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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965)] 너무 시끄러운 고독

[책을 읽읍시다 (965)]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저 | 이창실 역 | 문학동네 | 144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보후밀 흐라발 장편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흐라발 본인이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선언할 만큼 그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필생의 역작이라 불릴 만한 강렬한 소설로 많은 독자와 평단의 사랑과 주목을 받았다. 소설의 화자인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인물이다. 한탸라는 한 늙은 남자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인간, 그리고 노동자를 대신하는 기계의 등장 이후 인간 삶의 방식의 변화, 인간성과 실존에 대한 고뇌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소설의 화자인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인물이다. 그는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맨손으로 압축기를 다루며 끊임없이 쏟아져들어오는 폐지를 압축한다. 천장에는 뚜껑 문이 있고 그곳에서는 매일 인류가 쌓은 지식과 교양이 가득 담긴 책들이 쏟아져 내린다. 니체와 괴테, 실러와 횔덜린 등의 빛나는 문학작품들은 물론, 미로슬라프 루테나 카렐 엥겔뮐러가 쓴 극평들이 들어 있는 잡지들까지.

 

한탸의 임무는 그것들을 신속히 파쇄해서 압축하는 일이지만 그는 파괴될 운명인 폐지 더미의 매력에 이끌린다. 그는 쏟아지는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다. 한탸는 마치 알코올처럼 폐지 속에 담긴 지식들을 빨아들인다. 바퀴벌레와 쥐가 들끓는 더러운 환경에서 지내며, 소장에게는 끊임없이 독촉과 욕설을 듣지만 쏟아지는 책들을 생각하면 반복되는 노동도 견딜 만하다. 귀한 책들은 따로 모으다보니 그의 아파트는 수톤의 책으로 가득차 있다. 여차하면 무너질 듯이 아슬아슬하게 쌓인 책들은 그의 고독한 삶에서 나름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이제는 노인이 된 그에게도 한때 함께했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와 오래도록 함께할 뻔했던 어린 시절의 연인 만차,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그와 함께 지내게 된 집시 여자. 그는 그런 추억들을 회상하며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끊임없이 노동을 지속해나간다. 그 일을 견디려면 매일 수리터의 맥주를 마셔야 할 정도로 고되지만, 그는 삼십오 년간 그 일을 해왔으며, 퇴직하게 된다 해도 압축기를 구입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일을 하기를 꿈꾼다.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로 서술되는 그의 불꽃같은 독백은 읽는 이를 빠져들게 한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행된다. 주된 이야기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파쇄 작업을 통한 한탸의 사색이지만 중간중간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도 끼어든다. 두 진영으로 나뉜 쥐떼들의 끝없는 전투, 죽음을 향해 끊임없이 뛰어드는 바퀴벌레에 대해 그가 느끼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연민, 그에게 귀한 책을 얻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한 위트 있는 묘사 등 흥미진진한 요소들도 풍부하다. 그리고 과거 그와 마음을 나눈 여인 만차와의 에피소드는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 정도로 유머러스하다. 또한 그와 잠시 동안 같은 공간에 살았던 집시 여자와의 에피소드는 건조한 듯하면서도 정서적 울림을 주고, 끝내는 감동을 선사한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겨우 130여 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보후밀 흐라발은 한탸라는 한 늙은 남자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인간, 그리고 노동자를 대신하는 기계의 등장 이후 인간 삶의 방식의 변화, 인간성과 실존에 대한 고뇌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철학적 담론으로서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시대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서 소설 한 편에 담아내고 있다.

 

또한 시시포스의 신화를 모티프로 사용하고 있는 이 소설은 영원한 노동과 인간 지성의 진정한 해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탸는 끝내 자신의 압축기 안으로 걸어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세계에 종말을 고한다. 이것은 단순히 근대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도 하지만, 방향 없이 진행되어가는 광기 어린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다. 무분별한 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퇴보하는, 노예화되고 우둔해진 사회에 대한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우화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한 세계의 종말을 목격하는 늙은 몽상가의 긴 명상에 가깝다. 흐라발은 책이 그저 종이쪼가리로 취급받게 된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섬세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사고는 때로 취기와 환각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종일관 명징함을 잃지 않아서, 우리로 하여금 무리가 아닌 개인에 대해 생각하고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희망적인 부분은 한탸가 끝내 사랑과 연민을 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설 내에서 코러스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구인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라는 구절은 종래에 다음과 같이 변주된다. 이것은 그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역설적인 따스함과 평화의 숨결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이유다.

 

 

작가 보후밀 흐라발 소개

 

1914년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 시를 쓰기도 했으나 독일군에 의해 대학이 폐쇄되자 학교를 떠나 철도원, 보험사 직원, 제철소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한 경험은 훗날 매우 사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뒤늦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첫 소설집 『바닥의 작은 진주』(1963)를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 이듬해 발표한 첫 장편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1964)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까지 정부의 검열과 감시로 자신의 많은 작품이 이십여 년간 출판 금지되었음에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해외 언론과 작가들로부터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리는 한편, 지하출판을 통한 작품 활동으로 사회 낙오자, 주정뱅이, 가난한 예술가 등 주변부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체코의 국민작가로 각광받았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현대작가’로 평가받는 흐라발의 작품들은 체코에서 무려 삼백만 부나 팔렸고 전 세계 27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또 여덟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는데 그중 이르지 멘델이 감독한 두 편의 영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와 「영국 왕을 모셨지」는 각각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 부문(1967)과 체코영화제 사자상(2006), 베를린영화제 국제평론가상(2007)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체코를 방문한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작가가 자주 찾던 선술집을 찾을 정도로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은 흐라발은, 1997년 자신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프라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1976) 『시간이 멈춘 작은 마을』(197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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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