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486)] 키스와 바나나
하성란,강영숙,박정애,조두진,강병융,윤고은,조영아,안보윤,서진,이영훈,손보미,주원규,황현진 공저 | 한겨레출판 | 408쪽 | 13,5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라는 소재로 한겨레출판 문학웹진 〈한판〉에 1년여 동안 연재됐던 13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역사 테마 소설집 『키스와 바나나』가 출간됐다.
표제작 〈키스와 바나나〉를 쓴 황현진을 비롯해 하성란, 강영숙, 박정애, 조두진, 강병융, 윤고은, 조영아, 안보윤, 서진, 이영훈, 손보미, 주원규는 15년이란 등단 연차와 기성과 신인이란 이름을 넘어 한 명의 소설가로서 역사라는 풍경 안으로 진지한 문학적 탐사를 떠난다. 역사 안에서 이들이 찾아낸 것은 잃었거나, 잊혔거나, 사라졌거나, 스러져간 사람과 사건 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성란의 〈젤다와 나〉에는 두 명의 화자인 나와 젤다 세이어가 등장한다. 젤다와 피츠제럴드, 소설가 부부인 나와 김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이고, 진짜 이야기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서진의 〈진짜 거짓말〉에는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는 나의 이야기와 직장을 그만두고 장편소설을 쓰는 남편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며 ‘작가가 된다는 것과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이영훈의 〈상자〉는 조선 세조 때의 소경 점복가 홍계관의 일화를 통해 “작가의 정체성과 윤리적 책임에 대해 말하며, 말을 지어내는 소설가들은 어쩌면 모두 소경 점복가일지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조영아의 〈만년필〉은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에서 여고생을 죽이고 혼자 살아남은 소설가 윤기가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소설에 대한 실존적 진실에 대해’ 묻는다. 이처럼 하성란, 서진, 이영훈, 조영아는 소설가로서 소설에 대한 고백을 이야기로써 완성한다.
강영숙의 〈폴록〉은 과거 환경운동을 했던 K 이사를 취재하는 환경단체 인턴인 나를 통해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사회변혁의 열정이 끓어올랐던 1980년대를 지금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고바야시 마사루의 단편소설 〈일본인 중학교〉를 다시 쓴 조두진의 〈첫사랑〉은 식민자 2세인 ‘재조(在朝) 일본인의 죄의식과 모순적 감정에 주목’한다. 황현진의 〈키스와 바나나〉는 전쟁고아이자 베트남전에 참전한 키스라는 군인를 통해 ‘베트남전의 외상적 상처’를 바라보는 것에 집중한다. 이처럼 강영숙, 조두진, 황현진은 더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진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를 꺼내어놓는다.
박정애의 〈미인〉은 ‘정쟁에 희생된 비운의 주인공 허견’이 아닌 『숙종실록』에 짧은 기록이 남아 있던 그의 처 홍예형을 등장시켜 신분 차별에 대한 ‘남성 중심의 정치 권력’의 모순을 이야기 한다. 손보미의 〈고귀한 혈통〉은 이사도라 덩컨이 아닌 패리스 싱어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고귀한 혈통이라는 해묵은 이야기의 집요함과 기만성’을 드러낸다. 윤고은의 〈다옥정 7번지〉는 과거의 박태원을 지금 여기로 불러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실제 작가가 허상’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박정애, 손보미, 윤고은은 실제 있었던 역사를 다루는 데에 있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실제 역사에 덧붙여진 허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많이 상상하는 쪽을 택한다.
강병융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쥐’로 그리는 우화적 이야기를 통해 MB 정권 시절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드러낸다. 주원규의 〈연애의 실질〉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직도 멈추지 않는’ 거짓말에 맞서 거짓 일화를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한다. 안보윤의 〈소년 7의 고백〉은 수원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공권력의 폭력성’을 포착해낸다. 이처럼 강병융, 주원규, 안보윤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진실이 아니라 또 다른 진실을 말하려 애쓰며, 만들어진 진실 앞에서 결코 굴복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박진은 해설에서 “이들이 역사적 사실의 권위에 짓눌리는 대신에 상상력의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사실의 역사가 아닌 가능성의 역사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13편의 소설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우화적이고 풍자적인 수법과 각기 다른 상상력으로 그림으로써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킨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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