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239)] 바벨-17
새뮤얼 딜레이니 저 | 김상훈 역 | 폴라북스 | 348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폴라북스의 SF 총서 ‘미래의 문학’ 시리즈 세 번째 책. 새뮤얼 딜레이니의 네뷸러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바벨-17』. 『바벨-17』(1966)은 매 작품마다 문학적, 철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천재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의 네뷸러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언어학과 기호학의 사피어-워프 가설을 기존 스페이스오페라의 패러다임에 융합시킨 역사적인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외계에서 온 ‘침략자’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미래. 동맹군의 군사적 요지가 알 수 없는 공작원에 의해 거듭 파괴된다. 그 가운데 그러한 파괴공작이 있을 때마다 정체불명의 암호 ‘바벨-17’이 수신된다. 동맹군은 천재 시인이자 뛰어난 암호 해독가인 리드라 웡에게 바벨 -17의 해독을 의뢰한다. 리드라 웡은 이에 바벨-17 분석에 착수하고, 이것이 암호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바벨-17과 파괴공작 사이의 관계는 알 수가 없다. 리드라 웡은 바벨-17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선원을 모아 초광속 우주선 랭보호를 몰고 다음 공격 목표인 동맹군의 병기창으로 향한다.
전체 줄거리는 우주선 간의 전투나 암살 등 스페이스오페라와 활극의 모양새를 띠고 있으나 저변에 깔린 언어학적·철학적인 통찰력과 문학성, 먼 미래의 인간사회와 인간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창조해낸 상상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감탄을 자아낸다.
외계의 적들이 보내는 암호인 줄 알았던 ‘바벨-17’이 사실은 언어였다는 것을 밝히면서 시작되는 『바벨-17』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가설에 뿌리를 두고 진행된다. 예를 들어 ‘따뜻하다’라는 단어가 없는 프랑스어만 배우고 산 사람은 뜨겁다와 시원하다는 알지 몰라도, 따뜻하다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바벨-17』은 언어와 문화와 개념 사이에 뗄 수 없는 관계를 전제하고, 그것을 지구만이 아닌 우주의 다른 종족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인류처럼 탄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 물질적인 육체를 가지지 않은 다른 우주와 외계의 인간이라면, 사용하는 언어가 지칭하는 범위, 그 언어가 표현해주어야만 하는 개념의 체계마저도 인류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다르기 때문에 외계의 언어로 우리가 익히 아는 무언가를 다시 정의한다면, 우리로서는 알아낼 수 없었던 다른 면모를 그것에서 발견하게 되거나, 우리가 여러 단어와 어휘를 동원해서야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던 어떤 것을 단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단어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그 언어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벨-17’이라는 침략자의 언어를 공부하면서 주인공 리드라 웡은 이러한 경험을 한다. 리드라 웡에게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는 독자 또한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나와 너, 이 세상과 다른 세상, 우주에 대해 의식을 확장시켜주는 경이감이 SF의 본령이자 고유의 쾌감이라면, 『바벨-17』은 이 경이감의 최고점에 있는 작품이다.
작가 새뮤얼 딜레이니 소개
새뮤얼 딜레이니는 1942년 4월 1일에 뉴욕 시 할렘의 부유한 흑인 지식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딜레이니는 네 살 때부터 뉴욕 주의 여러 유명 사립학교에서 영재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음악과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신동으로 지목받았다. 12세 때는 커뮤니티 센터의 안무 감독을 맡았고, 14세에 이미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학, 예술과 과학과 SF를 망라한 넓은 분야의 책들을 탐독하며 폭넓은 교양을 쌓았다. 중등 교육을 마친 뒤에는 미국 유수의 영재 학교로 유명한 브롱스 과학고등학교에 진학, 물리학과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학창 시절 여러 편의 습작 소설과 에세이 등을 써서 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을 여러 개 받았다. 브롱스 과학고를 졸업한 뒤에는 뉴욕 시립대에 진학했지만 난독증이 도진 탓에 1학기 만에 중퇴했다. 작가가 될지 음악가가 될지 망설이다가,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던 아내의 격려와 내조에 힘입어 판타지인 『앱터의 보석』(1962)을 출간, 19세의 나이에 프로 작가로 데뷔한다.
딜레이니는 향후 10년 동안 다채로운 은유와 동시대적 슬랭을 종횡무진 구사한 다중적이고도 지적인 환상소설과 SF를 잇달아 발표, 뉴웨이브 운동의 와중에 있던 미국 SF계에서 로저 젤라즈니와 함께 최고의 신인으로 부상했다. 60년대 중반부터 SF 창작에 주력, 언어학 SF인 『바벨-17』(1966)과 신화 SF 『아인슈타인 교점』(1967)로 잇달아 네뷸러 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금자탑으로 회자되는 메타 스페이스오페라 『노바』(1968)를 출간한다. 중단편 부문에서는 데뷔 단편인「그래, 그리고 고모라」(1967)로 네뷸러 상을, 피카레스크 소설「시간은 준보석의 나선처럼」(1968)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며 SF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1975년에 발표한 포스트모던 SF 『달그렌』은 기억을 잃고 고립된 도시를 방랑하는 주인공의 경험을 특유의 풍성한 신화적 은유와 비ꠚ`선형적 서술 구조를 통해 묘사한 메타 SF이며, 엄청난 길이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도시문학의 적자라는 주류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10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딜레이니의 시대를 훌쩍 앞서간 문학적 스타일과 지적이면서도 다면적인 접근법은 후배 SF 작가들의 귀감이 될 하나의 지표를 제공했으며, 특히 윌리엄 깁슨과 브루스 스털링을 위시한 후배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딜레이니는 1970년대부터 여러 대학의 연구원과 교수로 초빙되어 SF 평론과 기호학 연구에 몰입했고, 명저 『보석 경첩이 달린 턱』(1977)과 『우현의 와인』(1984)을 위시한 일련의 문예 비평서를 출간함으로써 비평가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다. 현재 그는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교수를 거쳐 템플 대학의 영미문학 및 창작 강좌의 전임교수로 교편을 잡으며 창작 활동과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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