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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 칼럼 ] 3·1운동 100주년 준비는 제2의 건국으로 승화되길

[ 칼럼 ] 3·1운동 100주년 준비는 제2의 건국으로 승화되길


 

 


▲김동진 시사타임즈 호남본사 대표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칼럼 = 김동진 시사타임즈 호남본사 대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해가 1919년이다. 그 당시만 해도 서양에서는 국력을 악용한 제국주의세력들이 영토 확장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침범하는 일이 유행병처럼 번져 있을 때였다. 동양보다도 좀 더 일찍 과학문명에 눈을 뜬 서양에서는 온갖 신무기를 제조하여 손쉽게 약소국을 집어삼켰다.

 

강국이 약소국을 침범하는 일은 유사 이래 계속되어온 일이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100년에 걸친 세월은 유난히 강도가 심해졌다. 그것은 고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혜택을 안겨줬다. 건축술의 획기적인 발달은 주거문명을 일신시켰으며 의류와 먹거리 그리고 생활상의 어려웠던 일들이 가장 값싼 방법으로 해결되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전쟁의 방법이다.

 

과거에는 성을 높이 쌓기만 하면 일차적인 방어수단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대포가 등장하면서 성(城)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 기마전에 능했던 몽골의 칭기츠칸이 유럽까지 유린했던 전쟁은 이제 탱크와 비행기로 대체되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은 그로 인한 대량살상의 현실을 목도하고 그를 보상한다는 뜻으로 노벨상을 제정하여 오늘날 모든 과학자들의 꿈이 되었지만 이제는 원자폭탄의 출현으로 전 인류의 소멸이라는 가능성까지 열려있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럴 즈음 서양에 한발 떨어진 동양에서는 가장 날쌔게 서양문명을 받아드린 일본이 거대한 중국을 앞지르며 군사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세계최강이라는 발틱 함대를 전멸시키는 대 승전을 기록한 일본은 중국의 청나라와도 일전을 치르며 최대강국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네 나라에 불교와 한자 그리고 도자기 서화 등 온갖 예술문화를 전수해준 조선에 눈독을 드리고 야금야금 파고들면서 드디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1910년에는 아예 강제합방이라는 치욕을 안겨준다. 이 때 고종을 겁박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매국노들을 우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요즘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 때문에 여당을 이 꼴로 만든 이들을 ‘병신친박오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아무튼 나라가 어지러울 때 목숨을 걸고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던 옛 사람들의 선비의식이 부럽기만 하다.

 

일제에 항거하여 안중근의사는 이등박문을 하얼빈 역두에서 쏴 죽이는 쾌거를 일으켰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나는 조선독립군 참모장의 자격으로 적군을 사살한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진술하면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옥중 아들에게 편지를 전하여 “행여 목숨을 애걸하려고 항소 하지마라. 대한남아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죽어라”고 격려했다.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안중근 같은 아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일제는 한국을 강제병탄한 후 전국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가혹한 헌병정치를 펼쳤다. 을사늑약 이후 경남 함양에서 의병대를 조직하여 5년여에 걸쳐 끈질기게 일제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사람이 전성범(全聖範)대장이다. 그는 함양출신이지만 활동무대는 전북 무주 진안 장수 등지에서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그 규모가 컸다. 일제경찰은 그의 부인을 고문하여 결국 후유증으로 죽게 만들었으며 전성범에 대해서는 엄청난 현상금을 걸어 체포에 열을 올렸다. 전성범은 끈질긴 투쟁 끝에 강제합방이 된 1910년 11월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속성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2월 대구형무소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기록과 시일을 미뤄볼 때 일제총독부 최초의 사형집행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악행으로 일관하던 일제에 대항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간헐적으로 투쟁의 열기를 높여나가던 중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터진 것이 3·1운동이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선 이 운동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상징된다. 손병희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1~2년의 실형을 살아야 했다. 만세운동은 들판의 불꽃처럼 번져나갔으며 이로 인하여 일제에 학살된 사람만도 1만 여명에 이른다. 특히 수원 제암리 교회를 불 질러 예배를 보던 신자들을 모조리 타죽게 만든 잔인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민족수난의 역사다.

 

이제 3년 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다.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위원장에는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을 선출했다. 추진위는 33인이 아니라 3333인의 새로운 민족대표로 구성된다. 숫자는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이지만 이제 세계를 향하여 크게 포효하는 한국민족으로서는 당연히 그 규모를 확대하고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축제로 승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박남수 위원장은 100주년 기념사업이 제2의 건국운동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학술연구를 비롯하여 문화 사업을 펼치는 한편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한민족운동단체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청년 여성 학생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어 기대가 크다. 그 일환으로 거행된 11월18일 ‘세계로 퍼진 3·1운동’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는 그 의미가 한결 드높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혼불이며 혁명이다 고 할 수 있다,

 

글 : 김동진 시사타임즈 호남본사 대표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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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호남본사 대표 ksk36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