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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926)] 안녕 주정뱅이

[책을 읽읍시다 (926)]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저 | 창비 | 276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권여선의 소설집『안녕 주정뱅이』.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바지런히 발표한 일곱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이번 소설집은 이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을 잡아채는 선명하고도 서늘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그려낸다. 인생이 던지는 지독한 농담이 인간을 벼랑 끝까지 밀어뜨릴 때,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 비극을 견뎌내는 자들의 숭고함을 가슴 먹먹하게 그려냈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봄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스무살에 쇳일을 시작해 서른셋에 일으킨 사업으로 제법 돈을 벌지만 곧 부도를 맞아 아내에게 버림받고 서른아홉에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 수환,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


더한 불행이 있을까 싶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병까지 찾아오고, 오로지 서로에게 서로만 남은 상태로 그들은 죽음 앞에 예정된 이별과 가차없는 삶을 사랑의 형식으로 견뎌낸다.


인생에 결코 지지 않은 인물은 「이모」에도 등장한다.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모’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없다. 착취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가족 곁을 완전히 떠나기 전 5년간 악착같이 모은 1억5천만원에서 1억은 아파트 보증금으로, 남은 5천만원으로는 그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겠다 결심한 ‘이모’가 췌장암으로 죽기 전까지 살아간 2년의 삶은 이런 것이다.


‘이모’가 처음부터 이렇듯 고독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이모’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눈앞에 드리워진 장막을 슬쩍 들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단편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찰나의 진실을 예민한 관찰자의 언어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관찰자적 면모는 세사람의 짧은 여행을 다룬 「삼인행」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와 ‘주란’ 부부의 하룻밤 이별여행에 친구 ‘훈’이 가세하며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에피소드와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세사람의 언쟁을 고스란히 중계한다. 맛있는 밥을 먹는 것만이 지상목표라는 듯 먼 길을 돌고 돌며 끝을 유예하는 듯한 그들 여행을 초점화자 ‘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진실의 얼굴을 슬쩍 맞닥뜨릴 수 있다.


권여선은 또한 신경증자를 그려내는 데도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역광」에는 식사 후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알코올중독자로서 불안장애를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예소설가 ‘그녀’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끌고 오던 인물과 사건이 모두 애초 없었던 일이라는 듯 소설은 끝을 맺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의 이름(‘위현僞現’)처럼 ‘모든 것이 거짓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듯 이 소설의 결말은 ‘그녀’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습관적으로 혹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신다. 아이를 빼앗기고 술을 마시다 알코올중독이 되어버린 「봄밤」의 영경이 술에 취한 채 김수영의 시를 큰 소리로 외는 장면은 그중 단연 압권이다. 바닥을 맞닥뜨린 자의 절망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며 취기 어린 인물의 행동을 복기해내는 권여선의 언어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주정뱅이’의 아슬아슬한 내면을 서늘하게 포착한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에 대비할 수 없다. 인생에는 누구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수조차 없는 비극이 산재한다. 그래서 어떤 비극은 마치 인생이 던지는 악의적인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 권여선 소개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이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있는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와 소설집 『처녀치마』가 있다. 2007년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도 제3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을 두 겹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 묘사하여 호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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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