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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3)]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2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3)]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2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우즈베키스탄 IT 훈련원). ⒞시사타임즈

 

2. KOICA 사무소의 업무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부임했던 2002년도는 우리나라의 외환사정 악화로 IMF 구제 금융을 받던 시절로, 협력단 예산이 감소되고 해외사무소 직원도 2명에서 1명으로 감원되어 전임 옥이호 소장이 혼자서 비서 고려인 1명과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특히 말썽 부리는 일부 봉사단원 때문에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다. 그와 한 달 여 동안 합동근무를 하며 모시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민형기 총재를 맞아 방재청에 물자 공여식을 성대히 가졌다. 외무장관과의 면담도 있었고 KOICA의 대학발전에 대한 기여가 인정되어 타쉬켄트 동방대학에서 민 총재에게 명예박사학위 수여식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카리모프 대통령과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떠나기 전날 밤 장훈 대사가 귀가한 다음 총재에게 송구스럽다고 했다. 민 총재는 대통령 면담 주선이 소장 관할이 아니지 않는가?” 하며 관대하게 나왔다.

 

사실 민 총재는 우리 협력단 직원에게 인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만 죽어라 시키고 그 과정에서 혼만 실컷 내는, 칭찬에 인색한 업무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 총재만큼 협력단일에 애착을 갖고 열심히 일하며 실제로 업적을 이룩한 총재가 그때도, 지금도 없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예를 두 가지만 들어 보겠다.

 

▲(민형기 총재 국제협력 글짓기 입상자 시상). ⒞시사타임즈

 

우리 협력단의 자랑스러운 사업인 봉사단 파견사업 중 협력요원 파견 사업이 있다. 요체는 군대에 입대할 자원 중 극히 일부를 선발하여 개도국에서 2년 동안 봉사활동을 마치면 군 대체 복무로 처리해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전임 신기복 총재는 국민 형평의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병무청에서 이 제도를 없애려하자 제대로 대응치 못하고 5년이나 계속된 이 제도가 폐지되었다. 또한 10년 동안 누렸던 협력사업 물품에 대한 비과세 처리 제도를 감사원에 적절히 설명을 못하고 비과세제도까지 폐지되었다. 

 

새로 부임한 민형기 총재는 생각과 행동이 전임 총재와 달랐다. 부임하자마자 그는, 외환위기로 위축된 협력단 사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협력요원사업 부활과 비과세 처리 부활이 긴요하다고 판단하고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재경위원회, 외교부, 재정경제원, 청와대 관계 인사들과 협의하며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국제협력요원은 우리 젊은이들이 열악한 개도국에서 봉사하며 친구들을 만드는 일이니 또 다른 국방이며, 또한 개도국 환경이 군복무만큼 어려우니 특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 협력자재 비과세 처리는 우리나라의 원조규모가 선진국에 비해 턱 없이 적은데다 외환위기로 예산도 대폭 삭감되었는데 거기다가 안 내던 10%의 세금마저 낸다면 협력단 문을 닫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관계자들을 하나씩 설득해 나갔습다. 어려운 일이었으나 마침내 그 많은 관계기관을 모두 설득하고, 6개월 만에 법과 규정을 재정비하여 국제협력요원제도와 협력자재 비과세 제도를 부활시키는 집념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경기고, 서울법대, 하버드 출신의 마당발 최성락 이사의 인맥과 이경수 부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의 철저한 준비가 주효했으나, 이 모두가 민형기 총재의 국제협력에 대한 소명감과 진두지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그날 밤 민형기 총재에게, 우즈베키스탄에 고려인 25만 명이 거주하므로 9개주 각 국립대학에 한국어과를 확충하여 한국어를 활발하게 보급시키고, 지금까지 한 건도 실시하지 않은 프로젝트 사업을 펼치겠으니 본부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해달라고 건의하였고, 민 총재의 지원약속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내친 김에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상기 두 가지 업적을 거론하며 총재가 그동안 일을 열심히 했고 이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생계비에 밑도는 협력단 직원의 급여 및 처우개선과 직원에 대한 외교관 여권발급을 실현 시키는데 역량을 발휘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러자 민 총재는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나를 귀국하자마자 소환시키겠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민 총재가 화내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 이유를 물으려 하자 옆에 있던 조규찬 비서실장, 옥이호 소장과 김동배 서기관이 나를 밖으로 끌어내어 이유를 알려 주었다. 민 총재는 본인이 연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퇴임을 거론한 것이 기분을 크게 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이미 민 총재의 후임으로 김석현 대사가 부임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우즈베키스탄에까지 날아 왔는데 정작 서울에 있는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 총재는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우리 집에서 하기로 했었으나 끝내 오지 않아 아내는 준비하는데 며칠을 헛고생만 한 것이 되었다. 민 총재는 귀국 후 퇴임 이틀 전 까지도 본인이 연임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협력단 총재의 자리도 그러하거늘 대통령의 자리는 인의장막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그러나, 나를 바로 소환시키겠다는 그의 호언은 실행하지 않았다.

 

나는 총재에게 건의 드린 대로 9개 국립대학 대학, 니자미 사범대학, 동방대학, 경제외교대학, 세계 언어대학 등에 한국어과를 확충시키는데 주력하고, 한국어 웅변대회를 매년 개최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 방송국과 겸임국인 타지크스탄의 방송국을 섭외하여 한국어 교육방송을 실시토록 하였다. 물론 방송교재도 우리 사무소에서 제작하여 대학생들에게 배포하고 홍보용 수건도 배포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시청토로 했다.

 

마침내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프로젝트 사업으로 우즈벡 IT 교육훈련원 설비사업을 본부로부터 승인 받고 그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본부에서는 이동현 과장이 출장 와서 사전조사를 철저히 했으며, 이해균 부장이 힘을 보탰다. IT 교육훈련원은 나의 후임인 김동호 소장 때 준공되었으며 우즈벡 컴퓨터 교육에 가장 큰 몫을 하고 있음은 물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우정을 상징하는 사업으로 타쉬켄트 중앙 시청 앞에 자리 잡았다.

 

 

연수생 초청사업으로 나는 우즈벡 중견 공무원을 매년 60명씩 우즈벡 정부로부터 추천받아 한국에 보내 연수받도록 했다. 연수를 다녀온 공무원들은 모두 협력단 직원들의 친절함과 한국의 발전상을 주위에 전파하는 한국 전도사가 되었다. 한국에 다녀온 연수생들을 1년에 한 번씩 전부 초청하여 KOICA 동창회를 개최했다. 2003년도에 200여명이 참가하여 사물놀이, 부채춤, 태권도 등을 공연하여 연수생들의 박수를 받았다. 김성환 대사는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공무원들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반가우며, 여러분들이 한국과 우즈벡의 여러 관계를 발전시키는 가교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고 환영사를 하였다.

 

우리 코이카는 우즈벡 국립농업대학교에 농촌진흥청의 임무상(1939년생) 박사를 1년 동안 파견하여 우즈벡 미작 연구를 지원하였다. 업무상 박사는 동 대학에서 강의하며 코이카의 지원으로 미작 연구 교재를 1,000권 발간하여 대학에 기증했다.

 

대통령실 산하 국가사회연구원에 카리모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김적교(1935년생) 박사를 파견하여 우즈베키스탄의 고위공무원들에게 한국의 경제발전을 강의했다. 국가사회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중앙공무원교육원에 해당되는 기관이다. 김 박사의 강의는 당시 우즈벡 공무원들에게 최고 인기 있는 강의였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김 박사는 KDI 원장과 한양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원로학자로 감성환 대사의 은사이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예탁원의 이진일 부장을 초빙하여 우즈베키스탄 증권거래소 활성화를 지원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재무부는 자본주의의 꽃인 증권거래소가 한국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은 것에 대하여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출장 온 한국예탁원 노훈건 이사장은 나의 활동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2014년에 본인이 운영하는 외국인 초청 교육사업에 나를 강사로 초빙하기도 하였다.

 

 

▲(문성호 한의사). ⒞시사타임즈

 

협력단은 우즈베키스탄 의과대학병원에 한방병원을 1998년도에 건립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한의사 2명과 간호사를 파견하고 한방 의자재를 공급하였다. 한방병원장은 우즈베키스탄 의과대학에서 한의학(韓醫學)을 가르쳐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렸다.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근무할 때는 김현탁 이우혁, 문성호, 김재환 한의사들이 봉사했다. 김현탁 한의사의 활동에 대하여 KBS는 중앙아시아의 허준이라고 특집방송을 했고, 아빠의 봉사활동을 보며 자란 그의 딸은 협력단이 주최한 국제협력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문성호 한의사와 김재환 한의사는 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함은 물론, 특히 문성호 한의사의 침술은 용하다고 소문이 나서 한방병원은 언제나 환자로 넘쳤다. 타쉬켄트를 방문한 강남순 비사벌 전선 사장이 부인 이태옥 선생과 같이 20037월에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강남순 사장이 갑자기 쓰러져서 앰뷸런스에 실려 우즈베키스탄 의과대학 한방병원으로 갔다. 그때 문성호 의사가 응급처치를 하여 위험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문성호 한의사는 연희동에서 대지한의원장으로 6년간 왕성히 활동하다가, 다시 봉사본능이 발동하여, 현재 몽골 한방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몽골 한방병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관심사항으로 내가 2000년도에 유봉하 경희대 한방병원장(이명박 대통령 주치의)과 협력하여 설립한 몽골 유일의 한방병원이다. 김재환 한의사는 고려인 3세 김따냐와 결혼하였다.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크게 아파, 런던으로 후송하여 우리 대사관의 김유철 서기관의 도움으로 런던병원에 급히 입원시켰지만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우리는 그 아들을 화장하여 침간산 자락에 있는 호수에 뿌렸다. 오열하는 김재환 한의사와 따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국에 돌아와 김재환 의사는 인천에서 개업하였고 다시 득남하여 옛일을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당시 40여 명 봉사단원 중에 남자단원 L과 여자단원 C가 서로 깊이 사귀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주위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이 좀 거슬렸는지 나에게 다른 단원들의 불평의 소리가 간간히 들려 왔다. 나는 그때마다 그들에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LC를 대하라고 다독이는 한편, 그 두 단원에게는 봉사단원인 만큼 자유분방보다는 보수적으로 행동하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유럽으로 휴가를 떠난다고 휴가신청서를 나에게 제출했다. 나는 둘만 같이 가는 휴가는 둘이 약혼도 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허가할 수 없으니 따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금지 규정은 없으므로 나의 말은 월권이라며 허가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더니 그들은 대사나 협력단 총재에게 휴가신청서를 직접 제출하겠다고 했다. 나는 총재나 대사가 그러한 것에 대하여 허가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부모의 권한이니 부모의 허락을 받아오면 나도 허락 하겠으나 부모의 허락이 없으면 총재나 대통령이 허가해도 나는 허가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날 밤부터 협력단 인터넷 커뮤니티에 규정을 어기는 소장’, ‘총재도 대통령도 우습게 여기는 독선적인 송소장하는 글을 연일 올렸다. 본부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김 대사는 규정에 명확히 금지 규정이 없고 성인들이니 그냥 휴가를 보내라고 나에게 조언하였다. 나는 대사에게 이것은 규정의 문제가 아니며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가 단원들을 사랑도 하며 감독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년한 딸자식을 2년 동안 열악한 개도국에 봉사 보낼 때, 부모들은 안전과 절도 있는 생활을 원했을 테고, 또한 협력단을 믿고 보냈으니, 3주 동안의 남녀가 둘이 가는 동반 휴가는 부모의 허락이 필수가 아니겠느냐고 대사에게 설명했다. 본부에도 그렇게 설명했다. 마침내 C단원 어머니로부터 허가한다는 전화가 나에게 왔기에 그들의 파리로의 휴가를 기쁜 마음으로 허가했다.

 

S단원을 제외한 단원들 모두가 제 자리에서 열심히 봉사해주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당시에는 외환사정으로 예산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대로 못해주어 미안한 마음이었다. S단원도 한국어교수로서 실력이 좋고 열의도 있어 본연의 봉사업무는 잘 수행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사무소 업무에 관심을 갖고 어떤 경우는 참견을 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를 때에는 심한 불평을 하며 인터넷에 불평의 글을 심하게 올렸다. 바로 이 단원 때문에 전임 옥이호 소장이 맘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사무소 업무 관여가 정도에 지나쳐 본부에 보고하자, 본부에서 조사 후 부득이 경고조처를 내렸다. S는 임기 만료 후 청와대, 국회, 외교부에 나를 비방하는 호소문을 제출하여 1인 사무소로 바쁜 가운데 나는, 이를 해명하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부의 김은숙 과장이 출장 와서 보건부 차관과 면담하여 한방병원의 의료기관 지정과 우리 간호 분야 봉사단원의 배치문제를 원활하게 처리했다. 또한 당시문제가 되었던 우즈벡 국가대표 태권도 감독을 맡았던 P사범의 복무문제를 말끔히 처리하여 그로 하여금 본연의 봉사활동에 전념토록 하였다.

 

나는 언젠가 나와 같이 근무했던 모든 단원을 초청하여 34일 정도 함께 생활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은 소원이 있다. 말썽부렸던 LC, 청와대까지 글로 제출하여 나를 비방했던 S도 포함해서다. 물론 그때 같이 고생 했던 박근우 태권도사범, 김현탁 한의사, 농업대학교의 업무상 농업박사, 대통령실 연구소의 김적교 경제학 박사, 예탁원의 이진일부장도 모시고서 말이다. 그런데, 2백 명 정도는 될 텐데 가능할까?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계속)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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