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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서세동점(西勢東漸)과 동양평화론

[칼럼] 서세동점(西勢東漸)과 동양평화론

 

[시사타임즈 = 장계황 박사] 우리 사회에서 안중근 장군이 갖는 의미는 아주 특별하다. 구한말 일본의 야욕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를 물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으니 그의 기개와 민족을 향한 민족주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처단의 이유가 동양평화론이다.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그는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가이며 독립투사인 것이다.

▲“해방공간이 빚어낸 남남갈등” 저자 영토학자 장계황 박사(한국역사영토재단 이사장 (c)시사타임즈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의 일본 야욕

 

서세동점(西勢東漸)은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이르는 말이다. 초기 역사시대에는 문명 간 접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대륙 안에서는 자연의 절대적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차를 두고 교류가 이뤄졌다. 중요한 기술 발전은 시간차를 두고 대륙 전체에 퍼지게 된다. 문명 발전에 따라 접촉이 늘어나고 기술 전파의 속도도 빨라지게 된다. 역사학계에서 통상 '중세'라 부르는 시대에는 한자권, 힌두권, 이슬람권, 기독교권의 몇 개 문명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같은 문명권 안에서는 지속적 교류가 진행되고 인접한 문명권 사이에는 간헐적 접촉이 이뤄지는 반면 멀리 떨어진 문명권 사이에는 접촉이 거의 없는 상태가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문명권 사이에 기술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잉여생산물의 처분문제 그리고 대량생산에 따른 원자재의 확보 등으로 문명 간 충돌이 생기게 되는데 유럽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아메리카 등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 당시 강대국의 공동 요구가 바로 ‘개항’이다. 이 시기에 러시아는 유럽을 두고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러시아의 동방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청나라에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을 개항 시켰으며 러시아는 동북아 권으로 진출하여 일본과 러일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동북아에서 비교적 일찍 개화를 한 일본은 대륙 진출을 목표로 하게 되며 한국과 청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군수물자의 힘을 빌려 러일전쟁을 수행 하게 되는데 이 결과에 의해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화 하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를 역이용하여 제2차 영일동맹과 카쓰라테프트밀약 그리고 포츠머스 조약을 통하여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게 되는데 이에 동의하지 못한 안중근 장군은 이 계획의 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15가지의 죄를 물어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게 된 것이다.

 

동양평화론과 서세동점(西勢東漸)

 

이 당시 시대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시대이다. 동서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각국이 서로 경쟁하고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면서 침략을 일삼는 것은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인 것이다.

 

동양은 서양의 침략을 받기 이전에는 학문과 덕치를 중시하고, 자기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서양을 침략할 사상은 없었다.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의명분으로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당시는 서세동점시대였으므로, 이것으로 대의를 얻은 것이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일본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과 청국 양국 국민이 일본의 선전 명분을 믿고 일본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군수지원이 합작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러·일 전쟁은 한국과 청국을 전쟁마당으로 했기 때문에 이 요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바로 ‘동양평화’ 유지와 ‘한국독립’ 공고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한국의 국권을 빼앗아서 한국 국민과 원수가 되었다. 이에 한국 국민들은 일본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나선 안중근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명분이 바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의 힘을 빌려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를 역 이용해 대한제국을 식민화 하려는 의도에 대해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로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

 

안중근 장군은 거사 후 여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원래 집필 계획은 ① 서(序) ② 전감(前鑑) ③ 현상 ④ 복선(伏線) ⑤ 문답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논책 완성에는 약 1개월이 소요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는 공소권을 청구해 그 기간에 집필을 마치려 하였는데 이를 눈치 챈 일제 고등법원장이 논책이 완성될 때까지 수개월이라도 사형집행 일자를 연기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안중근이 ① 서 ② 전감을 쓴 직후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해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은 군사와 경제로 대별 할 수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과 청에게 군사를 요청한 것은 바로 서세동점으로 밀려오는 서구의 강압적인 무력을 동양의 3국이 공동으로 대처하여 막아 내자 하는 것이요, 이 무력 뒤에 따라오는 경제 식민화에 대해 오늘날의 경제 블록화 같은 개념으로 공동 대처하여 막아내자는 것이다. 그의 안목은 본받을 만 한 것이요, 미래를 예측하고 대처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깊이 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안중근 장군은 1910년 3월 26일 "이토 처단은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앞으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라는 그이 생각을 책으로 남기고 사형집행인이 마지막 소원을 물었을 때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5분 동안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안중근 장군 같은 선조들이 있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그를 존경해야한다. 글로벌시대의 주역인 대한민국은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미래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覺永堂 學人

北村 장계황 / 行政學博士

 

한국역사영토재단 이사장

한러공생위원회 대표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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