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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그간 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의 태생적 뿌리를 암시해왔다. 로맹 가리의 첫 수상(비평가상)작 『유럽의 교육』은 나치에 저항하는 폴란드의 레지스탕스를 그린 작품이었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쓴 『자기 앞의 생』과 『솔로몬 왕의 고뇌』에 등장하는 로자 부인, 솔로몬 루빈스타인은 모두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었다. 마음산책이 국내에 소개하는 로맹 가리의 열두 번째 책 『징기스 콘의 춤』의 주인공(징기스 콘)도 역시 유대인이다. 다만 그는 사람이 아닌 ‘유대인 유령’이다.
『징기스 콘의 춤』은 콘이 자신의 기이한 존재 방식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던 전직 유대인 희극배우 콘은 SS대원 샤츠에게 총살당한 후 악령이 된다. 이후 22년째 샤츠 주변을 맴돈다. 소설이 출간된 1967년은 ‘나치 독일’로의 회귀가 막 이뤄지려던 시기였다. 작품을 통해 로맹 가리는 과거를 망각한 듯 부활의 기지개를 켜는 독일에 반기를 든다.
전후 리히트의 일급 경찰서장이 된 샤츠는 관할 구역 가이스트 숲에서 발생한 희귀한 연쇄살인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리히트 마을 전체를 미궁에 빠뜨린 사건은 특이할 만한 단서도 없고 살해 동기조차 명확치 않다. 다만 마흔두 구의 희생자들은 모두 남자. 이들은 바지를 벗은 채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콘은 그 와중에도 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샤츠를 약 올리며 그에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은 제2부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인다. 콘과 샤츠의 목소리가 자꾸만 뒤섞이고 소설의 끄트머리에 가서는 화자인 ‘나’가 콘에서 작가 자신(로맹 가리)으로 바뀌기도 한다.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플로리앙/릴리 커플은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죽음과 미의 알레고리적 존재들”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처럼 하나같이 “안정되고 일관된 정체성을 갖지 않은, 파열하고 분화하는 존재들”이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가이스트 숲은 그야말로 로맹 가리의 잠재의식과 같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이 두서없이 뒤엉키며 나열되기도 한다. 실제로 가이스트(Geist)는 독일어로 ‘정신’을 의미한다. 소설은 ‘정신의 숲’을 배경으로 “실세계의 논리성과 인과성에서 벗어나 환상적 양상”을 보인다.
유머는 때로 무력한 존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다. 그래서일까, 콘은 익살을 떨고 난 뒤 후렴구처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되풀이한다. ‘웃음은 인간의 속성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양이었던 콘의 웃음은 “이를 악문 웃음”이었다. 콘이 추는 춤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로맹 가리는 『밤은 고요하리라』에서 설명한다. “그 춤, 그 대중적인 지그 춤은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고 가벼움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세상을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가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건 그가 춤꾼이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어딘가에 썼지. 라블레가 ‘웃음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고통에 대해 말한 거네.” 잔인한 인류와 한통속이 되길 끝끝내 거부하는 콘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저항한다. 이는 곧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에 깃든 죄책감을 일깨우는 발길질”이다.
『징기스 콘의 춤』은 가히 ‘로맹 가리표 블랙 유머의 정수’라 할 만하다. 로맹 가리는 유대인 학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전직 유대인 희극배우였던 유령 ‘콘’을 화자로 앞세웠다. 이 같은 희극적 장치는 역설적이게도 암담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게 한다. 로맹 가리는 콘의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통해 인류의 범죄를 비웃고, 역사적 비극을 미화하는 모든 예술 작품을 경계한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종종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다. 작품에서 콘이 경고하고 있듯 인류의 덧없는 욕망은 계속해서 무수한 희생자를 양산하고 있다. 더욱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이름 뒤로 행해지는 추악한 범죄는 오늘의 한국 사회 현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작가 로맹 가리 소개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대전 참전 영웅으로, 외교관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알리다 권총 자살로 극적인 삶을 마감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1914년 러시아에서 유태계로 태어나, 14살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해 니스에 정착한 후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군인, 외교관, 대변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는데,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장교양성과정을 마친 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유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종전 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참전 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1945년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이등 대사 서기관으로 프랑스 외무부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프랑스 외교관으로 불가리아, 페루, 미국 등지에 체류하였다. 1956년에는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러나 공쿠르 상 수상에 대해 프랑스 문단과 정계는 그를 혹독하게 평가했다. 이후로도 로맹 가리에 대한 평단의 평가가 박해지자,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대 아첨꾼』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당시 프랑스 문단은 이 새로운 작가에 열광했다.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여 한 사람이 한번만 수상할 있다는 공쿠르상을 다시 한 번 수상하였다. 원래 공쿠르 상은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 것을 규정으로 하고 있는데, 그가 생을 마감한 후에야 그가 남긴 유서에 의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물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평단에 일대 파문을 일기도 했다.
당시 로맹 가리는 재능이 넘치는 신예 작가 에밀 아자르를 질투하는 한 물 간 작가로 폄하되었으며, 두 사람에 대한 평단의 평은 극과 극을 달렸다. 또한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 외에도 '포스코 시니발디'라는 필명으로도 소설 한 편을 발표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 강한 윤리 의식, 풍자 정신으로 채색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새벽의 약속』, 『하얀 개』, 『연』, 『레이디 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등이 있다. 그가 자신이 각색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와 직접 쓴 시나리오 「킬Kill」을 연출, 영화로 만들기도 하였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페루의 리마에서 북쪽으로 10Km쯤 떨어진 해안에 널부러져 퍼덕이다가 죽어가는 새들과 자살을 시도하는 한 여자, 그리고 그녀를 구해준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는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인 아내 진 세버그가 자살한 지 1년 후인 1980년 12월 2일, '결전의 날'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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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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