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저 | 문예중앙 | 284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겨울눈처럼 운명적이고, 봄눈처럼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순원 장편소설『삿포로의 여인』. 2015년 봄부터 1년간 계간 ‘문예중앙’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삿포로에서 태어나 대관령에 와서 살았던 한 여자와 대관령에서 태어나 삿포로로 결국 떠나가버린 여자의 딸, 그리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순수한 문체로 빚어내는 이순원 작가 특유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대관령과 삿포로에 흩날리는 새하얀 눈발에 실어, 봄눈 같은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이 소설은 신문기자 박주호가 중학교 시절 처음 시라키 레이와 연희를 만났던 날의 기억으로 시작된다. 횡계 버스정류소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유강표와 이국적인 얼굴의 일본여자 시라키 레이와 손목에 풍선 하나를 매달고 “아빠…” 하고 유강표를 부르던 연희를 보았던 날이다.
박주호에게 21년 전 대관령 시절을 떠오르게 한 것은 연희의 오빠 유명한의 갑작스런 연락 때문이었다. 그는 유명한을 만나 유강표와 시라키 레이의 연애, 비운의 국가대표 스키선수 유강표 그리고 오수도리 산장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유강표는 1971년 삿포로 프레 동계올림픽에 스키 국가대표로 참가했던 화려한 시절이 있었지만 고태복, 어재식이란 동료 선수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선수 생명을 마감한다. 그 후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술에 절어 살던 유강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시라키 레이는 딸 연희를 할머니의 손에 맡기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박주호의 대관령 시절 기억의 중심에는 연희가 있다. 이모부가 운영하는 구판장 옆 ‘미라노패션’이란 옷가게에서 일하던 연희를 만난 것은 군대를 막 제대한 후였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관령에 머물렀던 2년간의 시간. 그동안 박주호는 길 아저씨, 제일의원 최 간호사, 미옥이, 용래… 그리고 연희와 함께 대관령에 내리는 눈처럼 하나둘 추억을 쌓아간다. 그 시간의 끝자락 연희와 헤어지던 날, 연희와 나눴던 마지막의 포옹의 순간을 떠올리며 박주호는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삿포로에서 날아온 연희의 편지는, 대관령과 삿포로에 외롭게 흩날리는 첫눈 같은 고백처럼 더 깊은 여운과 감동을 전한다. “이 나무가 새하얀 꽃을 피울 때쯤 당신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을까요?”
황정은 작가는 이 소설의 추천사에서 “고백한 적은 없지만, 선생을 이룬 것 중에 내가 은밀하게 샘내는 것이 있다. 선생은 대관령이다”고 밝혔다. 이순원 작가, 그만큼 대관령에 대한 애정을, 대관령의 자연을 닮은 문체를 가진 작가가 또 있을까. 그의 대표작 「은비령」(현대문학상), 「그대 정동진에 가면」(한무숙문학상),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등의 작품은 그 무대가 바로 강원도이고,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쓴 『19세』에서도 대관령을 무대로 하여 빼어난 문학적 성취를 거둔 바 있다. 그리고 6년 만에 발표한 소설의 무대 역시 대관령이다. 이제 이순원의 대관령은 그의 문학적 토대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가 새로이 창조해놓은, 그 누구도 쉽게 다다를 수 없는, 하늘 아래 없는 그만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 이순원은 이 작품을 통해 ‘운명적’이면서도 ‘순간에 사라져버려 안타까운’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 눈의 고장 대관령과 삿포로에 내리는, 겨울눈처럼 운명적이고 봄눈처럼 미처 눈을 돌릴 사이 없이 녹아버려 안타까운 그들의 사랑은 은근하고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작가 이순원 소개
상고를 1,2등으로 졸업하면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72년에 강릉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왼손잡이라 다른 아이들만큼 능숙하게 주판을 놓을 수가 없어서 이순원은 은행원이 되는 대신 고랭지 농사를 지어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으로 올라가 농군이 되지만 고된 농사일을 체력이 감당하지 못해 2년 뒤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시절로 남아 있다. 앞으로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한다.
1978년에 나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소설에는 소설적인 문장이 따로 있는 줄로만 생각했던 그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간명하고 정확한 단문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설 문장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순원은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을 발표하며 데뷔 이후 왕성한 필력으로 문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순원 문학은 작가가 비관주의자임을 명료하게 드러내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실현하는 것에 대한 비관이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부정적인 대상물을 찾아 극단적으로 부정적 요소를 과장하고 도드라지게 형상화하거나 역으로 작고 연약하고 위태로운 가치나 존재들에 대한 관심으로 형상화된다. 이순원의 작품세계는 「수색」연작들을 전후로 하여 성격을 달리하는데, 「압구정동」시리즈를 비롯한 「수색」연작 전의 작품들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수위가 높은 작품이고, 연작 이후의 작품들에선 구체적 삶의 체험과 내면세계가 밀도 높게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순원의 후기 작품들이 작가의 사적 체험을 소재로 하면서도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 가치의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그 10년 후 속편 격인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통해서 일관되게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1편에서 자본주의의 타락한 욕망을 테러로 응징했던 저자는 속편을 낸 후 인터뷰에서 “나는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이 땅 천민자본 상류층의 끝간 데 모를 욕망과 타락을 연쇄살인의 형식을 통해 비판·경고했다.그러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런 면에서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나는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테러를 꿈꾼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대 정동진에 가면」 등의 작품에서도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강하게 흐르며, 「순수」에서는 이같은 연민이 구체적인 사회적 발언을 입어 힘을 얻는다. 「순수」에서 40년전 잔칫날 동네 사내들이 혼사 주인공을 화제로 함부로 내뱉는 음담은 우리의 연약한 ‘누이들’에게 가해지는 아픔이 사회적 폭력의식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음란상에 우리 사회를 빗대는 발언에서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같은 맹렬한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그리고 가두어도 가두어도 비집고 나오고 또 갖고자 하면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우리 내면의 욕망을 다룬 「수색」연작 이후로는, 우리 내면의 무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구체적 삶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작이며, 작가가 6년만에 내놓은 창작집 『첫눈』 역시, 말의 아름다움이 흩뿌리는 잔잔한 서정 안에서 현실의 아픔과 사회적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내며 깊은 내면세계와 조응한다. 개인의 상처와 사회의 굴곡을 구체적 삶의 형상화를 통해 상기시키고, 따스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인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의 눈길을 건네고 있다.
창작집으로 『첫눈』,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순수』, 『첫사랑』, 『19세』, 『나무』, 『워낭』『벌레들』(공저)『어머니의 이슬털이』등 여러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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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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