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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쏜살 여행] 강화도 고려왕조 흔적 역사탐방

[쏜살 여행] 강화도 고려왕조 흔적 역사탐방

 

[시사타임즈 = 조동섭(우문현답) 백산문화재단 대표] 우리는 흔히 한민족 5천년 역사를 자랑한다. 한반도에서 명멸했던 제 왕조나 국가들, 왕조는 바뀔지언정 단일한 민족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온 우리의 역사로 삼으며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

 

한반도에 고려왕조는 어떤가. 통일 신라 이후부터 조선왕조 개국 이전 시기, 서기 918년~1392년까지 474년간 왕씨(王氏)가 대를 이어 집권했던 봉건체제 왕조(34대 왕), 우리는 한반도 역사에서 고려왕조의 중요성과 비중을 어떻게 놓고 있을까? 조선왕조에 비해 자긍심이나 자기 역사화 정도가 어떤가. 통일 신라왕조나 고구려왕조에 비해 인식상 자각상의 중요도나 구체성이 어떤가.

 

고려왕조 약 500년 역사에서 약 100년은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지배한 무신정권 시대로 이어졌고 또 약 100년은 몽골제국과 그 후예인 원나라의 간섭이나 지배를 당한 속국의 처지였다. 조상이 왕족이었어도 노비신분이었어도 피로 이어져 온 가족의 역사를 지워버릴순 없다. 나라 역시 식민지 역사도 역사이고 비굴했고 처참했던 역사도 역사다. 역사는 반성하거나 교훈받거나 긍지와 자부심의 발판이 될지언정 슬쩍 찢어 감춰버릴수 없다.

 

한반도 역사체계가 민초들 중심이 아닌 지나치게 왕족왕가 계보를 중심으로 기술되는 역사관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통일왕국 고려국에서 혹시 무신정권의 100년이나 몽골인 지배를 받았던 100년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고려국 역사를 회피하거나 폄훼하거나 수치로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보다 문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병폐의 결과여선 안될뿐더러 그 역사도 고려인 그 당대의 역사이다. 고려국이 조선국이나 통일신라보다 무심하게 평가받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날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남의 나라 중국땅까지 찾아가며 애착을 갖는 고구려 역사에 비해 우리땅에 있는 고려역사는 외면한다면 현재 한반도 고려국은 고구려국은 물론 조선국이나 통일신라국에 비해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5000년 역사라며 자랑스러워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역사 전문가도 아닌 문외한으로서 종종 느낌이다.

 

* 한반도 남쪽지역 남한엔 고려 왕과 왕비의 능 5기가 남아 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북한쪽에 조성되어 있다. 강화도 고려왕릉은 곤릉, 석릉, 가릉, 홍릉 이렇게 4기의 왕과 왕후의 능을 말한다.

나머지 1기의 고려 욍릉은 고양시에 공양왕릉이 있다. (삼척에도 민간설화로 조성된 공양왕릉이 있음)

 

▲초지진 (c)시사타임즈
▲덕진진 (c)시사타임즈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모두 문을 닫았다. 제국주의가 침탈하기 위해 혹은 선진문물을 가지고 새로운 시장에서 교역하고자 다가 올 때도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비장한 전투태세였을 것이다. (c)시사타임즈

 

 

 

곤릉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강종의 모후)의 능이다. 고려 왕조의 수도가 개경(개성)이었기에 왕과 왕비의 능들은 대부분 북한쪽에 조성되어 있다. 남한쪽에는 2명의 왕비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모두 문을 닫았다. 제국주의가 침탈하기 위해 혹은 선진문물을 가지고 새로운 시장에서 교역하고자 다가 올 때도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비장한 전투태세였을 것이다. (c)시사타임즈
▲위 사진 포장로 우측방향 비포장 산길 입구에 곤릉 방향과 거리 표지판을 세워야 마땅하다. 누가 저 길을 곤릉가는 길로 알까. (c)시사타임즈

 

곤릉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지.

집입로를 찾기가 왕조를 건국하기 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왜 이지경일까? 주민들 얘기를 들었다. 문화재청에서 왕릉 주변땅 2천여평을 남겨두고 주변 만여평 이상 땅을 개인에게 매각했다고 한다. 개인은 주택을 짖고자 했으나 문화재 주변이라 허가가 나지 않고, 이에 불만이 있어서 진입로 주변을 사유지 권리를 챙겨 진입로를 차단한 상태라고(사실이라면 접근 진입로 없는 역사 유적지가 가능한가? 유관기관이 책임져야 할 일 아니겠는가?).

 

너무너무 어렵사리 찾아 도착한 왕릉과 주변은 나름 잘 복원해 관리되고 있었으나 진입로 산길 가까이엔 안내표지판 하나 없어 헤매야 했고, 그나마 길은 사유지라 차단되고 또한 구불구불 좁은 산길은 정글처럼 풀이 우거져 독사 뱀이라도 밟을 지경이다. 이 같은 역사문화 유적지관리 행정 실태라면 과연 누가 용기를 내 찾아 길수 있겠는가.

 

석릉

고려 제 21대 왕 희종의 능이다. 인종-의종-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충렬왕,,,젊은 희종은 고려 무신정권에 정면 도전하며 비밀리에 왕권을 되찾고자 당시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을 도모하려 거사했으나 실패했다. 거사 실패로 오히려 왕좌에서 쫒겨나며 강화-교동도에 유배당한다.

 

 

가릉

고려 제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충렬왕의 모후)의 능이다. 위에 곤릉과 함께 남쪽에 조성된 고려 왕비 2개의 능중에 하나이다. 왕자와 공주 아이들을 낳고 16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가릉의 무덤형태가 확연히 드러나 탐방객의 눈길을 끈다. 가릉 바로 위쪽엔 능내리 석실분이 조성되어 있다. (c)시사타임즈

 

가릉 바로 위쪽에는 능내리 석실분이 조성되어 있다. 무덤형태나 규모가 왕릉 이상이고 왕비의 능 위에 조성되어 있으니 왕이나 왕비 지위일텐데 도대체 누구의 무덤일까?

 

▲권세는 어디로 가고 무덤이 무너져 내릴까. 문화재 관리, 하루 빨리 보수의 손길이 가야 할 듯 싶다 (c)시사타임즈

순경태후의 어머니는 무신정권 최고 실세 최우의 딸 최씨이고 아버지는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 추밀원부사 김약선이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최우에 의해 아버지 김약선은 죽게 된다. 최우가 사위인 김약선을 죽이게 된 이유는 딸과 사위가 각각 간통을 벌이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최악의 관계로 악화된 상태에서 딸이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 최우에게 무고를 했다. 김약선이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딸이 현 임금인 원종의 왕비라는 권세를 가졌지만 최고 권력가인 장인 최우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이다. 최우는 후에야 무고였음을 알게 되고 딸은 평생 멀리하였고 사위 김약선에게는 장익공을 추서하며 복권하였다. 당시 왕의 역량과 권력 실세간의 역학관계를 가늠해 볼 사례이다.

 

정제두 묘

정제두는 영조시대 문인 학자다. 조선왕조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 중국(조선도 물론이다)에 주자학 성리학이 지나치게 관념적이면서 탁상공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비판하며 등장한 사상이 양명학이다. 조선에서 실학의 전신이 되는 양명학, 지식과 실천, 지행합일과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양명학을 연구하며 사상적 체계를 집대성한 아주 중요한 인물이 정제두다. 이이나 류성룡, 송시열 그리고 양명학을 적극 배척한 이황보다 정제두가 조선에 일찍 등장해 보다 큰 영향력을 가졌다면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지배이데올로기나 사상체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정제두 묘 (c)시사타임즈

김취려 묘?

문화재청이나 강화군에 묻고 싶다. 도대체 김취려묘는 저기 저 입구에서 얼마나 들어가야 있는 것인가? 왜 표지판에 아무런 표기가 없고 걸어 들어가도 도착이 안되는 것인가? 네이버 지도상에 위치와 그토록 차이가 나는 이유는 네이버측도 들어가 찾는 걸 포기하고 입구만을 표기해 놓은 것은 아닐까? 또 울산시 울주 언양에 있는 김취려장군 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대한민국 역사문화 유적지 관리가 왜 이모양인지.

곤릉은 진입로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진입로 또한 밀림길이고, 홍릉은 주차장에서 500m나 되는 거리임에도 300미터로 표기되어 있고, 석릉은 마지막 안내판에서 150m이상 떨어져 있음애도 30m라고 표기되어 있다. 강화 홍릉 오르는 산길 옆에 지어놓은 건축물은 홍릉 제실일까? 아무런 안내판도 없고 현판도 달려있지 않다. 강화에 김취려묘는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홍릉

고려 제23대 고종의 능이다. 참고로 남양주시에 조성되어 있는 조선(대한제국)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 능도 홍릉이고 고양시 서오릉 내에 조성되어 있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의 능도 홍릉이다.

 

고려국 무인 권력에 의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일찍 죽게 된 왕 강종, 강종의 큰 아들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고종, 고종은 재위 46년 내내 몽골 및 거란과의 전쟁에 시달렸다. 그나마 당시 국정 실세인 최씨 무신정권과 함께 1232년(고종19)년 강화도로 도피 천도한 상태에서 힘겹게 국가를 이끌어 갔다. 불심을 빌어 침략 몽골에 항전한다는 의지로 <팔만대장경>을 판각(1251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1259년 아들 태자(후에 원종)를 몽골에 보내 화친을 추구했으나 실패하고 그해 사망했다.

 

뒤이은 원종은 몽골에 항복하며 몽골군과 합세해 무신권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게 된다. 남은 무신세력 일부는 삼별초로 남아 강화-(대부도)-진도-제주도까지 버티며 항전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자 부마국으로 전락한다. 이후 강화 수도가 1270년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원나라(1271~ 1388년)의 요구로 고려 강화성과 궁을 모두 파괴 해체시키게 되기에 현재 남아있는 강화도 고려유적이 많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홍릉 오르는 산길 옆에 지어놓은 건축물, 홍릉 제실일까? 아무런 안내판도 없고 현판도 달려있지 않다 (c)시사타임즈

시간이 많이 늦어졌지만 서둘러 장정리에 봉은사지 5충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을 마저 보러 갔다. 고려왕조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당시 국가사찰인 봉은사도 함께 강화로 옮겼다. 이 봉은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화 장정리 5층 석탑(봉은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 10호 (c)시사타임즈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 615호 (c)시사타임즈

 

글 : 조동섭(우문현답) 백산문화재단 대표

 

(역임)

- 북경 'B-Space' 대표

- 남북경제협력포럼 대표

- 윤이상평화재단 부이사장

- 중국한국상회 부회장

- 서초구상공회 수석부회장

- 담양세계대나무박람회 조직위 부위원장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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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섭(우문현답) 백산문화재단 대표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