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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III

[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III


 



김봉규 논설위원 ⒞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전문가 칼럼 = 김봉규 논설위원] 비가 개자 소년은 칠색의 영롱하고 화려한 무지개가 이쪽 산에서 저쪽 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오랫동안 무지개를 바라보던 소년은 결국 결심한다. “그래 무지개를 가져다 뜰에다 놓아야지!” 소년은 열심히 무지개를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산을 아무리 넘어도 바로 앞의 무지개는 멀어질 뿐이었다. 결국 소년은 꿈을 포기하게 되고, 고백한다.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거야!” 그 순간 소년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노인이 되어버렸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아니면 소년과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냥 생각하는 것도 귀찮고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인가? 아니면 언젠가 혹시라도 무지개를 만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살아가는가? 아쉽게도 75억 세계인구의 대부분에게 행복이란 불행이 잠깐 멈추는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위로가 될 뿐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고, 행복처럼 보이는 무엇인가를 향해 지금 이 순간도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산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다. “불행해 죽겠다!”는 아니지만 그냥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그럭저럭 산다. 사실 살아 내고 있다. 하루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날 계획하는 것 같다. 무미건조함으로.

 

행복을 원하나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과녁이 벗어났기(hamartia) 때문이다. 행복이 아닌 짝퉁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 사실 인류는 언제 어디서나 이 짝퉁행복만을 원해왔다. 그것은 행복지수로 표시되는 행복감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언제 “진짜 행복해 죽겠어!”라는 생각이 드는가? 만약 체면을 벗어버리고 솔직하게 속을 털어 놓는다면, 대략 6가지 정도가 아닐까?

 

1) 먼저 생존과 안정을 위해 고소득 정규직이라면 행복지수가 올라갈 것이다.

2) 다음으로 즐기고 싶은 것을 원 없이 즐길 수 있다면?

3) 그리곤 스포츠카든 명품이든 원하면 무제한 소유하고 싶지 않은가?

4) 그러면 아마도 “너, 완전 폼 난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삶! 얼마나 멋진가!

5) 하지만 간섭받는 삶은 싫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멋대로 살고 싶을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앞의 1)~5)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돈이다. 돈이 넘쳐난다면 정말 좋지 않겠는가!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욕망충족에 비례해서 행복지수가 상승한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상승한다는 것은 더 행복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행복하다는 느낌, 즉 행복감이 증가한 것을 뜻한다.

 

의아스럽겠지만 행복감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감은 행복의 짝퉁이다. 이 짝퉁은 인류가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추구해온 것이다. 그리고 인류로 하여금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속이고 유혹해온 거짓행복이다. 무슨 말인가?

 

행복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성공을 원한다. 스티브 잡스만큼 최고가 된다면 금상첨화지만 최소한 남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삶은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행복을 위해, 한 계단 한 계단 성실히 올라간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계단 끝에 있는 행복의 태양을 안을 그 날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래서 짝퉁행복, 즉 행복감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생행로는 계단식 구조이다.

 

 


 

 

사람들은 일류 대학에 입학하면 행복의 1계단을 올랐다고 생각한다. 졸업하고 최고의 직장에 취직하면 2계단에 도달한 것이고, 승진하면 3계단, 새 차 뽑으면 4계단, 그리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 다음 집 사고, 화장실 하나에서 두 개짜리로 이사하고…. 이렇게 오르다 보면 언젠가 거대한 행복의 태양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사실(fact)은 전혀 다르다. 75억 세계 인구를 포함하여 지구상에 존재한 인간들 가운데 이 계단을 올라 행복을 발견한 이는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 단 한명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기루, 허상일 뿐이다. 그 허상의 커튼을 걷어내면 행복감의 실체가 드러난다.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다고 하자. 당연히 행복감이 충만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대략 6개월 정도면 식기 시작하여 다시 본래 상태로 되돌아온다. 비슷한 행복감을 느끼려면 졸업하고 취직해야 한다. 하지만 상사에게 치이다보면 곧 다시 원상복귀다. 새 차를 사면 기분이 최고가 되지만 흠집나기 시작하면 다시 식는다. 그렇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집 평수 늘리다보면 어느 덧 무지개를 찾는 소녀처럼 백발의 노인이 된다. 그래도 행복감을 향한 욕구는 줄지 않는다. “오늘은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그래! 오늘 밤에 스포츠중계하지!” 그렇게 노인은 안주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스포츠중계에 행복해하다 죽는다.

 


 

행복감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새 것이 없다. 말 그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무의미와 공허, 그리고 허무!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일까?” 하지만 대부분은 행복감에 속아 거짓의 길로 더 깊이 용해되어버린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생각한다. 오늘은 뭘 해야 기분이 짱일까? 그래서 쾌락과 소유 그리고 성공의 메커니즘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부자를 부러워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절망한다. 대학이나 직장이 변변하지 못하고, 건강까지 나쁘거나, 가정불화가 있거나, 아니면 연금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이들은 그 쳇바퀴마저도 일그러져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행복감에 끌려 살아지는 삶, 그것을 진정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영화 <설국열차>의 기차설계자 남궁민수는 꼬리칸의 리더 커티스에게 외친다.

 

내가 열고 싶은 문은 이런 엔진의 문이 아니라 기차의 문이야!

그 문을 열면 기차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바로 그 문이지.

그의 외침은 옳았다. 표면상으론 기차 안이 생존이고 밖은 죽음이다. 하지만 기차의 모든 칸은 서로 다른 행복감만을 대변한다. 꼬리칸은 생존욕구, 중간칸들은 쾌락과 소유욕, 그리고 마지막으로 엔진칸의 윌포드는 광기화된 이성의 자기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다. 호흡한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 아닌 행복감으로만 중독된 세상,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세상이다.

 

글 : 김봉규 본지 논설위원, 서강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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