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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 욕심쟁이와 하나님을 만난 사람

[엄무환 칼럼 ] 욕심쟁이와 하나님을 만난 사람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기자]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후폭풍이 무서워서입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죄를 인정할 경우 자기가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요 그 죄로 인한 후폭풍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짓는 발걸음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삶까지 내포합니다.

 

죄는 반드시 인간의 삶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의 최대 관건은 죄 문제 해결입니다. 기억할 것은 사람들이 인정하든 안하든 죄가 죄를 낳고 심판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 호흡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멈출 때까지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 땅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를 들추면 오히려 감추려고 합니다. 스스로 자수하여 광명 찾는 사람을 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그래도 자기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지적당하면 인정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반대 경향을 보입니다. 인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죄인이라는 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 죄의 출발지점이 욕심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욕심쟁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위를 보면 전부 욕심쟁이들입니다. 얼마나 욕심쟁이냐 하면 지금 가진 것만 해도 평생 쓰고 남을 터인데 그것도 부족하다고 얼마나 욕심을 부리는지 참으로 가관입니다. 죽으면 어느 것 하나 갖고 갈 수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욕심을 부립니다. 그야말로 욕심의 노예요 화신(化身)입니다.

 

왜 노사문제로 날 새는 줄 모르고 허구한 날 싸웁니까. 서로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왜 국회에서 국민들이 손가락질을 해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웁니까. 역시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하다못해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탕을 뺏어도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 뿐만 아니라 네 주머니에 있는 것까지 내가 가져야겠다, 이거 아닙니까. 욕심에 찌든 우리의 자화상(自畵像)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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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욕심, 권력 욕심, 명예 욕심 등이 사람을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중독의 늪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부부를, 부모자녀를 죽음으로 내 몰고 있습니다. ‘욕심이 사망의 뿌리라는 성경의 지적을 증명하는 산 증거들입니다.

 

이 욕심이 잉태한 중요한 죽음의 문화가 하나 있습니다. 동성애 문화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동성애 문화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죽음의 문화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에 상응한 보응이 따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 이 욕망의 늪에서, 죄와 사망의 문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느냐는 것입니다. 그 해답이 신약성경 요한복음 4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내용 말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눈 대화 내용 중 한 대목입니다.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 질문은 한 여인의 드러내기 부끄러운 삶의 치부를 건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없나이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우크 에코인데 에코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결혼이나 우정, 의무, , 계약 등의 결속에 의해 타인과 유대 관계를 맺는 자들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 고백은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이 법적으로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 행위이며, 다른 남자의 정부(情夫)가 된다는 것은 음행에 해당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로 보건대 이 여인은 다섯 번 결혼하여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나 현재 같이 사는 남자는 법적인 남편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마리아 여인은 현재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정한 여인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직시하시고 여인의 정곡을 정확하게 찌르신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처럼 여인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려오라는 단호하고도 핵심을 찌르는 명령을 통해 여인의 삶을 건드리십니다. 즉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실체를 보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를 부끄럽게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실체를 인식하여 회개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눈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인 실체를 인식하게 하여 회개하도록 만드신 것 말입니다.

 

 

구원, 영생은 회개의 문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오심은 나의 영적 실체를 보게 하사 회개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기독교인은 내가 원하는 땅의 것을 얻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심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 만남의 증거가 바로 내 죄가 인지되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여인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네가 이 참된 것을 말하였다입니다. 한글 성경은 동사를 명사로 번역하여 네 말이옳도다라고 하였지만 원어 성경은 네 말이도다로 번역된 에이레카스2인칭 단수 능동태 완료형으로 네가 이미 말하였도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여인이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였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 지금의 남편도 법적인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과 자신의 부도덕한 삶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구원을 받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이 없으면 하나님의 긍휼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다윗은 부하 장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적받자 침상이 젖을 정도로 통회자복하며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하나님이 구하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 즉 통회자복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예배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그 죄로 인해 통회자복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나의 허물과 죄를 비추시기 시작합니다.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내 죄가 비추어질 때 이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에겐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내 안의 욕심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사도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그러므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죄를 보며 회개의 삶을 살아갑니다. 욕심과의 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은 욕심의 노예와 화신으로 살아갑니다. 도무지 회개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생명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욕심쟁이만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무리 욕심쟁이라도 생명이 있는 교회라면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욕심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셨듯이 한국교회에도 찾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욕심쟁이들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변화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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