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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055)] 키 작은 프리데만

[책을 읽읍시다 (1055)] 키 작은 프리데만

토마스 만 저 | 안삼환 역 | 민음사 | 116쪽 | 5,8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토마스 만의 초기 단편 소설은 친가와 외가, 시민성과 예술성, 북독일과 남독일 등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긴장 관계가 빚어낸 산물이다. 훗날 대가가 될 싹을 보여 준 첫 작품 「타락」과 작가의 핵심 모티프라고 할 수 있는 삶과 예술의 갈등 문제를 오롯이 담아낸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토마스 만의 문학 내부로 들어서는 데에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토마스 만은 흔히 20세기 독일 문학의 대표자, 더 나아가서는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작가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심’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만은 반전과 세계 평화를 표방하며 인본주의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했다. 또한 독일인으로서 나치즘의 잔학성을 끊임없이 고발해 왔다. 그뿐 아니라 토마스 만은 독일어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 정묘한 문장으로 이뤄진 산문의 극치를 보여 줬으며 자칫 방향성을 상실하기 쉬운 만연체 문장을 선보이면서도 결코 균형감을 놓치지 않았던 거장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과 의지, 재능은 일찍이 노벨 문학상을 통해 인정받았으며 『마의 산』과 『파우스트 박사』는 20세기의 세계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단 데뷔 초기까지만 해도 만은 출생지 북독일과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키운 남독일, 즉 건실한 상인 자손으로서의 현실 감각과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적 자아 사이에서 고뇌했다. 이렇듯 타협할 수 없는 두 가지 세계를 방황하는 영혼의 초상을 그려 내는 데에 골몰했다. 그리고 이것은 노벨 문학상 수상하고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욱 심화되는데 바로 초기 작품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타락」 속에 이러한 문학적 단초가 마련돼 있었던 것이다.

 

데뷔작 「타락」은 토마스 만의 기량이 전부 발휘됐다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작가가 문학 활동 초기부터 형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어서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장차 토마스 만이 보여 줄 거장으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나타난 작품이다. 불구의 몸에 갇힌 숭고한 영혼 프리데만 씨…. 만은 내면에서 들끓는 욕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긴장 때문에 두려워하는 프리데만 씨의 모습을 빌려, 작가 자신의 고뇌를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 낸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운명과의 싸움에서 쉬이 좌절하고 마는 인간의 본연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 토마스 만이 한평생 몰두했던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작가 토마스 만 소개

 

1875년 북독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은 곡물상이자 시의회 의원이고, 어머니 율리아는 반은 포르투갈계이고 반은 크레올계인 남부 출신으로, 그는 아버지에게는 북독일적인 이성과 엄격한 도덕관을,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남국인의 정열과 예술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토마스 만의 유년 시절은 부유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가 정리되면서 가족들은 거기서 나오는 이자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된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토마스 만은 일찍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983년에는 산문 습작을 했으며, 자신이 발간하는 『봄의 폭풍우』지에 글을 기고했다.

 

토마스 만은 다니던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가족이 이미 1년 전에 이주한 뮌헨으로 가서 화재 보험 회사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하지만, 곧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1985년에서 1986년까지 뮌헨 공과대학에서 미학, 예술 문학, 경제 및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시절, 김나지움 시절부터 이미 그를 사로잡았던 슈토름, 헤르만 바르, 폴 부르제, 헨리크 입센 등을 탐독하였고, 직접 『짐플리치시무스』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1년 첫 장편소설 『부르덴브르크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무렵 단편소설들을 모아 단편집『토니오 크뢰거』(1903)도 발표하였다.

 

1905년 뮌헨 대학교 수학 교수의 딸인 카타리나(카챠라는 애칭으로 불림)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3남 3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가족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토마스 만의 두 여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듯이, 아들 클라우스 만이 자살했고, 막내 미하엘 만도 신경안정제 과용으로 의문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탈출하다가 남편을 잃은 모니카 만은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1912녀 폐병 증세가 있어 부인이 다보스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문병을 간 토마스 만은 그곳의 분위기와 그곳에 체류하는 손님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느낀 인상에도 매료되었는데, 이런 체험을 글로 쓰기 시작, 점점 방대해져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마(魔)의 산』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창작을 중단하고, 평론집 『비정치적 인간의 성찰』(1918)과 같은 정치 평론을 발표했다. 전쟁 초기 독일 문화와 독일 시민 계층의 와해를 걱정하며 국수주의적 입장을 보이며 형 하인리히 만과 불화를 겪게 되지만, 평론「독일 공화국」(1922)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민 계급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던 중 1929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1931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이후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작가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1933년 바그너 서거 50주년이 되던 날, 토마스 만은 뮌헨 대학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끝으로 그는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1935년에는 나치 정권에 대해 공개 반박을 하기에 이르렀고,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가 되어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기념 강연 청탁으로 16년 만에 독일 땅을 밟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토마스 만은 현실의 공산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인 사회적 평등을 존중했다. 그래서 구동독 정권에 대해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매카시 위원회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환멸을 느낀 토마스 만은 1952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2일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키 작은 프리데만 씨』(1897),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1901), 「트리스탄」(1903), 「굶주린 사람들」(1903), 「글라디우스 다이」(1903), 「토니오 크뢰거」(1903), 「신동」(1903), 「벨중족의 혈통」(1905), 「피오렌차」(1906), 「대공 전하」(1909),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 「주인과 개」(1919), 『마의 산』(1924), 「무질서와 젊은 날의 고뇌」(1926)등이 있으며, 『요셉과 그의 형제들』(1943)는 1926년에 쓰기 시작해서 1943년에야 비로소 완간되었다. 또한 『바이마르의 로테』(1939), 『파우스트 박사』(1947), 『선택받은 사람』(1951), 「속은 여자」(1953)가 있으며, 1910년부터 쓰기 시작한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은 1954년 〈회상록 제1부〉라는 제목이 덧붙여져 출간되었으나, 결국 이 소설은 그의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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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