결국 <미주 세이연>의 보고서를 작성한 박형택 목사는 합신의 김병훈 교수와 국제신학교의 김재성 교수로부터 조언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또 사과문을 발표하게 된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인규 씨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처음부터 주장해온 것과 같은 이단적 삼위일체 사상을 고집하고, 오히려 이인규 씨는 이번 글에서 기존의 성부유일신 사상에 또 다른 이단적인 사상을 더하는, 진일보한 자리로 나아갔다고 봐야 한다. 하나씩 비판해 보겠다.

 

3) 이인규 씨의 주장은 결코 정통적 삼위일체관이 아니기 때문에 취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규 씨는 아직도 자신의 삼위일체관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제 깨닫는다고 하여도 잘못을 시인도 사과도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인규 씨는 이번 글에서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라는 괴상한 주장을 폈다. 이러한 이인규씨의 주장 역시 어느 신학자도 지지하지 않는 ‘이인규주의’(Inkyuism)가 되고 말았다.

 

 

이 말에 당사자는 펄쩍 뛰겠지만, 이인규 씨가 이렇게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은 신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평신도의 한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고 했던 <기감 이대위>가 이인규 씨에 대하여 ‘신학적 미비자’로 규정한 이유이다. 신학적으로 미비한 이인규 씨가 다른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에 앞장서다 못해 주축이 된다는 점은 한국교회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잘못된 기준으로 어떻게 이단 분별을 하고 이단 규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본 글을 쓰고 있다.

 

본론: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라는 이인규 씨의 삼위일체관은 정통교회에서 찾을 수 없는 이단설이다.

 

1. 이인규 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주장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이인규 씨가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라는 한 주장은 처음에 그가 주장하던 것과 조금 달라졌다. <미주 세이연>의 상임위원인 이인규 씨도 참여하여 회람하고 결정했다는 <미주 세이연> 보고서에 보면, “‘우리는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은 맞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가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은 틀린다.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명칭은 이스라엘과 언약적인 관계에서 나타난 성부하나님의 인격적인 명칭이기 때문이다.”(2018년 10월 1일 <미주세이연> 반박문)라고 하였다. 또 이인규 씨 개인의 글에서도 “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이다’라고 주장하는데,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서 주로 표현되었다고 하여, 여호와가 예수와 동일한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이인규 반박문, 예레미야이단 연구소 2018년 10월 5일)라고 못을 박았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 인격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의 ‘인격적 명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이 바뀌었다. “예수를 여호와라고 말할 수도 있다”(2019년 3월 10일, 이인규,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여호와의 명칭문제)는 것이다. 한걸음 후퇴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고, 자신의 주장에 이단성이 있다는 지적에 내심 두려워서 그것을 피해보려는 꼼수적 논리는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글에서 이인규 씨는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예수가 여호와라는 것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여호와라는 것만 문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이인규 씨는 이번 글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여호와’라는 신격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여호와’라고 하는 직분에 대한 주장이다.”(이인규,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여호와의 명칭문제)라고 하였다. 또 이인규 씨가 처음에는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명칭은 이스라엘과 언약적인 관계에서 나타난 성부하나님의 인격적인 명칭이기 때문이다.”(2018년 10월 1일 <미주 세이연> 반박문)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명칭 문제도 바뀌었다. 이인규 씨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성부하나님만을 칭할 수도 있고, 둘째, 삼위하나님을 칭할 수도 있으며, 셋째는 신적본질을 뜻할 수도 있다.”(2019년 3월 10일, 이인규,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여호와의 명칭문제)라고 하였다. ‘여호와’가 ‘성부하나님의 인격적 명칭’이라고 하였다가 이번에는 ‘삼위 하나님’을 칭하는 명칭, ‘신적본질’을 뜻하는 명칭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의 주장은 예수님을 여호와라고 하면 인격적 구별을 못하는 양태론이라고 하였으면서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아량(?)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면서 스스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여호와’라는 신격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여호와’라고 하는 직분에 대한 주장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를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 문제는 문제이지만, 본인이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말도 이상한 말이다. 그 말은 자신이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란 말처럼 들리는데 기가 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라는 이름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성부하나님만을 칭할 수도 있고, 둘째, 삼위하나님을 칭할 수도 있으며, 셋째는 신적본질을 뜻할 수도 있다.”고 한 점에서도 이제 삼위하나님을 칭할 수도 있다고 하여 성령을 여호와라고 할 수 있다는 문을 여는 듯하다. 논쟁을 하다 보면 그의 진실도 꼼수도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논리를 바꾸어가는 것 자체가 그의 삼위일체관이 아직 정립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요, 그 잣대로 그동안 이단들을 정죄하는 큰 죄를 지었다는 말이 된다.

 

2. 만들고 만들어낸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도 결국 잘못된 삼위일체관이다.

 

 

이인규 씨는 이번 글에서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는 그리스도는 직분의 명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직접 보자. “그리스도는 직분의 명칭이며, 여호와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고 파송하신 메시야인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여호와가 될 수 있는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라고 표시된 명칭이 단 한번이라도 여호와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만약 그렇게 대체시키면. 보낸 자와 보내심을 받은 자가 동일 인격이 되고 만다.”(2019년 3월 10일, 이인규,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여호와의 명칭문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하면 동일 인격이 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그리스도가 여호와이다.’라고 한 것을 가지고 양태론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제 이 주장이 정통신학에서 받을 수 없는 이론으로 밝혀졌을 때는 이인규 씨가 무슨 또 다른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지 두고 보아야 한다. 어떤 정통신학자도 그런 의미에서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하지도 않았을 뿐더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도 여호와라고 주장하였다. 먼저 그 누구보다 칼빈의 주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인규 씨와 <미주 세이연>의 주장이 옳다면 칼빈이 이단이란 말이 된다고 아무리 되풀이 주장을 하여도 “보지 않았다.” “칼빈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답변은 피한다는 점이다. 먼저 칼빈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칼빈,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24)

 

 

“여호와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자존하시는 분이되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칼빈, 기독교강요 상권, p.241)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칼빈,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34)

 

“이 예언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요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칼빈,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17)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칼빈,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19-220)

 

칼빈은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선명하고도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왜 <미주 세이연>과 이인규 씨 눈에는 칼빈이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라고 하고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요”라고 한 말이 보이지 않는가? 눈을 감았는가? 떴는데 보이지 않는가? 아니면 보지 못한 것처럼 위장을 하는가? 그러면서도 왜 이인규 씨는 칼빈을 양태론자로 규정하는 정직함도 용기도 없는가? 필자에게는 그가 속한 감리교의 지적처럼 ‘신학적 미비자’란 말이 옳다는 생각만 날뿐이다.

 

 

그러면 이제 한국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형룡 박사의 주장을 보자. 박형룡 박사도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선명하게 주장하였다. 직접 보자.

 

“구약의 본문들에서 ‘여호와’를 대신하여 사용된 히브리어 ‘아도나이’ 혹은 ‘야웨’를 예수께 적용함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그 본체의 형상(히1:2,3)이라고 말하여 그의 신성을 표현하였다.”(박형룡, 조직신학4권, p42)

 

“그리스도께서 ‘주’라고 호칭된 예가 많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가 되심은 여호와께서 구약의 백성에게 주 되셨음과 똑 같은 의미이다. (예▶눅2:11;6:5, 빌2:11, 고전2:8, 빌4:5, 마15:22, 롬10:9, 행10:36, 계4:8, 11; 19:16)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의 주로 인정되신다.”(박형룡, 조직신학4권, p44)

 

“요한이 받은 계시 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1:8.17;22:13)라고 하셨는데 그 것은 사44:6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박형룡, 조직신학4권, p44)

 

이인규 씨의 주장대로 하면 박형룡 박사도 인격적 구별을 못하는 양태론가 분명하다. 박형룡 박사는 <미주 세이연>과 이인규 씨의 주장과 달리 “요한이 받은 계시 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1:8.17;22:13)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사44:6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라고 하여,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하지 않고 여호와라고 하였다. 차라리 이인규 씨와 <미주 세이연>이 칼빈은 물론 박형룡 박사도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곧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저들에게서 진실도 용기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이인규 씨가 자주 인용하는 개혁 신학자 웨인 그루뎀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도 역시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신약에서 이런 강한 구약의 의미로서 야웨 또는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님’이라고 사용된 예들이 있다.”(웨인 그루뎀, CLC, 성경핵심교리, p.417)

 

“유대인의 아기로 태어난 누군가가 ‘그리스도’(또는 ‘메시아’)라고 듣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구나, 메시아였던 이 아기가 ‘주님-즉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다.”(웨인 그루뎀,CLC, 성경핵심교리, p.418)

 

이인규 씨는 왜 위선을 부리는가? 그가 존경하여 자주 인용하는 그루뎀의 주장에도 귀를 막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한 웨인 그루뎀도 양태론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회개를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답을 기대해 본다.

 

3. 이인규 씨처럼 예수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인규 씨가 “예수는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는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곧 예수와 그리스도를 나눈다는 말이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도 잘못 중에 큰 잘못이다. 어떤 보수 신학자도 ‘예수는 여호와이지만 그리스도는 여호와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단적인 주장은 정통적인 신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이단성이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이단자들이 하는 주장이다. 특히 최근에 한국교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신옥주라는 자가 ‘그리스도는 신성이며 예수는 인성을 말한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보수 신학자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가 예수라고 본다.

 

그러나 이인규 씨는 이와는 또 달리 예수를 여호와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할 때라고 제한한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명칭으로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하나님만을 뜻할 수도 있고,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삼위하나님이 공유하는 신성, 신적본질을 뜻하는 명칭일 수도 있다.”(2019년 3월 10일, 이인규,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여호와의 명칭문제)라고 하였다. 이인규 씨의 주장은 신성을 나타내는 명칭이 ‘여호와’인데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여호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신성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되고 만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인성을 말하는 명칭이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는 신성, 그리스도는 인성이라고 하는 이단 교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과연 이인규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는 직분의 명칭이기 때문에 신성을 나타내는 ‘여호와’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칼빈을 비롯한 모든 신학자들이 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칼빈,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49)라고 하였다. 박형룡 박사도 “구약의 본문들에서 ‘여호와’를 대신하여 사용된 히브리어 ‘아도나이’ 혹은 ‘야웨’를 예수께 적용함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그 본체의 형상(히1:2,3)이라고 말하여 그의 신성을 표현하였다.(박형룡, 조직신학4권, p.42)라고 하였다. 이인규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이단성은 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인규 씨와 <미주 세이연>에 있다.

 

4.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하면 성부, 성자의 동일 인격이 되는가?

 

 

이인규 씨는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하면 동일 인격이 되어 인격적 구별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여호와라고 할 때도 인격적 구별을 하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규 씨는 “예수 = 여호와라는 인격적 등식으로 표현하면 양태론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삼위일체의 교과서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은 인격과 본질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2019년 3월 10일, 이인규,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여호와의 명칭문제)라고 힘 주어 주장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예수에게나 그리스도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동일인격’ 또는 ‘인격적 구별’이 안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인규 씨는 왜 이렇게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여호와’를 성부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 명칭이다. ‘엘로힘’이 삼위 하나님의 공동 명칭이듯이 ‘여호와’는 삼위 하나님께 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할 뿐 아니라 성령도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이야 말로 참되신 여호와라고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28)라고 이인규 씨나 <미주 세이연>과 달리 선명하게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 부자가 목사인 경우 아들에게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동일 인격을 말하는 것이며 인격적인 구분이 안되는가? 물론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성부와 성자를 함께 언급 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로 구분한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 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34)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나 예수님을 특별한 설명 없이 ‘여호와’라고 하여도 인격적 구별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밝히 나타나고 있다”(생명의 말씀사, 기독교강요 상권 p.234)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했다고 하여 인격적 구별이 안 되고 동일 인격을 말했다고 하는 이인규 씨와 <미주 세이연>의 주장은 비성경적, 비정통적 엉터리 주장이다.

 

결론 : 이인규 씨는 자신의 신학적 미비성을 솔직히 시인하고 필자에게 사과하고 한국교회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 그가 살 길이다.

 

 

이인규 씨의 특징은 절대로(?)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과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 씨는 알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은 쉽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고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사과요 회개다.

 

 

그동안 필자가 경험한 이인규 씨는 한국교회가 아무리 그의 주장이 이단적 주장이라고 규정하여도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지금까지 걸어온 이인규 씨의 이인규 씨다운 모습일 줄로 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겸허히 회개하는 자라는 것임을 알고, 빨리 필자를 이단으로 규정한 잘못도, 몰랐던 삼위일체관도 회개할 때 그나마 한국교회는 평신도 이단연구가인 그에게 일말의 고마움을 가질 수 있을 것임을 충고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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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식 목사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