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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135)] 작은 우주들

[책을 읽읍시다 (1135)] 작은 우주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저 | 김운찬 역 | 문학동네 | 352쪽 | 18,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걸작 『다뉴브』에 이은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선집’ 두번째 작품. 『다뉴브』에서 광대한 다뉴브 강 유역의 지리와 문화, 역사를 탐사했던 마그리스가 『작은 우주들』에서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트리에스테 만과 토리노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만나는 그 주변 국경지들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국가와 민족과 경계를 넘어 카페, 공원, 숲, 호수, 바람, 섬, 계곡, 마을과 사람, 풀과 꽃과 나무, 새와 곰과 물고기가 이 세계를 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이 책은 작지만 경이롭고 풍부한 세계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각각의 인생에서 비범하고 의미심장한 존재의 빛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마그리스는 고향 트리에스테를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빌려 “간을 갉아먹는 도시”라고 했고, “반짝이는 행복을 약속했다가 곧바로 저버리는 도시, 견딜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오이디푸스의 복부 같은 도시, 아드리아 해의 막다른 곳인 이곳에서 역사는 모든 실이 뒤얽히는 실타래다”라고도 노래했다. 또한 “나는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크로아티아인, 오스트리아인, 아르마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을 아우르는 경계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났기에, 경계의 작가가 되었다”라고 자기 정체성을 표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또다른 도시는 토리노다. 트리에스테가 작가를 낳았다면 토리노는 작가를 키운 도시다. 토리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에서 나온 긴장으로부터 이탈리아의 근대성을 창출한 중심도시이자 마그리스가 청장년기를 보내며 정신적 자양분을 얻은 도시다.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에게 토리노는 “현재와 설계의 장소”인 반면, 트리에스테는 “꿈과 향수의 장소”다.


이 책 『작은 우주들』에서 작가의 몸과 정신을 단련시킨 이 두 도시 이외에는 계곡들, 마을들, 석호들이 주인공들이며 더 있다면 바다에 밀려온 해변의 잔해들, 역사의 주변부에서 밀려나 엑스트라처럼 고아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여행자가 가닿는 발길과 눈길로 여러 장소와 사람과 시절이 모자이크처럼 다채롭게 드러난다. 서녘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동녘의 현실이 되기도 하고, 어제는 역사의 고문관이던 사람이 오늘 휴양객으로 가게 계산대 앞으로 와 잔돈을 내줘야 하기도 하며, 숲에서 모두가 다 봤다는 곰을 몇 해를 추적해도 결국 못 보고 고작 그 똥만 보기도 한다.


이 피카레스크 소설 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며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장소들이거나, 사람 수에 비해 너무 적은 이름들이 불리는 마을이거나, 사람이 아닌 거룻배나 한줄기 바람이나 노루 한 마리 등으로서, 보잘것없는 찰나적 복수 주체들이다. 그래서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하나의 픽션으로 읽히기도 한다. 마치 공원 벤치에 앉아 잠깐 든 낮잠 속에서 이 지구별에 사는 동안 마주한 온갖 것들로 빛나는 밤하늘을 본 것처럼.


마그리스는 지리를 따라가며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의 사적 삶과 이탈리아인-슬라브족-게르만족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경계지역들의 공적 정체성을 가로지르면서, 거대 역사에서 망각되거나 누락된 채 처연하고도 모순적이면서 매혹적인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시대의 증인들, 역사 무대의 단역배우들, 이 작지만 단순하지 않은 작은 우주들을 대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들로서 하나하나 되살려내고 있다. 국가와 민족과 경계를 넘어 카페, 공원, 숲, 호수, 바람, 섬, 계곡, 마을과 사람, 풀과 꽃과 나무, 새와 곰과 물고기가 이 세계를 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나’라는 주어 없이 여러 사람과 사물과 공간의 이야기를 뒤섞어 풀어낸,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하나의 픽션이자, 작가가 마주한 삶의 장소와 인물들이 담긴 빛나는 자서전적 여행 산문이다.


책의 차례는 이 책 속에 나오는 이름도 성별도 없는 하나의 원소 같은 이 여행자가 들른 주요 장소 아홉 곳이다. 이 여정은 작가가 수십 년간 들락날락한 글쓰기 장소인 트리에스테 산마르코 카페에서 시작해 그곳 만 일대의 석호들, 발첼리나 계곡(포르데노네 산간), 스네주니크 산(슬로베니아), 콜리나 언덕(토리노 언덕의 동쪽), 압시르티데스 군도(현 크로아티아 치레스 섬), 안테르셀바(오스트리아와 인접한 티롤 국경지대로 볼차노 북동쪽 산등성이 마을들)를 거쳐, 다시 트리에스테 산마르코 카페 인근 공원과 예수성심교회로 돌아오며 끝난다.


이 여정은 최소 원소로의 존재론적 귀환을 사유하게 한다. 작가가 몸을 내준 주어 없는 이 (괄호 쳐진) 여행자는 세상이 처음 생겨난 때의 풍경을 답사하며 그려나가는 겹겹의 눈을 지닌 풍경화가 같다. 그러나 그 장소에 깃든 역사, 문화, 사람, 신화, 전설 등을 끌어내는 마그리스의 뛰어난 이야기 솜씨는 영락없이 근원에 대한 영원한 향수와 죽음을 노정한 유한한 생명의 멜랑콜리에 젖은 인문주의자의 붓질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문화사가로서의 박학다식한 면모와 애수 어린 현자의 아포리즘과 작가 특유의 시적 문장들이 인상파 화첩을 넘겨보듯 광대하고 풍성하게 펼쳐진다. ‘미크로코스모스’는 대개 대우주로서의 자연과 대응하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뜻한다. 그러나 작가는 제목을 복수형으로 씀으로써 단일 세계와 프랙털적인 사유로부터 벗어나, 남루하나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각자들이 뿜어내는 다채롭고 경이로운 존재의 빛들로 가득한 은하계를 『작은 우주들』에서 수놓았다.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소개


1939년 4월 10일 트리에스테 출생. 2000년대부터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된 이탈리아 현대 작가이자 명망 있는 중부유럽 연구가. 토리노 대학을 졸업하며 펴낸 『현대 오스트리아 문학에서의 합스부르크제국과 신화』로 독문학 연구가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뗐고, 『그곳에서 멀리. 요제프 로트와 히브리-동양 전통』으로 중부유럽 문학에서 히브리 문학의 맥락을 재평가한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1970년에서 1978년까지 토리노 대학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었고, 이후 트리에스테 대학에서 현대 독일문학을 강의하며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94년에서 1996년까지 상원의원을 역임했고, 2001년에서 2002년까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연했다. 세계 여러 대학에서 중부유럽의 문화와 문학에 대한 초빙 강연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스트라스부르, 코펜하겐, 클라겐푸르트, 세게드 등의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산문과 허구를 넘나드는 마그리스의 작품은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깊은 인류애를 담고 있으며,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 입센, 클라이스트, 슈니츨러, 뷔히너, 그릴파르처 등의 작품을 번역해 이탈리아에 소개했고, 보르헤스, 호프만, 입센, 카프카, 무질, 릴케, 요제프 로트 등에 관한 뛰어난 비평을 써서 문학연구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중부유럽 문화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연구와 탁월한 안목으로 ‘경계의 정체성’을 탐구한 작가, ‘미스터 미텔오이로파’로 불리며 유럽 지성계를 떠받치고 있는 인물이다.


1986년 ‘걸작’으로 칭송되는 『다뉴브』로 1987년 바구타 상과 1990년 프랑스 최고외국도서상(에세이 부분)을, 1997년 『작은 우주들』로 스트레가 상을 수상했다. 두 에세이로 전 세계 비평계와 독자로부터 찬사를 끌어내며 백과사전적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을 갖춘 현대의 명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이외에 『사브르 검에 대한 추론』『슈타델만』 『또다른 바다』 『목소리』 『전람회』 『맹인에게』 『고소 취하』 등의 작품이 있다.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1992년 훔볼트 재단연구상, 2001년 에라스뮈스 상, 2003년 스페인미술협회 황금메달상, 200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상, 2009년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샤를 베용 유럽에세이상, 장 모네 유럽문학상, 2014년 FIL로맨스어문학상, 2015년 에두아르 글리상 상, 2016년 프란츠 카프카 상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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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