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읍시다 (959)]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저 | 한겨레출판 | 176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한창훈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이 책은 수십 년이 걸려서야 완성된 단단하고 커다란 의미가 있는 책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작가는 20대 후반이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신문 칼럼을 읽게 된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단 하나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라는 글이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던지 작가는 그 종잇조각을 가위로 오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고 또 읽는다. ‘어느 누구도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는 남대서양 화산섬인 트리스탄 다 쿠냐 섬의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40대 중반이 된 작가는 어느 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시민사회 구성원의 덕목에 대한 우화풍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처음엔 거절하나 문득 저 가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섬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종철 선생의 칼럼은 그렇게 연작소설의 첫 편인 ‘그 나라로 간 사람들’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네 편의 소설이 5년 사이에 차례로 발표된다. 소중한 씨앗 하나가 연작소설을 낳게 만든 것이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한 섬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섬의 법은 단 한 줄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 빈부귀천이 없어서 그곳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조차 모른다. 순리대로 아무 걱정 없이 산다.
화산 폭발 때문에 섬을 떠나 본토인 육지로 이주하게 된 섬 주민들에게 어느 날 기자 한 명이 찾아온다. 휴일에는 쇼핑도 하고 놀러 다니면서 즐기라는 기자의 말에 섬 주민 중 한 명은 지금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죠. 그래서 이렇게 쉬고 있습니다. 물고기나 새도 활동을 하고 나면 쉬죠. 이보다 어떻게 더 잘 쉴 수가 있지요?”
기자에 이어 이번에는 법학자가 찾아온다. 본토에서는 도둑질을 하면 열 배를 배상하거나 감옥살이를 하는데 섬에서는 어떻게 하냐는 법학자의 질문에 주민들은 합창하듯 말한다.
“누가 배가 고파 찾아오면 나누어 먹죠.”
개가 정원을 망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를 야단친 다음 쓰다듬어줍니다.”
하지만 땅 소유에 대한 다툼은 어떻게 해결하겠냐고 묻자 이번에는 모두들 침묵한다. 자기 땅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법학자는 결국 설마 다툼마저 없진 않겠죠? 하고 묻는다. 측량사가 대답한다.
“흥분은 결국 가라앉기 마련이죠. 거센 풍랑도 언젠가는 가라앉듯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섬이 ‘이상 사회’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이상한 사회’라서 그런 건 아닐까.
작가는 다섯 편의 연작소설을 통해 ‘물질과 소유 중심주의’, ‘소통과 공감의 부재’, ‘성공 지상주의’,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주의’, ‘독재의 폐해에 시달리는 사회’를 풍자한다.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와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짚고, 「그 아이」를 통해 성공과 일등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그곳으로를 통해 지도자의 독선적인 판단이 모두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하는지도 보여준다. 그리고, “준비를 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 우리에게 “진짜 사랑하는 게 뭔지, 진짜 행복한 게 뭔지”를 묻는다.
“바다의 특징은 잔잔하거나 파도가 치거나 똑같이 한다는 것이에요. 그제는 한 팔 정도의 파도가 쳤는데 모두 그 높이였어요. 어제는 가문비나무 높이만큼 치솟았는데 모든 파도가 그랬어요. 오늘은 보시다시피 똑같이 잔잔해요.”
“과연 그렇군.”
모여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도처럼 하면 되겠군.”
“파도처럼 하면 되겠다”는 이 한마디에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의 모든 철학이 담겨 있다. 이건 거문도의 바다가 작가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얼마 전 작가의 고향인 거문도에 가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섬에서 나고 자라고, 바다에서 살아왔으니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겠다고. 여수에서 두어 시간을 배를 타고 거문항에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줄곧 함께했던 파도, 책 속의 핵심 화두는 이 파도에서 태어났다.
거문도의 세 섬 가운데 서도(西島), 망망한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작가의 단층집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쪽 벽면 맨 위에 걸려 있던 딸의 ‘시 액자’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동시로, 딸은 아빠의 작업실을 찾을 때마다 먹던 홍시가 참 맛있었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의 그림 작업은 작가의 딸이 맡았다. 동시를 짓던 그 어린 딸이 자라서 이제는 아빠와 함께 책을 만들었다. 딸과의 작업이 작가는 행복했을까. 작가는 행복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답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파도가 그렇듯이. 서로의 어깨에 손을 대며 인사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작가 한창훈 소개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세상에 나왔다.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것과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에 낚시를 시작했고 아홉 살 때는 해녀였던 외할머니에게서 잠수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사십 전에는 기구할 거라는 사주팔자가 대략 들어맞는 삶을 살았다. 음악실 디제이, 트럭운전사, 커피숍 주방장, 이런저런 배의 선원, 건설현장 막노동꾼, 포장마차 사장 따위의 이력을 얻은 다음에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한국작가회의 관련 일을 하고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시로 거문도를 드나들었다.
현대상선 컨테이너선을 타고 두바이와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갔으며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에 승선해 베링해와 북극해를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그 항해를 떠올리며 먼 곳으로 눈길을 주곤 한다. 십 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원고 쓰고, 이웃과 뒤섞이고,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동안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소설로 써왔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청춘가를 불러요』 『나는 여기가 좋다』『그 남자의 연애사』, 장편소설 『홍합』 『열여섯의 섬』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꽃의 나라』, 산문집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등을 냈으며 어린이 책으로는 『검은 섬의 전설』 『제주선비 구사일생 표류기』가 있다. 한겨레문학상,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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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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