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060)] 지루한 이야기

[책을 읽읍시다 (1060)] 지루한 이야기

안똔 체호프 저 | 석영중 역 | 창비 | 256쪽 | 11,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단편소설의 제왕 체호프의 대표 중단편선『지루한 이야기』. 이 선집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중편 「지루한 이야기」(1889)와 함께, 기괴함과 사실주의가 결합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작 「검은 옷의 수도사」(1894), 그리고 가장 완성도 높은 대표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 3편의 작품이 묶여 있다.

 

중편 「지루한 이야기」는 체호프가 생활비를 벌 목적으로 1880년부터 시작한 10년간의 저술 활동을 뒤로하고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들며 발표한 첫 작품이다. 농노의 손자이자 도산한 잡화상의 아들로서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던 체호프는 의과대학 재학 시절부터 졸업 후 의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잡지에 필명으로 짤막한 이야기들을 기고한 고료로 생계를 꾸려갔다. 러시아 문단의 원로 그리고로비치와 제정러시아의 인기 일간지 편집장 알렉세이 쑤보린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1886년 이후에야 체호프는 더 적은 수의, 더 뛰어난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9년작 「지루한 이야기」를 기점으로 체호프는 작가적 입지를 더욱 굳혀갔다.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은 「지루한 이야기」는 한 명망 높은 병리학자의 말년을 통해 평생의 신념과 통합적 감수성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그동안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체호프의 중단편 중 단연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체호프가 처음으로 폐결핵 징후를 보인 해에, 형 니꼴라이의 사망 직후 쓰인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 병증을 자각하는 노교수의 시각으로 죽음이란, 또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노교수는 “재능 있는 손끝에서 창조된 아름다운 예술품”과 같았던 지난 삶과 어울리는 ‘인간다운 죽음’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만일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닥쳐온 위험이라면 나는 그것을 교사이자 학자이자 그리스도교 국가의 시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맞이해야 하겠지. 즉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지금 피날레를 망치고 있어.”(63면) 삶의 끝자락에 선 노인은 온몸으로 허무감을 느끼지만, 실패였다고 규정하기에 그의 삶 곳곳에 밴 행복의 단서들은 너무나 아름답다.

 

똘스또이의 평가처럼 체호프의 단편소설이 새로운 종류의 글쓰기로서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데에는 그의 의사로서의 경력이 크게 작용했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후에도 체호프는 공공의료 사업에 헌신하는 ‘젬스뜨보(Земство) 의사’로서 직업적 소명을 다했다. 「지루한 이야기」에서 체호프는 형이상학적 관념 대신 고통에 관한 물리적인 개념과 어휘로 나이듦을 성찰하고 생의 굴곡을 응시한다. 이 소설이 노화의 증상들을 관찰하고 거기서부터 실존적 사색을 이끌어낸 것은 체호프가 가진 의사의 눈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사로서의 체호프는 그의 문학에 객관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작품에 박애주의의 자리를 마련했고, 현실로 구체화되지 않는 사상은 무의미함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신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관한 작가적 성찰을 이끌어냈다. 체호프가 다른 선배 대문호들과 달리, ‘도덕’이나 ‘구원’ 같은 특정 주제나 사상을 자신의 문학의 핵심으로 내세우지 않은 이유는 책상물림 대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사실주의와 신비주의가 기이하게 결합해 있어 체호프의 단편소설 중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1890년 악명 높은 유배지 싸할린 섬을 탐사한 이후 체호프가 인간에 대한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쓴 작품 중 하나로, 작가 자신은 이를 과대망상을 주제로 한 의학소설이라 명명했다. 한 촉망받는 젊은 인문학자가 환각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를 만나며 정신적, 신체적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다. 발표 당시부터 ‘검은 옷의 수도사는 영감을 주는 정령인가, 파멸시키는 악마인가’ ‘청년은 비극적 천재인가, 추악한 이기주의자인가’ 등 저자의 의도와 내용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체호프에게 현상 자체는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체호프 특유의 모호함과 기괴함을 통해 소설은 환대가 일순간 뒤틀린 열정이 되고, 사랑이 어느 틈에 몰이해가 되고, 자유로운 정신 활동이 어느새 병증이 되는 인간의 조건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체호프가 건강 악화로 요양차 이주한 얄따에서 현지를 배경으로 집필한 작품으로 체호프 단편소설 중 손꼽히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기적인 중년 남성과 특별한 매력 없는 젊은 여성 간의 불륜은 체호프의 손에서 사랑의 질료인 시간과 연민에 대한 성찰로 변화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남녀의 불륜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도덕주의를 따르지 않는 이 소설은 이전의 체호프 소설에는 낯설었던 ‘사랑’이라는 주제를 문학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소개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안톤 체호프는 『갈매기』나 『벚꽃 동산』등의 작품을 쓴 극작가로 유명하지만 소설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살펴 본다면 현대 단편 소설의 형식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속의 면면들을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표현으로 묘사하는 능력과 날카롭고 엄정하게 인간을 그리면서도 그 내면에는 인간에대한 연민의 감정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1860년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농노 출신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 파산하면서 가족들 모두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였고, 이후 그는 홀로 타간로크에 남아 고학하며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뒤 의사가 되기까지 생계를 위해 필명으로 유머 단편들을 썼으며, 1886년에 처음으로 「추도회」라는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하였다. 2년 뒤 단편집 『황혼』이 푸쉬킨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는 「귀여운 여인」으로 톨스토이의 절찬을 받았고, 차이코프스키, 고르키 등과 교유하며 러시아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초기의 해학적인 작품세계에서 후기 현실비판적 작품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속물성과 허위를 배격하고 진실한 인간성을 반추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문학적 특징은 인물의 성격과 심리의 정밀한 묘사, 감각적 문체에 있으며, 때로 핵심을 우회하는 표현들은 현재까지도 비평가들에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단편 「대초원」,「나비」,「이웃사람들」,「익명의 소설」,「흑의의 수도승」,「살인자」,「아리아드네」,「농부들」등이 있으며, 희곡 『이바노프』, 『바냐 아저씨』, 『곰』, 『청혼』, 『결혼』, 『기념일』, 『갈매기』,『세 자매』,『벚꽃 동산』등이 있다.

 

후기 체호프의 관심은 단편소설보다는 희곡으로 기울어 「갈매기」,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과 같은 세계 희곡사의 걸작들을 써냈다. 체호프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러시아 장편소설의 황금시대’의 사실주의적 문학 전통을 계승하여 단편소설의 새 시대를 열었고,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1904년, 병세가 악화되어 아내와 함께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요양을 떠났으나 7월 2일 호텔에서 장결핵으로 생을 마쳤다. 유해는 모스크바의 노보제비치 수도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