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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타임즈 = 신혜숙 권사] 1. 이광수 목사님과의 만남
1979년, 23살에 결혼하여 고향인 경주를 떠나 서울 세곡동에 신혼살림을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교회를 찾던 중 남편이 수요일 퇴근길에 판자로 된 허름한 건물에서 찬송소리가 들린다고 가보자고 해서 가보니 판자로 지어진 가건물에 한교회 라는 나무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남편은 여기서 봉사하자고 제안을 했고, 그것이 이광수 목사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큰 교회에서 성장한 내게 충격 이였던 것은, 장롱을 놓아 둘 곳이 없어 교회 옆 야산에 바닥엔 판넬을 깔고, 그 위에 장롱을 놓고 비닐을 덮어 두고, 거기서 이불이며 옷을 가져오는 걸 보고 너무 놀랐고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교회 뒤쪽에 작은 재래식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가며 식사를 준비하던 고인이 되신 사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고생하며 개척하는 목회자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가난한 전도사에게 왜 그리 손 벌리는 사람은 많은지, 작은 사례비마저 십일조도 못 떼고 봉투째 건네주고는, 정작 본인은 신대원 학교에 갈 교통비가 없어 사모님을 통해 새댁인 제게 돈을 빌리러 온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고생과 어려움은 다 열거할 수 도 없이 너무 많습니다.
2. 내가 본 이광수 목사님의 목회사역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융통성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오직 교회와 성도들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39년 동안 안식년과 휴가를 한 번도 쉰 적이 없었고 30년을 십에 이조를 하셨습니다.
선교에 비전이 많아서 베트남 ,중국, 콩고, 분당 구미교회 등을 개척하고, 교회를 대형교회로 성장시키는 일보다는, 물은 고이면 썩는다며 교회는 항상 나누어야 한다며 실천하셨던 목사님 이셨습니다.
어쩌면 교회 시설의 문제점은 그리도 잘 보이시는지 교회직원들이 지적당할 때가 많았으나 가정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으로서는 빵점 남편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설교말씀은 옥한흠 목사님처럼 명 설교는 아니었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국교회 어느 목회자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예로, 목사님을 아주 힘들게 하면서 교회를 떠난 모 남자 집사님의 모친이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와서 아들 집사님이 감옥에 있다고 변호사비가 필요하다며 그때 당시에 큰돈을 빌리러 왔었습니다. 사모님이 친구한테 빌리고, 아이들 교육보험까지 해약해서 돈을 마련해준 사실을 알게 되어 내가 화가 났습니다.
시간이 지나 들은 사연은 처음엔 돈이 없어 돌려보냈는데, 목사님께서 마침 그 주간 주일설교준비 말씀이 “강도만난 사마리아인”이었는데 도저히 설교를 할 수 없을 것 같고, 내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저러한 사정을 한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돈을 마련해 줬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때부터 목사님을 존경했습니다.
상가였던 교회건물을 구입할 때마다 사택전세금을 빼서 내놓고, 화장실도 없는 옥탑 방에서 세 차례나 사셨습니다. 심지어 역삼동교회 장순덕 권사님이 너무 안타까워 주택을 전세 얻어 주셨는데 그마저 교회건물을 추가로 매입할 때 내 놓으시고 다시 또 옥탑 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며칠 전에 한교회의 두 권사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독설로 이 목사님을 음해하는 카톡을 보내왔는데 주님이 다 보시고 계시는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3. 한교회 건축
오랜 염원이었던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설렘과 기대가 컸습니다.
남편이 서울강남노회 모임에 갔더니 장로님 한분이 말씀하시기를, 이광수 목사님은 참 훌륭하시다고... 보통은 은퇴를 앞두고 성전을 건축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기목사를 후임으로 앉히지 않는다! 라고 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건축헌금도 장로들보다 더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의 노후를 생각지 않으시고, 퇴직금 일부를 미리 요청하시고, 모자라는 돈을 차용하여, 마음에 작정하신 금액을 채우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예감한 사모님이 목사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를 간절히 원했었는데 .... 그것은 뒷전이고, 성전건축현장에는 하루에도 열 번쯤 가보시면서, 다들 퇴근하고 없는 컴컴한 현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뵐 때도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결국 사모님은 성전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천국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시어머니인 김만인 권사님과 함께 많은 고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4. 후임목사 청빙
후임목사 청빙을 앞두고 사실 교회가 공개적으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친구가 다니는 세문안교회는 2년 동안 조 편성을 해서 준비 기도를 했다는데, 한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목사님의 불찰이고, 당회의 잘못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문성모 목사님의 청빙을 반대하던 장로들의 주장대로 공개적으로 많은 이력서를 받아서 그 중에서 선택했다면 오늘의 이런 사태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후에 이 목사님 의견을 들어보니 신학교 총장출신의 문 목사님이 제일 잘 하실 능력이 된다고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5. 문성모 목사님
문 목사님을 후임 목사님으로 청빙 결정이 난 후 이 목사님은 문 목사님에게 6개월 전에 미리 오시라고 하셔서 당회장실과 강대상을 다 내어주고 사택도 5천만 원을 들여 수리하고, 화장실 비데기까지 설치해 드렸습니다. 이 목사님이 거주하실 때는 낡은 홑겹 창문에 군데군데 썩은 마루에서 사셨지만 후임목사님에게는 뭐든지 좋은 걸로 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2015년 10월 18일 2부 예배 후에 문 목사님이 장로간담회를 열어 이 목사님은 교회를 떠나고, 교인들도 만나지 말고, 콩고자유대학에만 전념하라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한교회는 그 동안 해오던 선교후원을 중단하겠다 라는 말을 하고 2주간 교회를 비웠습니다.
이 목사님은 두말없이 교회를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기를 문 목사님을 잘 도와서 교회를 세워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섬기고, 봉사하기로 다짐하고 권사회 임원진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다 제주여행 사건이 터졌습니다. 제주여행 사건은 그날 나의 일기를 보면 2016년 2월 24일~26일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 드디어 시간일치가 되어 제주도를 다녀왔다. 함께 웃고, 먹고 자고,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정도로 힐링이 되었다. 또 앞으로 열심히 주의 일하고, 기도하고, 삶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자 신혜숙 파이팅~!!“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제주도를 다녀온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시무하실 때도 개인경비로 놀러갈 때면, 보고 같은 거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니 문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보고 안하고 갔다고, 두 차례나 임시당회를 소집하고, 사모님까지 당회(공식 당회는 아님)에 참석하고, 목사님은 사모님이 의기소침 하다라고 하시니, 장로들은 사모님도 목사님과 똑같다 사과를 하라, 사과안하면 징계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습니다.
사모님은 권사회장을 집으로 불러서 누구누구 갔느냐~~국회의원 인척에게 탑승자 명단을 의뢰하려 한다, 임원들은 다 이광수 목사님 측근이고, 개척하려 한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김OO 장로님은 한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권사들이 교회를 어렵게 하려고 맡은 일을 다 팽개치고 주일을 빼 먹고 제주도로 놀러갔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수요일 오전에 제주에 도착해서 한교회에서 부목사로 제직하다 제주 김영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신 서용훈 목사님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금요일 밤 9시에 서울에 도착해서 다음날 토요일과 주일, 식당에서 봉사했고 화장실청소까지 했었습니다. 한교회 교인들도 다 아는 일입니다.
이런 일로 결국 우리는 한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성도들도 떠났습니다. 한교회에서의 38년은 남편과 나의 젊음과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직장이 천안으로 발령이 난 남편과 주말부부로 23년을 지내면서도 이 목사님과, 사랑하는 성도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영적이지 못한 나의 인간적인 판단으로 인해 잃은 것도 많았습니다. 이곳에서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았고, 우리는 대를 이어 뼈를 묻게 될 줄 알았는데....
남편은 한 번도 앓아누워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일주일동안 앓아누워 출근을 못했습니다. 문 목사님 사모님이 늘 우리를 이광수 목사님 측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주여행 사건을 빌미로 내치려 했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권사들의 제주 여행사건이 엉뚱하게 이 목사님에게 화살이 돌아가서 이 목사님에겐 참으로 죄송하고 우리에겐 상처로 남았습니다.
당회회의록에 엄연히 기록된 원로목사님의 약속된 사택 문제가 지켜지지 않아서 우리는 시위를 하게 되고, 끝내 한교회는 원로목사님의 생활비 보조, 거주 공간, 원로목사자격 박탈까지 감행 하였습니다.
현재 이 목사님의 세간살이는 이삿짐센터 컨테이너에 수개월째 보관중입니다.
한교회 장로들이 이 목사님을 고소해서 지난 9월에 한국에 나가경찰에서 조사를 받았고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참 슬프고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교회 모 권사는 이 목사님이 10억의 비자금이 있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이 목사님은 웃으시며, 정말 10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교회 빚 갚아주고 싶다고 말씀을 하셔서 나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만큼 한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설교 말씀이 대형교회 목사님과 비교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누굴 편애하는 것처럼 비춰졌다면 인정하겠습니다. 사람이 완벽하지 못하여 행정적인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목사님은 자기를 위하여 돈에 욕심이 없는 분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근 40년 가까이 이 목사님을 곁에서 보아온 모습입니다.
요즘같이 정보화된 세상에서 추적을 해 보면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교회는 모든 부서 임원 및 회원의 임기가 2년이며, 장로들이 부서장이 되어 관리를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김OO 장로님을 특히 많이 아끼셨습니다. 당회서기를 13년 동안 계속하도록 하셨고, 그와 교회의 모든 사안을 의논하고, 또 신뢰하셨지요.
김 장로님이 성도와 갈등이 있을 때에도 교회에는 질서가 필요하다며, 항상 김 장로님의 손을 들어줬고, 그래서 상처받은 성도들이 떠나기 까지 했습니다. 어떤 타 교인이 이태리명품 넥타이를 이 목사님에게 선물했는데, 본인이 갖지 않으시고 김 장로님에게 드릴 만큼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신뢰를 받은 김순규 장로님이 이 목사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6. 콩고자유대학 그리고 세 분 선교사
약수동 신일교회에서 파송한 곽군용 선교사를 통하여, 2002년 하나님의 은혜로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 자유대학이 세워졌고, 그 동안 여러 선교사들이 고생을 하여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 후원 교회 중에 한교회가 가장 많은 후원을 했습니다.
한 교회에서는 가장 많은 선교헌금을 했으므로 한교회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모 권사가 학교를 교회에 돌려달라고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세상기업에서는 지분이 가장 많은 사람이 운영권을 행사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운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입니다
돈을 많이 헌금했다고 우리의 것이라고 굳이 주장을 한다면, 정말 큰 금액을 헌금한 사람들은 다 한교회를 떠나갔고, 타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소유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한교회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도 많은 금액을 내신 분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다들 한 두 구좌씩, 많으면 열구좌 내외일 것입니다.(1구좌 = 5,000원/월) 그것도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반드시 계산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목사님은 현지 이사들과 이사회를 하면서 이 학교를 잘 세워서 콩고에 귀속하겠다고 발표 하셨습니다. 이곳은 사회주의 공산국가입니다. 모든 회의내용을 문서화해서 교육부에 보고를 하게 되어 있어 거짓말 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못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외국선교사들이 세워준 학교와 병원으로 인하여 오늘날과 같은 교육과 질 좋은 의료혜택을 받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받은 은혜를 가난한 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주려는 목적 외 에는 어떤 사심도 없으시고, 내가 어떻게 하고 나가는지를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경주에 가면 대구 동산병원 경주분원이 있습니다. 복도에 미국의 시골마을에 작은 전원교회 사진이 걸려있고 아래에 위 교회의 성도들이 피를 팔아서 헌금한 돈으로 세운 병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피를 팔아서까지 병원을 세운 그 교회가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한교회에서는 이 목사님이 사유화 하려고 선교사들을 쫒아냈다고 하는데 모두 거짓입니다.
2016년 9월에 콩고에 먼저 들어와 있던 금○○ 권사님이 이○○ 장로에게 보낸 카톡 내용을 보면 이미 그때부터 콩고에서는 모종의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교회가 세명 선교사들의 생활비지원을 중단하여서 2016년 1월부터~11월까지 이 목사님을 포함해서 한교회를 나온 성도들 12명이 매달 7.590.000원씩 모아서 송금 했습니다. 11월분을 송금했더니 이제부터 안 받겠다고 돌려보내 왔습니다. 나는 이제 학교가 형편이 잘 돌아가는 것으로 판단되어 내심 반가웠습니다. 매달 7.590.000원을 만들어 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속셈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성도인 내게도 큰 충격이요, 상처였습니다.
2016년 1월 문 목사님이 상담 중에 “선교사들 80%는 가짜다”라고....“선교사들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말에 동감합니다.
우리가 콩고자유대학에 오게 된 것은 어느 날 이 목사님이 콩고로 와서 도와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처음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실 나는 풍토병, 에이즈 같은 것 등이 싫어서 아프리카여행도 오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 시간에 박목사님께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중에 “나는 우리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고민이 있다면, 날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며칠을 두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일이 무엇이었나? 그런데,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져 남편과 함께 한 달 동안 기도해 보자고 의논하여 기도하는 중에, 우리 부부는 같은 날, 같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응답이라 여기고 아프리카 행을 결정했습니다. 2018년 1월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을 과감히 접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바라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보자고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교회를 떠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신도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교회’, 박○○ 목사님을 만나 등록하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콩고로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목사님께서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돕겠다고 응원해 주십니다.
한교회에 최○○ 장로가 일면식도 없는 박 목사님에게 세 차례나 이 목사님과 우리를 음해하는 메일을 보내오고, 합성한 사진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박 목사님께서 저희를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직과 성심으로 최선을 다해 섬기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와서 보니 선교사들이 매일 자기 영성을 점검하지 않으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간섭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7. 한경훈 · 박성원 · 김은성 선교사
한경훈 선교사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느 날 호주에서 한경훈 선교사가 이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한선교사가 입고 온 회색빛이 섞인 점퍼도 기억납니다. 두어 시간 가량 대화를 하고 간 후, 이 목사님께서 나에게 한경훈 목사가 콩고를 가고 싶다고 한다고..“고맙다. 그렇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목사님은 한 목사가 전도사 시절부터 어려울 때마다 품어 주셨습니다.
자유대학 부총장으로 파송하고, 이 목사님은 한 선교사에게 박사학위공부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배려해 줬습니다. 후에 총장직을 물려주어 한선교사가 학교를 잘 세워서 총장의 뜻과 같이, 콩고에 귀속시켜 주기를 바라셨던 것이겠지요.
한 목사는 총장님께 메일을 보내올 때 자주 콩고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컴퓨터를 하실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 사무실로 오면 내가 전달해 드렸습니다. 정작 자기네 선교사들이 더 정직하지 못한 것을!!
박성원 목사는 몰래 빠져나가면서 미처 챙겨가지 못한 물건 중에 잠비아에 있는 태주 스틸이라는 구리 회사에 직원으로 임명받은 문건이 발견되었고, 김은성 집사(선교사)는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 킨샤샤에서 구리회사 직원 3명이 찾아와, 찰리김이라는 한국 사람과 함께 구리 거래 했는데 도무지 연락이 안 된다고 학교로 알아보러 왔었습니다.
선교사 본연의 임무는 던져놓고....학교시설은 엉망으로 방치해 놓은 상태로, 강의실 천장은 여기저기 썩어 내려앉아 비가 세고 책상은 곳곳에 깨져있고, 짓다만 건물은 2년째 방치되어 녹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로 덮여있었습니다.
공인기관을 통해 회계감사까지 받았습니다. 선교사들의 비리가 드러나 밝혀졌습니다. 박성원 목사는 학교 재정을 맡고 있으면서 영수증 없이 지출한 돈의 지출동의서가 A4용지박스로 한 박스 분량이 사무실 캐비넷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일하다보면 영수증을 부득이 못 받을 때 도 있지만 그건 어쩌다가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요.
법원으로부터 이것을 소명하라는 압박이 들어올 걸 미리알고 몰래 혼자 도망갔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가족들을 남겨 놓고...이 곳 직원들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우리들은 열악한 곳에서 고생한다고 맘 짠해 하면서 한교회가 끊어버린 생활비를 매달 보냈습니다.
아이들은 디디애라는 학교직원을 시켜 국제학교에 등하교를 시키고...그래서 현지인들의 평판은 아주 나빴습니다. 선교사는 섬기러 온 것이지 군림하러 온 것이 아닐 터인데...!!
한경훈 선교사나 박성원 선교사 그리고 김은성 선교사 모두 이 목사님에게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김은성 선교사의 경우 아들처럼 대했습니다.
8. 글을 마무리 하면서...
이 목사님은 얼마나 이 땅을 사랑하고,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급여도 받지 않고, 그나마 책정된 총장활동비 1,000$은 한국에 유학 간 현지학생들에게 아니면, 현지인 교단 교회에 도와주고 항상 지갑은 텅 비어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한교회를 떠나왔지만 한교회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름을 바꾸고, 연혁을 없애고, 창립 일을 바꾼다고 변화가 될까요?
오래전에 이 목사님이 한교회에 시무하실 때 하신 설교 중에 “토머스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도, 칼 마르크스도 그 누구도 그들이 말하는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변화되어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두들 상처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너도 나도, 그러나 이 목사님은 “우리의 상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누구의 고통과도 상관없이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이루어 가신다고...
이광수 목사님은 한교회를 세우셨고, 39년을 섬기셨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오직 주님과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신 분입니다. 선교사들도, 장로들도, 성도들도 이 목사님에게 모두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이들 모두로부터 이 목사님은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교회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엔 거주할만한 방 한 칸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원로 목사 생활비도 끊어버려 생활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하여 나오신 분들이 한교회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만 이 목사님의 생활비까지 끊어지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원로목사직 박탈까지 당하게 되었지만 노회에서 부결되어 아직은 명분이 한교회 원로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시위를 할 때 동네에 사시는 원주민 어른이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광수 목사가 밤마다 돌산에 가서 텐트치고 기도하며, 물도 나오지 않는 동네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는데, 새로 온 목사가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셔서 세곡동 돌산에서 밤새 울면서 기도하던,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이제라도 한교회가 원로목사에 대한 예우를 지켜 주는 좋은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이 목사님과 한교회와 함께 지내온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속에서 경험한 글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2018년 1월 4일 콩고에서 신혜숙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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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신혜숙 권사 r8302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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