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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계급투쟁과 무산계급독재 : 인간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으로

[칼럼] 계급투쟁과 무산계급독재 : 인간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으로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Ⅰ.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계급주의적 역사관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유물론적 역사관인 동시에 계급주의적 역사관이다. 계급주의적 역사관은 사회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이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계급들의 투쟁과정이며, 계급적 이해관계가 역사발전 방향을 규정하는 기본요인으로 된다는 관점이다.

해당 사회의계급구조와 계급과 계층들 사이의 대립되는 역량관계만 파악하면 해당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발전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에 대한 계급적 이해관계의 분석은 과학적인 역사관을 수립하는 데서 중요한 방법론으로 된다고 볼 수 있다.

 

Ⅱ. 계급은 정치와 경제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계급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주의적 입장으로부터 출발하여 계급을 생산관계에만 결부시켜 규정하였다. 계급을 크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산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계급으로 나누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자체의 노동력으로 생산하는 사람들을 소자산 계급 또는 중간계급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간계급은 결국 극소수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분화될 운명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정치분야와 문화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마르크스주의는 정치나 문화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산계급이 생산한 물질적 재부의 일부를 얻어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립적인 계급으로 될 수 없으며, 결국 경제계급인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에 종속된 사회계층이라는 것이다. 즉 자산계급을 지지하며 자산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정치인이나 문화인은 결국 자산계급에 속하고, 무산계급을 지지하고 무산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정치인이나 문화인은 무산계급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운동에 전력한 사람들은 노동경력이 전혀 없어도 노동계급 성분으로 규정한다.

우리가 계급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로 나서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특권계급을 없애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것인가 하는 길을 밝히는 것이다. 계급문제는 본질상 계급적 특권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특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관계의 공통성이 있어도 지배계급이라고 볼 수 없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라야 지배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권을 가져야 지배계급이 되는데 봉건사회는 정치적 특권이 경제적 특권보다 우선한다.

적어도 봉건사회까지는 정치적 특권이 경제적 특권보다 위에 서 있었다. 땅을 소유하기 때문에 봉건통치자로 된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함으로써 땅도 지배하게 되어 땅의 소유자로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봉건통치계급이 본신(本身)은 토지를 소유한 경제계급이 아니라 무력을 장악한 군사정치계급이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적 특권을 경제적 특권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경제적 특권만 없애면 정치적 특권도 없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사회화하여 경제적 특권을 없앴지만, 노동계급독재의 명목 아래 정치적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물건에 대한 지배권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배권까지 장악한 새로운 강력한 특권계급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사회화(민주화)하는 것이 경제적 특권계급을 없애는 방도로 된다면, 정권에 대한 소유관계를 사회화하는 것이 정치적 특권을 없애는 방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특권은 물질적 욕망이 인간의 욕망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특권에서의 기본은 권력에 의거하여 강제적으로 보장되는 정치적 특권과, 재력에 의거하여 매수의 방법으로 보장되는 경제적 특권이라고 볼 수 있다.

현 역사발전 단계에서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기본으로 하여 사람들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상문화적 이해관계나 민족적 이해관계의 대립도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여서만 그 진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객관주의(개인주의)와 구분하여 계급적 이익과 계급의식에 대해 살펴보자.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적 이익을 지상의 이익으로, 계급적 이해관계의 대립을 타협할 수 없는 대립으로 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적 대립을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만큼, 그것은 결국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둘 것은 계급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사회가 아무리 나쁘다 하여도 사회적 협력 자체를 파괴하는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계급적 이익을 지상의 이익으로 간주하는 데로부터 사회 공동의 이익을 반영한 사회적 의식을 부정하고, 계급적 이익을 반영한 계급적 의식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계급주의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사상을 반드시 어느 계급의 사상으로 규정하려 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노동계급의 사상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인본주의에 기초하여 나온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사상(공상적 사회주의사상)도 모두 노동계급의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성숙된 노동계급의 사상이고,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은 아직 노동계급이 계급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계급적 이익을 정확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자기의 계급적 이익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모든 사물을 노동계급성(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원칙)과 당성(공산당의 이익을 옹호하는 원칙)을 척도로 하여 보아야 하며, 모든 활동에서 계급성과 당성의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성과 계급성을 무시하고 초당적이며 초계급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부르주아 객관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객관주의에까지 계급성을 부여하여 부르주아 객관주의라고 하지만, 사실 이러한 객관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객관주의자들은 혁명적 열정이 없다보니 실천을 경시한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이 실천과 동떨어진 지식 자체를 자랑하기 좋아한다.

 

Ⅲ. 사상이란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회적 의식

사상은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회적 의식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게도 존재하고 그것을 반영한 사상도 존재한다.

계급은 사회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발생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처럼 역사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없어진다. 계급이 발생하기 이전이나 계급이 소멸된 이후에도 인간의 사상적 이해관계의 차이성과 공통성은 인간 생명의 본질적 특성의 발현으로서 없어지지 않는다.

 

새로 밝힌 중요한 진리로 정치사상과 관련하여 인간의 이해관계의 차이성(개인적 존재)과 공통성(집단적 존재)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의 이해관계의 차이성과 공통성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 불연속적인 개인적 존재(차이성)인 동시에 연속적인 집단적 존재(공통성)라는 인간 존재의 양면성의 기본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중심철학이 처음으로 밝힌 중요한 진리의 하나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도덕적 견지에서 인간본성 문제로 논의하였다. 즉 인간을 개인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본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인간을 집단적 존재로 본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였다. 성악설과 성선설은 오랫동안 대립하여 논쟁하였으나 그것이 인간의 본성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엿다.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것은 모든 사물이 불연속적 존재의 측면과 연속적 존재의 측면을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물 존재의 보편적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 개인은 한 세대로 끝나는 불연속적 존재이지만 집단은 세대에 세대를 이어 영원히 생존하는 연속적 존재이다.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특징은 인간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변할 수 없는 인간존재의 기본특징이다.

 

인간의 두 가지 본성으로 인간 존재의 2가지 사상조류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본형태가 있다.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는 인간 존재의 기본형태이며 인간 생명의 두 가지 형태인 만큼 인간의 본성에도 개인적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성과 집단적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이 있게 된다. 또 이에 기초하여 사회의 기본적인 사상조류로서 개인주의 사상조류와 집단주의 사상조류의 2대 사상조류가 형성되게 된다. 계급적 또는 계층적 이해관계를 반영한 여러 가지 사상조류는 예외없이 다 개인주의사상과 집단주의사상의 복합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이해관계와 그것을 반영한 사상의 기초가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직업적 분공이 특권화 될 때 계급적인 차별이 생긴다.

사회적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과 소집단들은 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을 나눠받고 있다. 직업적인 분공도 이러한 나눔에 속한다. 직업이 다르다고 하여 계급적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직업적 분공이 특권화될 때 계급적인 차별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의 사회내부의 모순으로 오직 계급투쟁만이 사회발전의 동력이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이 사회발전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모든 사물발전의 원천을 내부 모순에서 찾고 있으며, 모순은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투쟁이 발전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기본 내부모순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발전의 근본원인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생산력의 수준에 맞지 않는 낡은 생산관계를 생산력이 수준에 맞는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하지 않으면 사회가 발전할 수 없으며, 계급사회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교체하는 사업은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인간중심 정치철학의 사물발전의 동력은 결합과 협조가 창조의 기본내용으로 된다.

발전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발전을 저해하는 조건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과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창조적 활동을 결합시켜야 한다. 발전은 새것을 창조함으로써만 실현된다. 새것의 창조를 떠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새것을 창조하기 위하여서는 각이한 사물이 결합되어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합과 협조가 창조의 기본내용이며 사물발전의 동력이다. 모든 사물의 발전은 새로운 결합과 새로운 협조의 산물이다.

그러나 결합과 협조는 무조건적으로 심화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만물은 다 불연속적 존재의 측면과 연속적 존재의 측면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불연속적 존재는 다 차이성을 가지고 있다. 차이성을 가진 불연속적 존재가 결합되어 협조함으로써만 새것이 창조되고 사물의 발전이 아루어진다.

 

불연속적 존재의 연속적 측면과 불연속적 측면을 두고 척력작용(억제)과 인력작용(강화)이 존재한다.

불연속적 존재도 연속적 측면과 불연속적 측면, 차이성과 동일성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양면 가운데서 불연속적 측면이 우세할 때 결합을 배척하는 불연속적 존재가 보존되게 된다. 그러므로 불연속적 존재가 다른 사물과 결합하여 협조하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결합을 배척하는 불연속적 존재의 특성을 억제하고 결합을 환영하는 연속적 존재의 특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즉 불연속적 존재의 척력작용을 억제하고 인력작용을 강화시키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력 발전의 원인은 생산관계에서 찾고, 생산관계의 발전원인은 생산력 발전에서 찾고 있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은 사적 소유제를 철폐해야 계급이 해방되어진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계급적 불평등을 근절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할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출현한 가장 선진적인 계급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노동계급은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무산계급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주의적 소유제를 실시하여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유일한 계급이며, 또 사적 소유제를 철폐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계급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제도를 매장하고 사적 소유를 청산함으로써 모든 계급을 해방할 역사적 사명을 지닌 특수한 계급으로 인정한 데는, 역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사회발전의 원인으로 보고 생산력을 대표하는 계급 생산관계를 대표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이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된다는 사상이 놓여 있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기본모순은 생산수단의 소유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생산자 대중 사이의 모순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Ⅳ. 진보적인 사람은 높은 수준의 사상문화를 가져야

여기서 진보성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회발전의 요구와 이익에 맞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사람이라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발전의 요구와 이익을 옳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사상문화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원래 사회의 요구와 이익이 무엇인가를 옳게 판단하고 사회의 이익에 맞게 사회생활을 이끌어가는 것은 정치가들의 임무이다. 그러나 정치적 특권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는 정치가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려는 이기적 편견 때문에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지 못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사상문화수준이 높으면서도 정치적 특권도 경제적 특권도 가지지 못하고 있는 문화인들이 사회의 요구와 이익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진보적인 사상을 내놓는데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진보적인 새로운 사상을 내놓은 것은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개인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본성이다. 인간은 고립적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의 생명은 집단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사랑과 믿음 속에서 살 것을 요구한다. 고독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없으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이것이 집단주의적 본성이다.

 

인간은 영구불변의 두 가지 본성이 있다. 계급은 생존경쟁의 결과 발생한 일시적인 인간관계이다.

개인주의적 본성과 집단주의적 본성은 인간의 두 가지 본성으로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 인간생활의 기본내용이 된다.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것은 영구불변의 인간존재방식이며,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두 측면을 옹호하려는 특성은 영구불변의 인간 본성이다. 계급은 생존경쟁의 결과 발생한 일시적인 인간관계이다. 계급이 발생하기 이전이나 계급이 소멸된 사회에서는 계급도 없고 계급적 이해관계도 없다. 계급적 관계도 인간적 존재의 사회적 협조관계의 한 형태이다.

 

무산계급독재론은 ①역사발전의 단계와 연결, ②계급투쟁과 ③무계급사회로 설명되어진다.

마르크스는 계급이 존재하며 계급적 대립과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이 이미 발견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기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계급이 생산발전의 일정한 역사적 단계와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둘째로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무산계급독재를 가져온다는 것, 셋째로 무산계급독재는 계급의 철폐와 무계급사회를 실현하는 데로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독재의 필연성을 주장하게 된 기초에는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제도를 타도하고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상이 놓여 있다.

봉건정권이 자기 게급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실시하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봉건계급이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피지배계급의 요구와 이익을 무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배계급에 대해서도 자유와 평등은 보장해 주지 않았으며 귀족 내부에서도 신분적 위계제도가 실시되었다.

 

민주주의란 계급을 초월하여 전 인민적 요구에 맞아야 한다.

원래 민주주의는 전 인민적인 것으로 되어야 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어느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대표하는 것으로 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로서의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자본주의사회의 민주주의가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계급적 측면을 제거하고 전 인민적 요구에 맞는 민주주의를 수립할 데 대한 과업을 내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레닌은 계급투쟁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사회 건설에 관한 이념은 가지고 있어도 노동계급 독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노동계급독재를 긍정하는가, 긍정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공산주의자 소부르주아 인테리를 가르는 시금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독재라는 간판이 인기가 없고 불리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 적대계급을 완전히 청산한 다음부터는 자기들의 독재정권을 계속 강화할 목적으로 국내적으로는 노동계급독재에 대하여 강조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노동계급독재 간판을 떼고 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주의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소련식 사회주의의 붕괴 원인은 독재적 반인민적 반사회주의로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식 사회주의의 붕괴 원인에 대하여 의견이 구구하지만 기본원인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독재를 실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재를 통하여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방법으로 사회주의 우월성을 발양시키겠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사회공동의 이익을 어느 한 계급의 이익에 귀착시키는 것 자체가 사회공동의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념에 배치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독재가 반인민적이며 반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회주의와 독재, 민주주의와 독재는 상용할 수 없는 반대물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다당제 의회민주주의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전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떤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인가 하는 것은 그것이 인민의 이익, 사회발전의 이익에 얼마나 충실히 이바지하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Ⅴ.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믿어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해방의 깃발을 추켜들고 문화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순박한 노동자, 농민들을 복수주의 정신으로 선동하여 자산계급을 반대하는 무자비한 계급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노동자, 농민들보다도 더 비참한 운명이 공산당을 따라간 인테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량한 마음을 가진 많은 인테리들은 무계급사회를 건설한다는 공산당의 선전을 믿고 공산주의자의 긍지를 가지고 혁명의 길에 나섰으나, 혁명이 승리한 후에는 그 절대다수가 믿을 수 없는 자산계급 출신의 우연(偶然)분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숙청되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혁명밖에 모르는 특수한 사람들이며 영원히 생사운명을 같이 하는 혁명동지라고 선전하였지만,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통하여 승리자는 패배자를 반당 종파분자요, 지주,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의 앞잡이요 하는 따위의 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숙청해 버렷다. 이러한 공산당 집단이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허용할 수 있다고 믿은 것 자체가 더없이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근본오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대치시킨 데 있으며 더구나 계급적으로 대치시킨 데 있다. 계급적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의 과업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사실에 응당한 주목을 돌리지 못하였다. 따라서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와 집단중심의 민주주의 사이에 공통성과 함께 차이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상 집단중심의 민주주의였지만 그것을 노동계급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대치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개인중심의 민주주의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제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발전의 객관적 조건이 성숙됨에 따라 개인중심의 민주주의 원리를 집단중심의 민주주의 원리와 결부시켜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특성에 맞게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의 기치를 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개선 완성을 주장하는 민주개혁의 기치를 들었어야 할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등 인간중심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며 기저로 하는 통일 민주주의의 이념당 건설이 당면한 과제인 것을 새삼 인식할 수 있다.

 

글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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