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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신앙의 힘

[엄무환 칼럼] 신앙의 힘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보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밭의 추수를 하는 사람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운 상태로 타작마당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이때 룻이라는 한 여인이 보아스가 잠자리에 들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가서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누웠습니다. 룻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렇게 하라고 코치했기 때문입니다. 즉 룻이 시어머니의 말에 100% 순종한 것이지요. 이처럼 룻은 철저하게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한참 잠을 자던 보아스가 밤중에 느낌이 이상하여 몸을 돌이켜 보니 세상에 웬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지 뭡니까. 보아스가 놀라서 “네가 누구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룻이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기업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기업무를 자’란 이스라엘의 제도로 남편이 후사를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경우 가장 가까운 친척 중 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후사를 낳는 제도입니다. 이때 남편이 된 사람은 경제문제까지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문제가 부담스러워서 기업무를 자가 못되겠다고 거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룻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는 보아스의 이 말은 룻의 행위에 대해 혹여나 룻이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보아스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바아흐로 캄캄한 밤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호적한 상황에서 룻이 자발적으로 보아스를 찾아와 보아스가 잠자기를 기다렸다가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누워 있습니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룻의 돌발적인 이같은 행위는 물론 보아스에게 청혼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자칫 남녀 간의 성적 관계로까지 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아마도 웬만한 남자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룻이 먼저 요청한 일이요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가 맞으며, 보아스의 기분도 너무 좋습니다. 모든 상황이 호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보통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입니다. 룻의 요청을 일단 거절하면서 그러나 룻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내가 기업무를 자가 맞다. 하지만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 그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행하겠다고 하면 그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기를 거절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겠다.”고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이 태도는 신앙의 힘을 드러내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즉 보아스는 룻이 온 몸으로 표현하는 청혼 요청에 대해 자칫 성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 절제의 힘을 보입니다.

 

보아스도 남자입니다. 룻은 젊은 여인입니다. 젊은 여인이 밤중에 몰래 찾아와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몸으로 표현하는 이같은 상황은 어떤 면에선 한 여인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보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옆에 지금 누워 있습니다. 한 여인이 몸으로 보내는 강렬한 전류가 전해져 옵니다. 몸이 반응합니다. ‘나를 받아주세요’ 라고 간곡하게 애원까지 합니다. 상황이 이 정도면 뭘 망설이며 주저하겠습니까.

 

그런데 보아스가 온 몸으로 대시하는 룻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룻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을 읽어서 고려하겠다고 했지만 그러나 육체적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고리는 차단했습니다. 이는 무서운 절제력입니다. 한 여인의 성적 유혹을 이겨낸 보아스의 이 절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힘일까요. 저는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힘 말입니다.

 

▶보아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나 룻에게 한 말들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추수하는 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인사말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보아스가 이삭을 줍고 있는 룻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또한 룻이 밤중에 몰래 찾아와 보아스가 자신의 기업무를 자이므로 자기를 받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가 맞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다.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합니다.

 

보아스의 이런 말들은 보아스가 얼마나 철저한 신앙의 사람인가를 증거합니다. 보아스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앙의 삶입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내뱉는 말, 상대방에 대한 적절한 배려와 돌봄, 부자이지만 자신의 부를 결코 과시한다든지 혹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하지 않는 삶에서 품어져 나오는 수준높은 품격적 삶의 행위들은 하나같이 보아스가 평소에 몸에 베인 신앙의 힘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호젓한 밤에 몰래 찾아와 자신을 받아달라는 룻의 요청에 극도의 절제력을 발휘한 보아스의 이 행위야말로 신앙의 힘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보아스의 이같은 신앙의 힘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저는 보아스의 부모님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아스의 부모님은 살몬과 라합입니다. 살몬이 누구이며 라합이 누구입니까.

 

살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요단강가에 도착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정탐할 때 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게 됩니다. 이 두 명의 정탐꾼 중 한 명이 바로 살몬입니다. 살몬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탐을 하는데 여리고성의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하고 고자질을 합니다. 그래서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특수요원을 파송하여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라합이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라합이 이미 그 정탐꾼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고 라합의 말을 들은 특수요원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정탐꾼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라합의 말을 들은 두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고 답변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군사들이 여리고성을 정복했을 때 라합의 집 가족들은 모두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두 정탐꾼 중 한 명인 살몬이 라합의 신앙에 매료되어 결혼까지 하게 됐고 이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보아스입니다.

 

이런 부모님들이 보아스를 어떻게 키웠겠습니까. 누구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온 몸으로 체험한 부모님들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고 강을 밟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어떻게 무너뜨렸느냐 하면 그냥 성을 한바퀴씩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여섯째 되는 날엔 여섯 바퀴를 돌고 소리를 지르자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한 살몬과 라합이 아들 보아스를 얼마나 신앙으로 키웠겠는지 짐작이 가지 않겠습니까.

 

보아스가 베들레헴의 거부가 된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을 보아스가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는 매사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신앙의 힘, 그 힘이 하마터면 룻과의 육체적 관계를 가질 수도 있을 법한 위기의 순간을 이기게 만들었습니다. 호젓한 밤에 젊은 한 여인이 마음에 작심하여 감히 여자로서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무릅쓰고 안겨왔지만 그러나 보아스는 극도의 절제된 힘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순간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룻이 혹여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자상하게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네가 현숙한 여인인 줄 성읍 사람이 다 안다.”

 

이처럼 보아스가 룻에게 내보인 절제력과 배려는 보아스의 몸에 베인 신앙의 삶이 나타난 신앙의 힘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감히 이같은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 배경에는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아스의 삶을 통해 나타난 절제력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 성령의 열매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맞다면 이 열매는 반드시 맺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열매로 내가 정말 예수를 믿는지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 열매가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신앙의 힘이 뭐냐.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같은 삶은 오직 신앙의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열매들입니다.

 

반면에 바울사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서 성령의 열매, 즉 신앙의 힘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나의 삶에서 이런 신앙의 열매, 신앙의 파워(power)가 나오지 않는다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절제력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절제력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 즉 신앙의 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필수적 삶이요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한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사람이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영적으로 혼탁한 그 시대에 빛을 발한 등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제2의 보아스, 제3의 보아스와 같은 인물들을 세워가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복음의 빛을 발하는 등대와 같은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길 기뻐하십니다.

 

나에게선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가운데 특히 어떤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내 삶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힘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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