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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420)] 돈 카를로스

[책을 읽읍시다 (420)] 돈 카를로스

프리드리히 실러 저 | 안인희 역 | 문학동네 | 452쪽 | 14,5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돈 카를로스』는 독일의 대문호 프리드리히 실러의 대표 희곡이다. 시, 역사, 미학, 문학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실러지만 그를 대표할 수 있는 장르는 역시 희곡이다. 실러가 전속작가로 활동했던 만하임 국립극장에서는 1979년부터 지금까지 ‘국제 실러 페스티벌’을 열어 그의 희곡을 기리고 있다. 2008년 유럽의 문화전문채널 아르떼 TV가 전문가와 시청자의 투표를 통해 선정한 ‘유럽의 위대한 극작가’에서 2위는 실러였다.

 

스페인의 왕세자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 펠리페 2세에게 약혼녀를 빼앗긴 비운의 인물로,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죽는다. ‘스페인의 왕세자’라는 부제를 단 이 희곡은 실러의 단일 작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주제나 소재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이념대립 같은 선 굵은 갈등 상황이 드러나고, 극적으로 표현하기 몹시 까다로운 미묘하게 흔들리는 우정도 묘사된다. 게다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벌어지던 시대의 스페인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펠리페 2세와 알바 공작 등 당대 유럽 역사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특히 우리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왕세자를 처형하는 부왕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실러의 희곡은 『빌헬름 텔』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극인데 실러는 비극의 목적을 ‘숭고’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비극이란 ‘슬픈 결말을 가진 극’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존귀한 사람의 몰락을 그린 극’이라는 뜻이다. 『돈 카를로스』에서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왕세자, 왕비, 포사 모두 사상의 자유와 시민의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고 몰락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까지 그 이념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한다. 실러는 이렇게 올바른 이념을 위해 순결하게 죽은 영혼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실러는 일종의 ‘가족 초상화’ 이미지를 품고 돈 카를로스 일화에 접근했다. 아들의 약혼녀와 결혼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 젊은 남녀의 사랑, 그리고 실러가 쾨르너와 교유하면서 체험한 우정의 모습 등을 구상했다. 사회적으로 매우 부정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카를로스와 엘리자베스의 불행한 사랑을 중심으로 한 극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플랑드르의 자유운동을 대변하는 포사 후작의 역할이 차츰 더 중요해졌다. 희곡이 창작 도중에 처음의 구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과 주제를 얻게 된 것이다. 작품의 이런 발생 과정에서 생긴 몇 가지 오해로 인해 거듭 비판과 지적을 당한 실러는 작품을 책으로 출판한 이듬해인 1788년, 자신이 동인으로 있던 『도이치 메르쿠어』지에 작품에 대한 해설이자 창작노트인 ‘『돈 카를로스』에 부치는 편지’를 발표했다.

 

마흔여섯이라는 짧은 일생 동안 실러는 아홉 편의 희곡을 완성했다. 작가가 스물여덟 살에 발표한 『돈 카를로스』는 그의 네번째 작품이다. 실러의 희곡을 청년기와 장년기 작품으로 나누었을 때 청년기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실러는 이 작품을 도이치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운문 형식인 얌부스 율격(약강격)을 이용해서 썼으며 이후로 나온 그의 모든 희곡은 운문 형식을 취한다. 이는 실러가 젊은 나이에 이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작가 프리드리히 폰 실러 소개

 

1759년 독일 마르바흐에서 태어났다. 라틴어 학교에 다니면서 희곡을 쓰기 시작했으며, 1773년 사관학교에 입학해 법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재학 시절부터 집필한 『도적 떼』를 1780년에 완성하여 만하임 국립 극장에서 초연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허가받지 않고 「도적 떼」 관람차 만하임으로 여행했다는 이유로 금고형과 저술 금지령을 선고받았다. 실러는 만하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오게르스하임 등지로 도피했다가 1783년 만하임으로 돌아가 「간계와 사랑」을 탈고했다. 그때부터 1785년까지 만하임 극장의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1788년에 예나 대학 역사학과의 무급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1805년 결핵에 의한 급설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풍자시 「크세니엔」등과 「빌헬름 텔」등의 작품을 남겼다.

 

「도적 떼」는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으로, 정치적 억압과 폭정에 대항하여 반란의 깃발을 높이 들면서 〈자유〉의 이념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선포하였다. 18세기 후반 독일 문학은 시민의 성숙한 자의식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크게 부각되던 상황이어서 「도적 떼」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도적 떼」는 초연 이후 독일 각지에서 무대에 올랐으며, 1792년에는 파리에서 상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이 성공에 힘입어, 실러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 의해 프랑스 명예시민으로 추대된다.

 

대표 작품으로는 희곡「도적 떼」 「피에스코의 모반」 「간계와 사랑」 「돈 카를로스」 「발렌슈타인」 「마리아 슈투아르트」 「오를레앙의 처녀」 「메시나의 신부」 「빌헬름 텔」 외에도 「잠수부」 「장갑」 「이비쿠스의 두루미」등 주옥같은 담시와 시, 송가를 남겼다. 실러는 시인, 극작가, 철학자, 역사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괴테와 더불어 독일 언어 예술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지는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현재까지도 독일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 평가받으며 그의 희곡들은 독일 극장의 기본 레퍼토리를 이룬다. 또한 시인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중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이 <교향곡 9번(합창)>에 이 시를 가사로 붙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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