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읍시다 (987)]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마누엘 푸익 저 | 송병선 역 | 문학동네 | 388쪽 | 14,5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은 앞서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구사한 대화체 구성을 다시금 시도하며 그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또한 그가 영어로 초고를 쓴 유일한 소설로, 작품의 배경도 전작들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가 아닌 뉴욕을 택했다. 망명자 신분의 노인과 그에게 고용된 미국인 사이의 대화를 심리 게임처럼 풀어나가며,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도약했다.
푸익의 대표작 『거미여인의 키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두 남자의 대화로 진행된다. 74세의 노인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 반체제 인사로 국제인권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뉴욕의 요양원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36세의 미국인 청년 래리는 시간제 노인 요양사로 일주일에 세 번 보수를 받고 라미레스를 찾아가 휠체어를 밀며 산책을 돕는다. 타국에서 병든 망명자의 신분으로 지내는 라미레스와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하루하루 근근이 생활하는 래리 사이의 대화는 독자들을 오해와 이해 사이에 위치하게 한다. 라미레스는 기억을 잃고 특정 단어에 집착하며 래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연극을 하듯 태연하게 상황을 꾸며내기도 한다. 또한 끔찍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야 통증이 사라진다고 억지를 부린다. 래리 역시 집요하게 그의 과거를 묻는 라미레스에게 허구와 진실을 가리기 어려운 모호한 이야기만을 들려준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들의 대화는 차츰 서로의 과거를 탐색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과거를 탐색하며 서로의 삶에 침투해가는 대화가 팽팽해지는 지점에서는 두 사람의 정체성이 뒤섞이기도 한다. 라미레스는 래리인 듯, 래리는 라미레스인 듯 상대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 밀고 당기는 심리 게임이 이어지며 그들의 과거는 차츰 윤곽이 잡혀간다.
푸익은 ‘대화’라는 소설적 기법을 통해 두 사람의 개인적인 상처와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인물의 심리 상태를 미묘하게 그려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누구의 이야기인지가 혼란스럽게 뒤엉키는 모호한 상황 자체는 이 작품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대화’라는 소설적 기법을 통해 두 인물의 기억과 심리 상태, 그리고 팽팽한 심리전을 그려내는 이 작품은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를 다루며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라미레스는 래리에게 책을 읽을 때 들리는 목소리에 관해 물으며 작품과 자기 자신의 대화 관계를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두 인물은 ‘읽기’라는 행위를 할 때, 행위 주체인 독자의 내면에 텍스트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목소리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나’가 아니라 다른 목소리로 나타나는 ‘나’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또다른 자아이다. 타자화된 자아는 열려 있는 텍스트를 읽으며 스스로 공백을 메우고 능동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한다.
이 소설 속에서 래리는 독자로서 라미레스의 옥중 수기를 읽는다. 라미레스는 아르헨티나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당시 프랑스 소설 내 단어에 숫자를 매겨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했다. 래리는 역사학을 공부했고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정치활동을 하다 수감된 반체제 인사의 기록을 해독하는 데 열의를 보이며, 이를 기회로 자신이 예전에 속했던 사회로 복귀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라미레스는 “당신이 읽고 있던 메모라는 것은…… 나는 그 메모에 있는 그 어떤 단어도 믿지 않아요…… 그 단어들은 소설 같아요. 게다가 아주 오래된 거지요. 당신은 그 메모를 읽고 그 안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있어요……”라며 래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푸익은 이 작품의 해석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작품의 제목, 라미레스의 옥중 수기, 거짓과 진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두 사람의 대화, 그리고 마찬가지로 불분명한 두 사람의 정체성까지. 모든 것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고, 절대적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작가 마누엘 푸익 소개
1932년 아르헨티나의 헤네랄 비예가스에서 태어나 중등 교육을 받기 위해 혼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195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 입학해 건축을 공부하다가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나, 1956년 이탈리아 협회의 장학금을 받아 1956년 로마의 치네치타 실험영화센터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다수의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나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후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65년 뉴욕에서 처녀작 『리타 헤이워스의 배신』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르몽드’지(1968~1969)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9년 두 번째 소설 『조그만 입술』을, 1973년 세 번째 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를 출판했으나, 후앙 페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로 역시 아르헨티나에서 판금 조치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왕가위 감독에 의해 〈해피투게더〉로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 후 마누엘 푸익 최고의 작품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1976년에는 그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인 『거미 여인의 키스』를 출간했으며, 이 작품은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어 그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 동성애자이자 망명 작가이고 할리우드 고전 영화에 광적으로 매료되었으며 스스로 영화 감독이 되고 싶어했던 그는 1990년 7월 22일, 아홉 번째 소설 『상대적인 습기』를 끝마치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밖의 작품들로는 대표작 『천사의 음부』,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열대의 밤이 질 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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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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