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저 | 창비 | 283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유쾌하면서도 탄탄한 서사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온 저자는 이번 소설집에서 '사람'이라는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가는 아홉 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날로 가팔라지고 있는 세계의 경사진 현실을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며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서설과 소설을 둘러싼 현실에 따듯한 온기를 돌게 한다.
『그 남자의 가출』에 수록된 작품들은 주로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숨어 있는 비일상적인 것들이 한순간 드러나면서 생기는 생경함과 비의를 통해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일별하자면 ‘파킨슨 병’이나 ‘가출’, ‘가족의 죽음’처럼 현실적 삶에 기반한 사건, 혹은 ‘웜홀’이나 ‘혼인 신고서를 작성한 여자들에게만 발생하는 질병’, ‘도시의 기억상실증’ 같은 소설적 상상 등이 그것이다.
「정읍에서 울다」와 「그 남자의 가출기」는 노년에 접어든 평범한 사내와 아내의 이야기다. 사내들은 젊은 날의 꿈과 사뭇 비장하게 헤어졌음에도 결국 남루하게 늙은 보통의 가장이다. 또한 그 남루를 아내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는 보통의 남편이기도 하다. 남편들은 미운 아내들 때문에 각각 ‘정읍댁 찾기’에 나서거나 ‘가출’을 감행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력을 되감아 과거의 사람들과 해후하고 지난날을 조감하며 제 삶의 본질과 의미를 찾아보려고도 한다. 하지만 거꾸로 넘겨본 삶의 페이지에는 성공보다 실패의 흔적이 많고 놓쳐버린 것의 목록이 손에 넣은 것의 목록을 훨씬 웃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주인공들을 앙상하게 하고 비루하게 만들며 인간관계를 지치게 한 시스템의 음험함과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발라드’ 연작(「아내의 발라드」 「아내를 위한 발라드」 「발라드의 기원」)은 평범한 일상에 급작스레 닥친 질병에 관한 이야기다. 혼인신고를 한 아내만 감염시켜 비(非)인간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연작이 참담하게 다가오는 것은 낯선 질병에 걸린 여인이 신음하며 괴물같이 변하는 과정이 섬뜩하다거나 병의 알레고리가 아내, 남편, 혼인이라는 이름의 배후에 놓인 불행들을 상기시켜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형언 불가능한 이 현상을 ‘언젠가 도래했을 미래’라 명명하는 남편들의 태도다.
어느 순간 한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을 잃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작품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에서도 이와 닮은 문법이 발견된다. 자신의 존재를 담보해주는 기억을 잃고서도 가족일 수 있는 사내와 여자와 딸의 대화가 부조리극 대사처럼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이들은 곧잘 가족을 연기한다. 이 또한 ‘도래할 수 있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이러니야말로 진실을 털끝하나 다치지 않게 담아내는 방식이라는 듯, 자주 이것을 소설에 끌어들인다.
「배우가 된 노인」에서는 자신의 청춘을 상기시키는 딸과 사위에게 남루한 노 신사가 포르노 배우를 자처해 결혼 비용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자신의 황혼을 예견한 한 허름한 청년이 그 노 신사를 자꾸 좇는다. 청년은 노 신사가 늘 앉아 있던 벤치에 낡은 양복을 입고 꼭 앉아 있다가 어떤 종류의 웜홀을 경험한다. 남루함과 허름함으로 서로를 하나의 시공에 초대한 순간이다.
각각의 소설을 연결하는 희미한 고리를 발견하는 것도 소설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를테면 「정읍에서 울다」와 「그 남자의 가출기」의 사내는 모두 폐렴으로 큰딸을 잃었고「배우가 된 노인」과「배회」에는 윤희라는 여자친구가 등장한다. ‘발라드’ 소설이야 자명한 연작이고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라는 이름의 소설은「타오르는 도서관」에도 등장한다.
결국 소설 속의 인물들은 서로의 과거나 미래일 수 있고 타인 같지만 가족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각자의 것이자 그들 모두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이 공명의 풍경은 소설 안에서 소설 사이를 거쳐 소설 바깥으로 확장된다. 소설이 손을 내밀어 우리마저 저 처연하고 따뜻한 풍경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작가 손홍규 소개
손홍규는 특유의 상상력 속에 독특한 유머와 능수능란한 아이러니를 구사하면서 인간사의 진리와 인간다움의 진리를 부단히 탐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굳건한 의지를 보인다. 차세대 입담꾼으로 꼽히며 읽는 재미마저 톡톡한 그의 소설이 마냥 재밌고 유쾌하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 담긴 주제의식의 무거움이 녹록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197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 도시화된 폭력적 환경속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체적인 삶과 인간성 소멸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소설을 발표해왔다.
그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다. 안정된 문장에 탄탄한 구조, 그에 더해 해박한 고유어 지식과 완벽한 전라도 사투리 구사. 그만의 언어제련 솜씨로 아주 진지하게 희망과 변혁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문단에서 손홍규를 주목하는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2004년 대산창작기금을, 2005년에는 문예진흥기금을 받았고, 2008년 제5회 제비꽃 서민소설상을 수상했다. 2008년 11월부터 경향신문에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와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이슬람 정육점』,『서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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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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