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다
[시사타임즈 = 장계황 박사] 불편한 이웃인 일본과 경제보복 전쟁이 연일 펼쳐지다 보니 오랜만에 마음이 하나로 모여 민족이 하나 되는 느낌이다. 늘 그래 왔듯이 일본과의 문제가 발생되면 모두가 열을 올리고 애국자가 된다. 시중 우스갯소리로 한때 G2로서 세계시장을 호령하던 일본에 대해 한국인만은 일본을 알기로 우습게 본다. 세계인들은 이를 불가사이한 일로 보고 있다. 이게 한국과 일본의 관계이다.
그런데 국민 모두가 이번 경제보복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나 일부의 국민들은 민족 정서와 다르게 우리 정부를 비판하고 아베에게 오히려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서울대 명예교수인 이영훈의 ‘식민지근대화론’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오늘날 우리가 잘 살게 된 모든 부분이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삼아 근대화를 시켜 주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는 논리이다.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이다. 이런 자들과 같은 조상을 가진, 같은 민족이라는 게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식민지근대화론이란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 문물이 이식되어 경제·사회·문화·사상에서 폭넓은 변화를 경험하였고, 나아가 이것이 광복 이후 한국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식근론’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다른 용어로 ‘식민지 수혜론’이 있는데, 일제의 통치가 조선에 수혜가 되었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의 배경에는 일찍이 미국, 유럽 권의 개발경제학자들이 식민지배가 개도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데서 비롯되나, 실상 식민지는 제국주의세력의 착취대상이었다. 나아가 피식민지국가가 식민지배로 인해 왜곡된 사회구조 때문에 갈등구조로 사회 혼란이 크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독립한 후에도 식민국가에의 구조적 관계 때문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종속이론이 출현한다. 지금의 한일 관계가 바로 이런 문제이다. 이 이론이 우리나라도 1987년 10월경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라는 주제로 한일 공동 연구가 시작된 이래 일본 도요타 재단의 연구비 지원에 힘입어 안병직 교수를 중심으로 연구되다, 이후 이영훈, 김낙년 박기주 등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주도하였다.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학설을 연구하는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제국주의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이론적 체계를 수립해 주는 경우와 식민지에 대하여 개발론과 수탈론을 동시에 보지 않고 개발론을 편집하여 보게 되면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내게 되기 때문에 차별화된 학문적 성취감 때문에 연구하게 된다. 이런 측면서 본다면 이영훈 교수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학자이다.
대한국토(한반도)의 근대화
이영훈 교수는 인터뷰에서 누가 우리를 근대화 시켰느냐고 따지고 든다. 당연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 시켰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이다. 일본이 41년간 강점하면서 근대화의 길을 간 것은 사실이나 근대화의 시작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을 갔기 때문에 일본에 의하여 근대화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일본이 우리보다 근대화를 먼저 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청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근대국가로 변화를 시도 했다면 지나(중국)도 양무운동을 통하여 근대화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늦었을 뿐이지 우리도 우리 사회의 요구에 의하여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의한 강제병탄 식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식민지배가 시작한 1910년보다 30년 앞선 1880년에 이미 근대화가 시작 되었고 그 흐름의 연장 속에서 30년의 근대화 결과에 식민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사회는 이미 정착단계에 접어들었고, 강제 병탄에 의한 식민시대에는 근대화 보다는 수탈이 횡행하던 시대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친일사관에 의해 교육 되다보니 한일병탄 시대에 근대화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일본은 네덜란드 등 유럽을 통하여 근대화를 가져 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서구 유럽 및 먼저 근대화를 이룬 청나라나 일본 등으로부터 근대화를 가져왔다. 식민시대에 한정하여 그때부터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는 1880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해 6월에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2월에는 변화를 이끌어 갈 새로운 기구로서 정1품 관청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다. 1881년 4월에는 정부에서 파견한 조사 시찰단이 일본에 도착하여 선진문물을 조사하였으며, 9월에는 영선사 김윤식이 이끄는 대규모 유학생이 청의 군수 공장에서 기술을 배웠다. 앞서 5월에는 별기군이란 최초의 신식 군대도 창설하였다. 엄청난 변화의 시대였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조선책략>인데 1876년 한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1880년 7월 5일 제2차 수신사로 예조참의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 하는데 이는 근대화의 개혁을 위한 국제 정세 탐문과 국제법과 관련하여 활동을 전개하며, 당시 일본서 청국 공관을 왕래 하면서 주일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 참사관 황준헌(黃遵憲) 등과 외교정책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였고 귀국하는 길에 황준헌이 지은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을 얻어와 고종께 전달함으로 조선에 개혁이 시작 되었으며,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균세전략으로 대응하고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1910년 보다 이미 30년 전에 근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조선사회는 청에 대해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양국 관계를 대등하게 조정한 새로운 조약을 맺자고 요구하였으며,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미국 등 서양 국가와의 수교도 검토하였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변화를 서둘러 추진한 것은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 없다는 위기감이 높아졌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생존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어 독립을 보장받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여 독립을 지키고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조선은 지나의 양무운동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 보다는 늦었지만 스스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여 근대화의 길을 만들어 갔다. 이영훈 교수가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이전에 이미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전반의 근대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 안착을 위한 경제의 근대화
사실 경제의 근대화란 말이 조금은 낮설을 수도 있다. 어떤 경제 방식이 더 근대적이라고 규정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현대사회가 차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접근을 근대화라 규정 지을 경우 식민지 시대가 아닌 그 이전에 우리 사회는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무역이 늘었으며, 1882년 이후에는 청과의 무역량도 늘었다. 이제 조선은 청·일을 매개로 자본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 체제와 만났다.
초기 무역은 개항장에 진출한 외국 상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부산과 원산에서는 주로 일본 상인이, 인천에서는 청과 일본 상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청에 내지 통상권을 부여한 1882년 이후에는 외국 상인이 개항장 밖 내륙에서도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80년 이후 청 상인들이 꾸준히 무역이 늘어 청일전쟁은 사실 조선의 무역권을 장악하려는 경제 전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외국 상인들은 조선 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조약상의 치외법권 규정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외국산 제품을 쉽게 확보하고 금융 기관의 도움도 받았으니, 조선 상인들이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경제 체제에 있어서 근대화를 자본주의 도입으로 본다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자립적인 국민 경제를 갖추느냐, 외국 경제에 편입되느냐를 뜻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이 당시 우리는 식산흥업(근대 산업 육성)을 개화 정책의 큰 줄기로 삼았다. 그래서 관영 공장을 세우고 기술 교육을 확대하였다. 1881년부터 부터 근대무기제조공장인 기기창과 화폐개혁과 중앙은행 설립을 주도한 전환국, 국가 기관으로서 옷감을 만들어 내는 직조국, 관영으로 종이를 만들어 내던 조지국을 잇달아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광무국을 두어 광산 개발을 시도하고, 농무 목축 시험장이란 최초의 모범 농장을 세워 신 농법도 시험하였다. 식산흥업은 대한제국이 광무개혁을 할 때 같이 추진된 것으로 상공업 진흥 정책이었다. 경제 근대화는 식민지 이전에 이미 시작이 된 것이다.
이 당시 우리사회는 이미 전기를 도입하였는데 1883년 미국으로 파견된 조선의 사절단은 발전소와 전신국을 방문하면서 전기의 위력에 감탄하고, 이후 사절단의 보고를 받은 고종이 전기 설치를 허락함에 따라 조선에서도 전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근대화의 초석으로 경제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말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철도의 건설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출발은 현상학으로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철도가 현재 남아있기 때문에 증명 가능함에 따라 이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서울특별시구로역에서 인천광역시인천역 간의 총 연장 27.0㎞의 복복선철도이다. 많은 이들이 철도를 일본이 만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1896년(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 J. R.)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되었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간 최초의 영업을 개시한 이후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완공시켜 개통되었다. 모스가 시작한 철도는 나중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본국으로부터 자금조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협궤식이 채택되지 않았고 미국과 영국식이 채택 된 것이다. 다 정리되어 진행 되던 철도 사업을 일본이 국유로 1906년에 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참여한 철도 사업은 근대화론과는 별개로 수탈의 역사에서 시작이 된다. 일본이 철도 부설 목적은 한반도내 일본군 전쟁물자동원과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만주지역의 군수보급과 병력수송목적이며, 한반도내 치안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철도사업을 하게 된 주요 동기는 그 어느 것보다 사업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철도나 도로를 개설 하는데 가장 난제가 토지의 수용문제인데 일본은 아무 제약 없이 토지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투자자 모집이 절대적으로 좋은 조건이다 보니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진행 한 것이다. 물론 토지의 보상도 없었지만 조선인 노동자를 적은 비용에 강제로 노역을 시킨 사례들이 많이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일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진행 한 것이다. 즉 그 당시 우리 생활과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수송체계의 발달 이였지만 일본입장에서는 한반도 경영에 효과적인 수송수단이었다. 이 철도 사업도 식민지배 이전인 1905년에 시작이 되었다.
교통수단인 철도가 식민지근대화론에 적용 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교통수단을 예로 들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1898년 조선 황실과 미국의 합작으로 한성 전기 회사가 세워진 후, 전차 부설 공사가 시작되어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처음으로 전차가 운행되었다. 전차는 공중에 설치한 전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지상에 설치된 선로 위를 다니는 차로서 운행하기 위해서는 반듯한 도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도로를 정비하고 전봇대를 세웠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가 아니더라도 필요에 따라 선진문물은 이런 방식으로 들어오는 것인데 사실 철도는 그 당시 우리 생활과는 무관하게 일본의 필요에 따라 들여온 것으로 이것이 근대화론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은 전차 도입의 예로 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식미지 이전에 경제적으로 이미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개방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
근대 도시가 형성되다
개항 이후 많은 외국인이 조선에 건너왔다. 일본이 강제 병탄하기 전에 이미 부산, 인천과 같은 개항장에는 청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이들이 많았다. 당연히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서울에도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살았는데 자본주의 경제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도시형태가 만들어졌다. 근대 도시이다. 어촌이던 부산, 인천, 원산이 이국적 분위기를 풍기는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였고, 전기와 전신, 서양식 병원과 서양식 교회 건물이 자리 잡는 등 서울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근대적 삶을 먼저 누리고 이끈 사람들은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이나 이를 먼저 받아들인 쪽은 왕실과 고위 관리 같은 일부 계층이었다. 신문물 도입으로 기층 세력과 부작용도 있었지만 근대화의 길은 차근히 도시구조에서도 형성되고 있었다. 이국적 모습의 근대 도시는 자본주의와의 만남, 신문물의 도입으로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인민들이 느끼는 시각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변화를 직접 목격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사회, 교육, 문화예술 분야의 근대화
조선의 근대화는 1880년 이후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었는데 학교 외에도 신문사와 서양식 무기 공장, 광혜원과 같은 서양식 병원 등이 세워졌다. 개혁에 따른 많은 반발도 있었지만 개화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머리를 자르는 단발령이 실시되고 의복문화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근대화 사회는 위생적이고 일하기에 편리해 졌으며 군대도 신식 총으로 무장하고 현대 군복을 입고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의 근대화 과정은 사회 전체를 변화 시켰는데 1883년에 이미 원산 학사를 설립하였다. 함경도 덕원·원산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설립한 근대 학교로, 다양한 근대 학문과 무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1886년에 육영 공원은 정부에서 설립한 근대 학교로, 주로 상류층 자제들을 뽑아 어학과 자연 과학, 수학, 지리 등의 근대적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언론 분야에서도 1883년 10월, 정부는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였다. 근대화인 개화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였다. 갑신정변 때 시설이 불타자, 새로운 시설을 마련하여 《한성주보》라는 새 신문을 발행하였다. 첫 신문은 한자로 쓰여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널리 배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문이란 낯선 매체는 낯선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물론, 유교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소개하였다.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신교가 소개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없어지면서 기독교 신앙도 갈수록 확대되었다. 이때가 1880년대 초반이니 식민시대로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이미 이 때 근대화가 시작이 된 것이다.
1880년대 조선은 변화의 시대였다. 유동인구가 많았고, 무역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문물이 소개되었으며, 이는 생활의 변화로 이어졌다. 1882년에 개설된 전신은 이후 서울과 인천, 부산, 의주를 연결하였으며, 1887년에는 전기를 생산하여 궁궐의 밤을 환하게 밝히기도 하였다. 제중원 같은 서양식 병원도 지어져 서양 의료 기술이 보급되었다. 그리고 싸고 질 좋은 옷감이 소개되었으며, 성냥처럼 장안의 화제가 된 상상도 못했던 공산품과 석유도 이미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근대화의 물결이 자리 잡았던 시기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가 된 대한국토의 근대화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와 전혀 무관하게 30년 전인 1880년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통하여 ‘균세와 자강’이라는 화두가 등장 하면서 조선은 변화해 나갔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근대화의 도도한 물결에 올라탔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통한 근대화론은 일본 자금을 받고 그들의 시각에서 용역을 해주었거나 아니면 수탈론을 배제한 개발론적 편집시각을 통해 학문적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소아병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覺永堂 學人
北村 장계황 / 行政學博士
한국역사영토재단 이사장
한러공생위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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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황 박사 ckh05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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