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385)]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
아사다 지로 저 | 홍은주 역 | 문학동네 | 256쪽 | 11,5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철도원』 『산다화』 『사고루 기담』 등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주옥같은 단편집과 『칼에 지다』 『창궁의 묘성』 등의 대작 시대소설로 국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아사다 지로의 새로운 번역작.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는 단편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특유의 유머와 감성뿐 아니라 시대소설의 중후함도 함께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집이다. 메이지 시대 초기, 사회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무사들의 모습을 그린 여섯 편의 단편에서 시공을 뛰어넘은 감동과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때는 1800년대 후반, 메이지 유신의 파도가 지나간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급속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수도 에도가 도쿄로 이름이 바뀌고 막부 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그간 일본 사회를 지탱해온 수많은 무사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다. 어떤 이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꾼이 됐으며, 어떤 이들은 발 빠르게 장사수단을 찾아 돈을 벌어들이거나 신정부에 자리를 얻어 관료가 됐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명을 위해 은둔한다. 낡은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버리고 하릴없이 새 삶을 찾아 고군분투해야 했던 사람들의 각종 일화가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서글프고 비장하게 그려진다.
표제작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는 원래 무가 중심이었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무사들의 ‘뒷마무리’, 즉 현대로 따지자면 정리해고 업무를 맡게 된 이와이 고로지라는 남자의 여생을 그의 손자가 훗날 노인이 되어 자신의 손자에게 들려주는 내용이다. 옛 동료들의 원망과 비난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고로지는 이윽고 한때 무가의 일원이었던 이와이 가문도 정리하러 나선다. 마지막 핏줄인 어린 손자를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에게 데려다주고 자신의 죽을 곳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그에게 생각지 못한 옛 인연이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순수하고도 어른스러운 소년의 눈길과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담담한 말투를 통해 변해가는 시대를 향한 서글픔이 그려진다.
그 외의 단편에서도 지금껏 살아온 모습과 사회적 위치, 나이와 성격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에서 소외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사내들이 등장한다. 무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상점 심부름꾼으로 키워지는 소년(「동백사로 가는 길」), 기억도 희미한 옛 전투에서 적병에게 써주었던 목숨값 증서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말단 관리(「하코다테 증서」), 호위 무사였던 자신의 눈앞에서 참변을 당한 옛 주인의 복수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내(「석류고갯길의 복수」), 신정부에서 느닷없이 서양력을 채택하는 바람에 낙향할 신세에 처한 옛 천문방 과학자(「서쪽을 보는 무사」), 1초 단위로 쉴새없이 움직이는 서양 시간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지각과 실수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육군 장교(「먼 포성」) 등. 의식주뿐 아니라 시간의 단위와 날짜 세기까지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너무나도 빠르고 다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해나가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의 영광과 긍지를 가슴 한편에 남겨두고서.
국내 독자에게는 다소 생소할 시대배경이지만, 희대의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처럼 어떤 주제로든 보편적이고 가슴 찡한 감동을 자아내는 아사다 지로의 저력은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역사책이나 사료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그 시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이 책만의 매력이다. 시대와 공간은 동떨어져 있지만 하루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세상을 아슬아슬하게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현대인이 항시 느끼고 있는 위기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작가의 말처럼 ‘그다지 멀지는 않은 시대’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작가 아사다 지로 소개
그윽한 감동의 소설 『철도원』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소설가 아사다 지로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철도원을 통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사다 지로 소설의 특징은 아주 재미있다는 것인데, 이는 소설이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원형적인 측면에서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생각할 때 특별할 것이 없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재미있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한번 손에 잡고 되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는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1960년대 프랑스의 누보 로망 이후 소설가들이 자신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거리의 이야기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거부해 왔다. 오히려 소설가들은 '글쓰기가 무엇인가', '소설의 운명은 무엇인가' 와 같은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많은 형식적 실험들이 이루어졌고 기존의 서사 구조를 파괴하는 기술 양식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서구의 근대라는 특수한 시대와 가지는 관련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성해졌다. 이러한 흐름을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이후 많은 소설가들이 소설의 본질을 묻는 질문을 가지고 소설을 써오고 있다. 그것은 자기 의식에 대한 비서사적 묘사 등의 형태이거나 사소설 또는 다른 장르와의 결합 등의 형식적 실험의 모습을 가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설은 더이상 서사 문학이기를 멈추었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대 이후 일본 소설의 주된 경향이 사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사다 지로의 소설들은 사소설적 양식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손자에게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소설을 쓴다. 첫 소설이 자신의 야쿠자 시절 경험을 담은 소설이었던 것처럼 아사다 지로는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밑천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젊은 시절의 야쿠자 경험은 그의 소설 주위를 언제나 맴돌고 있다.
그는 도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9살에 가정이 몰락 한 후 야쿠자 생활을 하였다. 이후 자위대 입대, 패션 부티끄 운영, 다단계 판매 등 다채로운 직업에 종사하였다.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글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1991년 36세의 늦은 나이에 야쿠자 시절의 체험을 그린 『빼앗기고 참는가』로 데뷔하고, 1995년 『지하철』로 요시가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 1997년 『철도원』으로 나오키 상, 2000년 『칼에 지다』로 시바타 렌자부로 상, 2007년 『오하라메시마세』로 시바 료타로 상, 2008년 『중원의 무지개』로 요시가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철도원』 『천국까지 100마일』 『창궁의 묘성』『프리즌 호텔』 『지하철』 『낯선 아내에게』 『활동사진의 여자』 『장미 도둑』 『파리로 가다』 『칼에 지다』 『오 마이 갓』 『월하의 연인』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슈샨 보이』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중원의 무지개』 『가스미초 이야기』 『온기, 마음이 머무는』등 다수가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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