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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고통엔 뜻이 있습니다

[엄무환 칼럼] 고통엔 뜻이 있습니다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살아가다보면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지만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해되지 않는 그 고통 때문에 삶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고통의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성경을 잠시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부인하는 분들에겐 성경 이야기가 낯설거나 감정이 상하거나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삶의 좌표가 되고 인생의 길잡이가 되며, 그 성경을 통해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고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겐 성경만큼 삶의 도움이 되는 책도 없습니다.

 

사실 성경을 몰라서 그렇지 성경은 우리 인생의 그 어떤 문제도 빠트리지 않고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삶에 적용한다면 우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에 있어서 승리의 인생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과연 그 원인과 해답은 무엇일까요. 육체적 고통이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되겠지만 그러나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이유모를 삶의 고통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만난 분들과 그렇지 못한 분들의 경우가 각각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의 경우엔 어떤 이유이든 원인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해야 하구요. 이것은 분명한 기본 진리입니다.

 

예전에 매주 무속인들을 찾아가 왜 무속인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만난 대부분의 무속인들은 자기가 원해서 무속인이 되기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어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무속인을 찾아갔다가 신을 모셔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신 내림굿을 하여 무속인이 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신내림굿을 하자 고통이 사라졌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은 세월동안 무속인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무속인 중에 예수님을 믿어 무속인의 세계에서 벗어난 분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고통이 해결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도 고통을 당하더라. 그건 뭐냐”고 따질 분들이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 예수 믿는 사람들도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이것에 대해선 다시 두 가지 면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는 죄로 인한 고통이고, 또 하나는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죄로 인한 고통의 경우엔 회개하면 해결됩니다. 회개만이 답입니다. 하지만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통의 경우엔 정말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 고통의 문제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즉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통의 경우 말입니다. 이런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제가 찾은 성공적 사례는 한나라는 한 여인의 사례입니다.

 

성경은 한나라는 여인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장에 보면 그녀의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이를 못 낳을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뭐 그리 야단이냐’는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혹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본 사람들은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 것입니다. 더욱이 한나라는 이 여인은 남편의 정실부인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인해 남편의 또 다른 후처로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후처인 브닌나는 아이를 낳았기 때문입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적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브닌나라는 후처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여 정실부인인 한나에게 아이 못낳는다고 갑질을 해댄 겁니다. 그냥 가만두어도 은근한 시선으로 인해 심적 고통이 클텐데 말이나 행동 등으로 갑질을 해대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 아닌 겁니다.

 

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남편이 브닌나보다 한나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남편한테 얘기하여 브닌나를 집에서 쫓아내라고 할까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경우엔 그렇게 했습니다. 하갈이라는 첩이 아들을 낳아 유세를 떨자 사라가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의 갑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심적인 고통이 클 수밖에요. 사실 이 점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문제를 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오히려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그 문제의 원인을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 문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남편이 한나를 브닌나보다 더 사랑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했다. 그러니 원인 제공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이게 이해가 됩니까. 아니 왜 하나님께서 한 여인의 삶에 이처럼 고통을 허락하신다 말입니까. 무슨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 다 계십니까. 당신의 신실한 백성의 삶에 고통이나 주는 이런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고도 남지요.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이런 못된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에게 가져야할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런 시비나 원망어린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한나의 경우에 한번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 왜 저로 하여금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신 겁니까?” 우린 이미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 이유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한나는 이런 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속이 답답했겠습니까. 같은 남편인데 브닌나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것이지요. 원인은 한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집에서나 사회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진짜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가 중요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마음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한나가 고통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갖고 나아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할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심적인 고통이 클 때 가져야할 삶의 태도는 그 문제를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토설하라는 겁니다. 오직 해답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과제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나 경제적인 것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할 첫 번째 자세는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자세는 하나님께서 왜 이 문제를 나에게 허락하셨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자세에 대해 가장 모범을 보여준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보면서 하나님에게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포를 행하고 패역을 일삼고 있는데 하나님 왜 가만히 보고 계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침묵하시는 겁니까.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했건만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고 마치 항변조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런 응답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갈대아 사람이란 바벨론 군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놀라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크다는 것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군대의 죄는 더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저들을 통해 심판하시겠다는 겁니까 하나님. 그러면서 하박국 선지자는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겁니다. 이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이런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드리고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무슨 대답을 하실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리하자면,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났을 때 첫째,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즉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라, 둘째, 하나님에게 나의 마음 그대로 토설하고 왜 이런 문제를 허락하셨는지 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그런데 한나의 경우엔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고 하기 보다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에게 아뢰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이 서원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통엔 뜻이 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 한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삶에 주어진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의미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과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럼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에게 드린 한나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어졌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그러니 브닌나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나에게 그렇게 잘난 체 하더니 완전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가 된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통엔 뜻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고통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면 그 고통은 매우 의미있는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왜 나에게 십자가 짐 같은 고통을 주셨느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를 잘 지시면 부활이라는 영광의 새 아침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면 그건 저주의 인생이 아니라 축복의 인생입니다. 이 사실을 안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자의 밥이 되었어도 찬송을 부르며 믿음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250년간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에서 살아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고통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라, 하나님의 뜻을 물어라’는 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자 21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인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 때는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고통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고통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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