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9)] 31. 키르기즈스탄(Kyrgyzstan)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9)] 31. 키르기즈스탄(Kyrgyzstan)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왕산 허위의 손자 블라다미르 허, 비쉬켁, 2018.5). ⒞시사타임즈
▲< 국기 >적색은 용맹, 태양은 평화와 풍요를 상징하고, 태양으로부터의 40개의 빛줄기는 40개의 부족을 의미. < 국장 >밝은 청색은 키르기스스탄의 용맹과 관용을 상징하며, 중앙에는 티안샨산이, 좌우에는 밀과 면화, 아래에는 매가 그려짐. ⒞시사타임즈

 

 

< 국가 개관 >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 내륙에 위치하며 수도는 비쉬케크이다. 13세기경 몽골, 1718세기 청나라에 편입됐다. 1936년 소련의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1991.8월 독립을 선언하고 12CIS에 가입했다.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기후는 건조하다. 키르기스인이 48%, 러시아인이 26%, 우즈베크인이 12%이다. 이슬람교 75%, 러시아정교 20%이다. 산지의 목초지에서 양의 移牧을 행한다. 귀리, , 사탕무, 담배, 과일 등과 석탄, 천연가스, 수은, 망간, 제분업, 등이 있다. 2010. 6월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와 전 대통령 바키예프의 지지자들의 갈등, 수십 개 민족사이의 소요가 잇달아,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2만 여명의 고려인과 1000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Kyrgyzstan officially the Kyrgyz Republic is located in Central Asia. It is landlocked and mountainous. Its capital is Bishkek. Despite its struggle for political stabilization among ethnic conflict, economic trouble, transitional governments, it maintains a republic. A revolution in April 2010 overthrew President Kurmanbek Bakiyev and resulted in a new constitution and the appointment of an interim government. Elections for the Supreme Chancellor were held in November 2011.

(Bikshkek and Mts Tian San)

 

 

1. 국명(Country) : 키르기스스탄(Kyrgyz Republic)

2. 수도(Capital) : 비쉬케크 (Bishkek)

3. 면적(Territory) : 199,900

4. 인구(Population) : 6,600,000

5. 국민소득(GNI) : US$1,400

6. 언어(Language) : 키르기즈어(Kyrgyz)

7. 독립일(Independence) : 1991.12.25

 

 

키르기즈스탄

 

천산산맥 자락에서

파미르고원 바라보며

평화롭게 자리 잡은 땅

 

젱기쉬산 승리봉 높고 높아 7439m

칸텡리산 나도 높소 6995m

5000m 이하는 덤비지 마라

 

알틴 아랴산 보기 전에

청정이란 말 쓰지 마라

눈이 맑으니 마음 따라 맑구나

 

바다인가 호수인가 이쉬클아

동서가 180km 남북은 60km

둘레가 700km가 넘네

 

선사시대 조상들 무얼 하며 살았나

촌폴아타 암각화

태양과 가축들이 다 알려주네

 

발효식품 크므스

먹을 사람에게 크므스를

달라는 사람에게 딸을

손님이여 반갑소 으르케세 놉시다

 

마나스 위용 무섭다

9세기 예니세이 강가에서 위구르족 도망친다

키르기즈인 만세

 

레닌 동상 박물관행

그 자리 자유의 여신상 높이 섰다

우리는 독립국 자유의 나라다

키르기즈스탄 공화국이다

 

Land of Mts TianShan, Kirgyzstan

 

At the foot of Mts TianShan

Facing the Pamirs Heights

Land full of peace and tranquility

 

Jengish Victory Peak so high, being 7439m

Never miss me, Khantngri, I high, too, 6995m

Don't come up, you, who are lower than 5000m.

 

Never say 'cleanness and purity'

Before you come to Altin Alyasan

Cleanness to eyes, cleanness to soul, too.

 

Issyk-kul, are you sea or lake?

200km east-west, 80km south-north

More than 700km round

 

What did ancestors do, long long long ago?

Petroglyphs at Chonpolata

Sun and cattle in them tell us all

 

Kumus, fermented food

Kumus to the one wishing to eat

Daughter to the one who loves her

Glad, visitor, let's enjoy doing Urkese

 

How imposing General Manas

Ulghurs run away at Rv Yenisay in the 9th century.

Hurrah, Kirgyzstans, forty tribes!

 

Lenin Statue to museum

Miss Liberty Statue stands high, there

Kirgyzstan is independent, Land of Freedom

We're Kirgyz Republic!

 

 

1. 키르기즈스탄 약사

 

키르기즈인들은 예니세이 강 상류에 살던 튀르크화된 몽골로이드 민족으로 주 서에 귀방(鬼方)이라고 불렸으며 철륵의 후예이다. 1세기 무렵에는 튀르크계인 흉노의 지배 하에 있었다. 4세기 때는 철륵(카자흐, 키르기스)은 몽골 계통 국 가인 유연에 속해 있었는데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코카서스 계통 돌궐이 몽 골 고원을 정복하여 유연을 멸망시켰고 키르기스인들은 튀르크인들에 속하게 된다. 이 때부터 예니세이 강 상류의 유목민들은 투르크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투르크화가 되었다.

 

8세기에는 다시 투르크계인 위구르의 침략을 받아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9세기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켰으나 키르기즈족은 다시 동쪽으로 원래 살던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으로 돌아왔다. "키르기즈"는 투르 크 언어로 "40"을 뜻하는데 이는 키르기즈스탄의 민족 서사시인 마나스에 등 장하는 40개의 부족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러나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지배 하에 다시 들어가고, 16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인은 기원이 같으며 카 자흐인은 스텝 지역인 카자흐스탄에 키르기즈인들은 산악 지역인 현 키르기즈 스탄에 정주한다. 1863년 북쪽 지역이 제정러시아에 병합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1926년 키르기즈 공화국을 건국하였다. 1991831일 소련의 분열에 의해 독립을 하게 된다. 1993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지금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키르기즈스탄은 2005년에 튤립 혁명으로 아카예프 대통령이 쫓겨났는데, 혁명 주역 가운데 고려인도 들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2010611일 남부 오 슈에서 청소년 단체 간의 대립을 계기로 키르키즈인과 우즈벡인 사이에 민족 항쟁이 격화되고 방화, 살인이 잇따르면서 사태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 다. 유엔은 10만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대피하고, 난민 30만명이 발생하였다 고 발표했다.

 

폭동 이후,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오쉬주, 잘랄아바드주, 바트켄주를 3단계 여행제한지역으로 그외 지역은 2단계 여행자제지역으로 여행경보를 조정했다. 201293일에 키르기즈스탄의 세 정당은 새 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01711월 소론바이 제옌베코프가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안정을 되찾고 있다.

 

 

2. 비쉬케크에서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근무할 때 휴가를 이용하여 유명수 서기관과 함께 중 앙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리는 키르키즈스탄을 여행했다.

 

레닌 동상이 우뚝 섰던 중앙광장엔 그 동상은 박물관으로 이전되고, 대신 자 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서 이 나라가 소련으로부터 독립되었음을 웅변으로 말 해주고 있었다.

 

휴가기간이 짧아 텐샨 산맥 트레킹은 아쉽지만 생략하고 비쉬케크 시내와 바다처럼 넓은 이쉬클호를 여행하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이쉬클호)

 

 

키르기스스탄 동쪽에 

따뜻한 호수여

중국 사람들은 열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런가 바다보다 넓은가

동서가 500리요 남북이 150리네

충청도보다 넓구나, 세계에서 두 번째

 

해면고도 1600m

텐샨의 설산 고봉들

빙 둘러서 이웃이네

 

118개 하천이 유입되나

나가는 물줄기는 없구나

 

그 옛날

당나귀 귀를 가져꾸나 임금님

이발사는 우물에 그 사실 흘린다

그 우물 부글부글 넘치니......

 

노인네의 이야기는 정겹고

길가의 양떼들은 흥겹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은 뭉게뭉게 여유로워라

 

 

3. 키르키즈스탄을 달리며

(초원의 빛- By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그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빛을 찾으리.”

 

8개월 전 나는 길을 떠났고 지금은 맑고 순결한 키르기스스탄의 5월 속 깊은 곳까지 달려왔다. 솟구쳐 올라오는 대지의 봄의 기운과 이슬처럼 내려앉는 하늘의 기운이 내 몸에서 만나 알 수 없는 특별한 기운을 선사한다. 나는 바람이 거셀수록 마음의 돛을 활짝 폈다.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듯 초원을 달려나갔다. 살아 움직이는 듯 뒤척이는 풀잎이 싱싱하고 힘차게 느껴졌다. 소와 말과 양은 초록으로 배를 채우고 지금 한민족은 통일의 희망으로 영혼을 채운다. 초원의 하늘은 내 아버지의 생애처럼 좁지 않고 드넓고 푸르르다.

 

이곳에 오면 누구든 잃었던 시력 되찾고 잃었던 희망 되찾을 것 같다. 잃었던 소중한 기억을 되찾을 것 같다. 초원은 말 그대로 풀밭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목가적 풍광. 양 떼들. 목동. 낙타들의 행렬, 그리고 뭉게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연상되는 곳이다. 그러나 초원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겠는가? 사실 어떤 삶인들 보이는 대로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하겠나! 초원은 온대 지방의 반건조기후로 산림지대와 사막지대 사이에 나타난다. 이 드넓은 초원은 중국의 동북지방의 대흥안령산맥에서 시작해 몽골 초원과 카자흐 초원을 지나서 동유럽의 헝가리까지 푸른 띠를 이룬다. 이 초원길이 비단길의 옛 고속도로인 셈이다.

 

다 말라죽은 듯 황폐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생령들이 봄을 맞아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여름이 오면 초원은 충만하고 가축들은 살이 찌고 하늘은 푸르고 드높다. 들판은 온갖 생명이 환희로 넘쳐난다. 목동은 말을 타고 푸른 초원을 달리며 가축을 돌보며, 하늘과 땅, 천지의 온 생명과 자신이 하나가 된 것 같은 일체감을 느낀다. 그러다 기나긴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오면 세상은 순식간에 척박해진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대자연의 원리다. 그때는 모든 생령들은 봄이 올 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국경 마을에서 숙소를 잡는 데 실패하고 다음 마을인 카라발타까지 가서도 엄청 고생하며 여기저기 물어본 후에야 잠 잘만 한 곳을 찾았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장기 투숙을 하며 몸을 파는 것이 분명한 여자가 야릇한 땀 냄새를 풍기며 방문을 열어놓고 담배를 물고 지나간다. 피할 수만 있으면 이런 분위기는 피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피곤한 몸을 쉬어가야 했다. 냄새나는 목욕탕에서 샤워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러시아의 작곡가 알렉산더 보르딘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찾아내 다시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어보았다.

 

좋은 음악을 만나는 것은 항상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 곡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마치 세밀화를 그리듯이 음으로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지나는 이곳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초원을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고 낙타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귀에 아련하다. 음악 자체는 훌륭하고 나무랄 데 없는데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약간 비위가 뒤틀린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무역을 하려고 지날 때 러시아 병사들이 호위를 해주는 곳, 러시아의 통치에 이었고 계속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현악기의 고음으로 광활하고 고독한 초원을 표현하고 이어서 목관악기가 이어지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말과 낙타의 발굽 소리, 잉글리쉬호른의 동방 음악이 신비롭게 클라리넷과 호른이 뿜어내는 러시아 서양 음악과 조화를 이운다.

 

유목 생활을 하는 키르기스인들은 예부터 몽골이나 중국, 그리고 아랍세계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삶을 이어왔다. 키르기스 서사시는 대부분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영웅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았다. 서사시 그 자체를 마나스라고도 하지만 주인공의 이름 또한 마나스라고 불린다. 키리기스인들은 자신들의 서사시 마나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다. 이 서사시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때 키르기스인들을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나스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친 것보다 두 배 반이나 길고 내용이 다채롭다고 한다. 마나스를 구송하는 이들을 마나스치라 부르는데 그 긴 마나스를 다 외워서 구송한다. 위대한 마나스치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에 비견될 만큼 하늘을 찌른다. 그들은 천국에서 온 음송자로 칭송받으며 키르기스어는 이들에 의해서 천국에서 천국으로 흐른다. 화폐에도 마나스치가 등장한다.

 

마나스가 속한 키르기스민족은 몽골고원과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유목민의 후예다. 이들은 현재 파미르고원 북부, 타림 분지 서부, 톈산산맥의 남부 지역과 페르가나 동부지역에 거주한다. 특히 키르기스 민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돌궐계열 민족 중 하나로 고구려나 발해의 이웃 민족이였다.

 

이 아름다운 초원의 길을 달리는 것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차들이, 특히 트럭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엄청난 먼지구름에 감싸 안겨야 했다. 포장은 구소련 시대 이후 한번도 보수공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곳곳이 패어있었다.

 

초원의 야생화(野生花)는 척박한 땅에서도 꽃을 피우고 진한 향기를 뿜는다. 말발굽 소발굽에 밟혀도 다시 일어나 자라 세대를 이어간다. 이곳 중앙아시아에 이주해온 고려인들은 초원의 야생화보다 더 강인하게 살아남아 한국인 특유의 향을 흩뿌린다. 길을 나서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가졌다. 키르기스스탄에도 우리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흐른다.

 

이양종씨는 20년 전 몸이 안 좋아 공기 좋고 물 좋고 약초가 많은 이곳에 휴양하러 왔다가 정착해 살고 있다. 그는 한국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건축자재 사업도 하면서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는 나의 평화마라톤 소식을 듣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주고 싶어 했다. 자신의 엘림 게스트하우스에 마음 편하게 있으라 해서 그곳을 거점(據點) 삼아 며칠 왔다 갔다 하며 달렸다. 덕분에 엘림에서 잠도 편히 자고 잘 차려주는 밥상으로 영양도 충분히 보충했다. 길 위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편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 주는 사람이 제일 사랑스럽더라! 저녁을 사준 평통위원인 정지성씨도 여기서 한식당과 여행사를 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장군 후손들도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경상도 구미가 본관인 그들은 거의 백 년 전 8000km를 흘러들어와 이곳에 살고 있고, 나는 서쪽 끝에서 8000km를 달려와 그들을 만났다. 허 블라디슬라브씨는 9형제 중 형님 한 분 누나 한 분만 살아있다. 그가 맏형님은 16세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동사했다는 말을 할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한마디가 혹독한 삶을 다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나그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가 초대한 고려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잘 먹고 아침에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는 길에 허 블라디슬라브씨와 그의 조카 허 블라디미르씨가 나와 배웅해주었다. 블라디미르씨는 다음 주에 이식쿨 호수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처음으로 풀코스 도전을 한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국경까지 15km를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독립군 손자와 증손자는 그들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조국 자주독립의 꿈을 나를 통해서라도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심정으로 나에게 극진했다. 그들은 헤어질 때 선물로 준 휴대폰 케이스에 200달러를 넣어주었다. 마치 독립자금이라도 받은 듯 결연함이 울컥 올라온다. 아마도 또 누군가는 그들 할아버지의 주머니에 눈물 젖은 독립자금을 꼬깃꼬깃 집어 넣어주었을 것이다.

 

나는 사실 늘 지나다니던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역에 이르는 왕산로가 왕산 허위선 생을 기리는 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왕산 허위선생은 구미 태생 조선말 의병장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조직한 13도 의병 연합부대 총군사장으로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펼쳐 왜적(倭敵)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후일 "우리 2천만 동포에게 허위 선생과 같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날 같은 국치(國恥)의 굴욕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고 그를 흠모하였다.

 

왕산 허위 가문은 우당 이회영 가문, 안중근 가문, 석주 이상룡 가문과 함께 항일운동 최고 명문 가문 중 하나이다. 허위 가문은 충효를 중시하는 가풍 덕분에 그의 4형제와 그의 직계 후손들 그리고 이육사까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다. 이육사 모친은 허위의 4촌 허길의 딸이다.

 

왕산 허위는 성균관 박사와 평리원 수반 판사를 지낸 문관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는 양주에서 서울 탈환 작전을 펼치며 일거에 동대문 밖까지 밀고 들어왔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잡혀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가 된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남긴 유언이 또 나를 찡하게 만든다. "아버지 장사도 아직 지내지 못했고 국권을 회복하지도 못한 불충과 불효를 지었으니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이제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우리 영토를 넓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넓히고 활동 반경을 확장할 수는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닭장 안에서 모이가 없다고 한숨 짓지 말지어다. 유라시아 한복판에 뛰어들어 바라보니 초원의 풀처럼 기회는 널렸다. 혹여 닭장 속이 답답하면 배낭을 메고 닭장 속을 뛰쳐나오라!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주유(周遊)하라! 그러면 답을 얻으리라. 우리의 영역은 한없이 확장되리라!

 

한때 그렇게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젠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찾을 길 없을지라도 우리 서러워 말지니

도리어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소서!

 

(32번째 나라 카지흐스탄 이야기로 계속)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 iysong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