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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602)] 정복자들

[책을 읽읍시다 (602)] 정복자들

앙드레 말로 저 | 최윤주 역 | 민음사 | 320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앙드레 말로 장편소설 『정복자들』. 1928년 발표된 장편 소설역『정복자들』은 발표되자마자 약관의 말로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유의미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말로 자신이 청년 시절 경험한 식민 체제, 격동기 중국의 국민당 활동 등 날것의 경험을 자본 삼아 인간의 존재 방식과 존엄성의 보존이라는 무겁고 철학적인 문제를 손에 잡힐 듯 현실적으로 전달한다.


광둥 총파업이라는 1925년 중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약 두 달간의 시간을 다루는 이 소설은 익명의 프랑스인 서술자가 광저우에 도착해 옛 친구이자 국민당 선전부의 사령관인 가린과 조우하는 여정을 기본 플롯으로 삼고 있다. 서술자가 혁명의 격전지에서 당내 혁명가와 비밀경찰 들을 차례로 만나 가며 혁명의 진행 과정을 목격해 가는 『정복자들』은 가린이란 한 인물에게 점차 접근하여 그의 사고방식과 세계관 변화의 추이를 따라가는 일종의 탐정 소설이기도 하다.


『정복자들』은 쑨원의 국민당이 베이징 군벌 정권과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할 목적으로 1923년 수립한 3차 광둥 정부를 주요 무대로 삼는다. 작가는 1925년 3월12일 쑨원의 사망 탓에 생긴 지도력 공백과 국민당 내부적 권력 다툼 문제를 다루면서 혁명의 대의에 투신했으나 이념과 목적이 서로 달라 갈등하는 여러 ‘정복자들’ 군상을 선보인다.


테러리스트 우두머리이자 급진 좌파인 중국 청년 홍, 소비에트와의 긴밀한 협력 아래 활동하는 관료적 공산주의자 보로딘, 민족주의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중국의 간디 쩡다이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이자 야심만만한 개인주의 전략가 가린 등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작품은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의 긴장감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또한 말로는 보로딘이나 랴오중카이 같은 실존 인물을 주변인물들로 배치함으로써 작품의 실제감을 한결 높인다.


이 작은 공간에 400~500명이 있다. 책상 옆에는 머리카락이 짧은 여학생 몇몇이 있고 천장에 매달린 대형 선풍기들은 무거운 공기를 힘겹게 휘젓는다. 서로서로 다닥다닥 붙어 앉거나 사이사이 빈자리를 두고 앉은 청중들은 주로 군인, 학생, 소상인, 하역 인부 들로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마치 짖어 대는 개들처럼 목을 앞으로 쭉 내밀고서 목소리로 지지를 표한다. 팔짱을 끼거나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있거나 손으로 턱을 괸 사람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죽은 듯이 빳빳하게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상기된 얼굴에 턱은 앞으로 내민 채로 함성과 괴성을 계속해서 불규칙적으로 내지르고 있다.


중국 혁명에 대한 말로의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노동조합의 강당에서 열린 ‘라 정크 회합’은 공산당을 포함한 국민당 내부 좌파의 갈등과 분열을 보여 주면서도 혁명을 향한 중국인들의 거칠지만 순수하고 강렬한 열망을 독자에게 각인해 준다. 이 회담에는 직업 혁명가 보로딘은 물론 혁명 사령관인 가린도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중국 혁명에 대한 말로의 전망을 짐작할 수 있다. ‘정복자들’의 시대는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며, 늙고 병든 서양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상을 구축하겠다는 중국의 결코 녹록지 않은 투쟁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정복자들』의 서술자가 제공하는 정보량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에 등장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독자에게 알려 주는 독서의 안내자가 되어 주지 못한다. 게다가 실제 사건을 다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역사 소설로 보는 것이 무리일 정도로 사건의 개괄적인 정보조차 소설 속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사건의 부분적 정보, 등장인물의 단편적인 의견 등이 짧은 보고나 무선 전보 등의 형태로 파편화되어 제공된다. 이 불친절한 내러티브에서 느끼는 독자의 불안감은 소설 속 현장의 긴장감과 절묘하게 궤를 같이한다.


부조리라는 자명한 현실은 『정복자들』을 혁명으로 이끌어 낸 근원이며, 말로 예술 전반의 동력이기도 하다. 시련과 시험의 연속인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을 근본적인 물음(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이 소설은 예술가의 엄정한 세계관이 오롯이 드러난, 시대의 살아 있는 보고서인 동시에 개인과 사회의 갈등, 인간 본연의 본성 규명과 같은 우리 모두가 풀어야만 하는 현재적 물음이자 그에 대한 대답이다.



작가 앙드레 말로 소개


1901년 파리에서 태어난 말로는 부모의 이혼으로 식료품 가게를 하던 외가로 이사하여 어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주말이나 방학은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됭케르크에서 부유한 선주 집안이었으나 가계가 기운 친가에서 보냈다. 1918년 학업을 포기한 뒤 독학으로 문학, 예술, 동양 문화 등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다. 세련된 멋쟁이이자 권위를 부정하던 반항가 말로는 1923년 주식 투자 실패로 파산하고 나서 아내 클라라, 죽마고우 루이 슈바송과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로 떠났다가 도굴 혐의로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아내의 구명 운동으로 석방된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경험한 식민 체제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자 다시 인도차이나로 떠났고, 1925년 쑨원 사망 이후 중국 혁명의 혼란기에 국민당 소속 위원으로 활동하며 격동기의 중국을 경험했다. 1928년 발표되자마자 약관의 말로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정복자들』은 바로 이 시기의 경험을 배경으로 하며 탐험가, 예술가, 소설가, 독재에 맞서 싸운 투쟁가, 제도권 내 정치인으로서 훗날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게 될 사상의 원형을 엿보게 한다.


격동의 20세기를 마 치 소설 속 인물과도 같이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그는 1976년 폐울혈로 사망했다. 1996년 11월23일 서거 20주년을 기념해 유해가 파리 팡테옹으로 이장됨으로써 그는 프랑스 공화국을 빛낸 위대한 영웅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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