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읍시다 (974)]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루이스 세풀베다 저 | 시모나 물라차니 그림 | 엄지영 역자 | 열린책들 | 104쪽 | 10,8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등 소설과 동화를 발표하며 큰 명성을 다져온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는 철학 동화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자칫 한없이 무겁고 장황해질 수 있는 주제들을 쉽게 읽히는 경쾌한 플롯 속에 효과적으로 녹여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저자가 느리지만 끈질기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꿋꿋한 달팽이의 여정을 통해, 느림의 가치와 굳건한 신념, 환경 보전 문제에 대한 성찰을 전하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달팽이의 삶은 그다지 평탄치가 못하다. 평소 남들이 하지 않는 이상한 질문들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달팽이들이 그저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사는 ‘달팽이들이 그토록 느린’ 이유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가 하면, 서로를 그저 ‘달팽이’라고만 부르는 달팽이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이름’을 애타게 가지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는 이 고민들을 다른 달팽이들에게 계속 털어놓곤 하지만, 쓸데없는 질문으로 성가시게 하지 말라며 차가운 멸시와 조롱을 받을 뿐이다. 결국 외톨이가 된 달팽이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정든 고향 ‘민들레 나라’를 떠나오게 된다.
홀로 길을 떠난 달팽이는 여행 도중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인간들의 거주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인간들이 아스팔트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동물들이 사는 소중한 터전들을 마구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민들레 나라’의 동료들 역시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하루 빨리 이 위험을 동료들에게 알려서 함께 탈출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처럼 고독한 여정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해 가는 어느 유별난 달팽이의 방황과 성장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그 여정 속에서 달팽이는 느린 덕분에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보고, 듣고, 기억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아 가며, 더 많은 무게들을 짊어지고 가게 된다. 그 무게가 달팽이의 걸음을 더 느리게 만들지만, 그것이 또한 그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그 여정을 따라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만남들을 통해, 세풀베다는 자연스레 그가 그 안에 숨겨 놓은 속 깊은 성찰들과 깨달음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 소개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났다.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당시 많은 칠레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오로지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피노체트의 독재를 피해 망명했다. 그 후 수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일을 하다가 1980년 독일로 이주, 1997년 이후에는 스페인으로 이주하여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2005년에는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하기도 했다.
1989년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기리는 장편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발표하여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첫 소설이지만 단번에 세계적 베스트셀러 순위를 차지했던 책으로 아마존 부근 일 이딜리오에 살고 있는 연애 소설을 읽기 좋아하던 한 노인이 침략자들에 의해 깨어진 자연의 균형을 바로하고자 직접 총을 들고 숲으로 떠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추리소설적 기법을 사용하여 정글의 매력을 한껏 살려내었으며 환경 문제·생태학에서부터 사회 비평까지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룬 바 있다.
이후 『소외』라는 작품을 통해서 아마존의 환경 파괴, 유대인 수용소, 세르비아 민족주의, 소시민의 일상 등과 같이 잊히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여러 가지 사회 불의에 맞선 인간의 삶과 그 존재의 존엄성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희곡 「살찐자와 마른자의 삶, 정열 그리고 죽음」으로 카라카스에서 열린 세계 연극페스티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독일 북부 방송국인 NDR에서 주는 최우수 외국인 작가상을 받았다. 1989년 발표한 『세상 끝으로의 항해』로 스페인 「후안 차바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작가는 1997년 스페인에 정착한 뒤에 해마다 「이베로 아메리카 도서 살롱」이라는 독자적인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정치적 탄압으로 사라진 실종자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다룬 영화 「어디에도 없다」를 기획하여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하기도 했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전 세계에서 여러 도서 상을 수상한 『연애 소설 읽는 노인』, 누아르 형식의 『귀향』, 고래를 보호하는 환경 운동가들의 이야기 『지구 끝의 사람들』,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감정의 나약함에 대한 풍자 『감상적 킬러의 고백』, 소설집 『외면』, 동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2002년에 발표한 『핫 라인』, 우루과이 작가 마리오 델가도 아파라인과 함께 쓴 『그림 형제 최악의 스토리』(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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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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