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플레로마와 세상을 뒤엎는 자

[엄무환 칼럼] 플레로마와 세상을 뒤엎는 자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신약성경 요한복음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 ‘충만’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플레로마’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요한복음 1장 14절의 ’충만하더라‘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런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예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면, 여기선 예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차고 넘쳐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충만’과 관련하여 잠시 살펴볼 내용이 있다. 2세기의 기독교 문헌으로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헤르마스 목자서」라는 책에 나오는 충만이 그것이다. 신약의 정경이 아닌 외경인 이 책에 ‘충만함’에 대하여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범신론적 사상으로 당시에 나타났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에 홍수처럼 밀려와 교회를 위협한 아주 위험한 이단사상으로, 로마 제국의 모든 지적인 교회가 현격하게 영지주의에 오염될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2:22과 4:2절 및 3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를 뜻하는 영어 ‘Gnosticism’(그노스티시즘)은 ‘지식’을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에서 유래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비법’, 즉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영적’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최고 신(最高神)의 빛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혼적’(魂的)인 사람들로서 신앙 이상의 것은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선지자들이나 기타 선한 히브리인들이 이 계급에 속하지만, 그들은 ‘영지’(靈知)를 가지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세계에는 가지 못하고 그보다 못한 세계에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물질적’(物質的, 즉 물질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끝없이 사단과 자신의 욕망에 얽매여 살기 때문에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종국은 완전한 멸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제한된 소수의 어떤 특정 계급만이 권세를 누리고 인류의 대다수가 구원을 받을 수 없어 파멸에 이른다는 이러한 주장이 영지주의의 가장 나쁜 사상의 하나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위배되는 이단사상이다.

 

영지주의에 몇 개의 종파들이 있는데 모든 종파들은 한결같이 물질이란 영원토록 온전히 악하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 곧 유대인의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고, 소위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부르는 매우 열등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최고의 존재 곧 절대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알려져 있지도 아니하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한다. 그는 세상에서 무한히 떨어져 계시고, 신적 충만인 ‘플레로마’의 신령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부토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이 순수한 존재로부터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하는 물질세계가 형성되었느냐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님이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 물리쳤다. 그렇기에 ‘충만’이라는 이 단어가 그 시대에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바울 사도 역시 골로새서 1장 19절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3장 8절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이 자신에게 부어져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라고 증언한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 거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안에 거하신 충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은사로 전해진다. 그 충만이 오늘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여기 ‘~위에’라는 말은 헬라어 ‘안티’로 ‘~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 대신에’ 또는 ‘~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11장 11절이 대표적이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 나오는 ‘대신에’(영어로 instead, NIV)가 헬라어로 ‘안티’이다.

 

이 단어엔 두 가지 독특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대체’의 개념이며, 다른 하나는 ‘축적’의 개념이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은 ‘은혜 대신에 은혜’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는 ‘한 번 은혜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공동번역성경은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고 번역하고 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넘쳐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은혜가 고갈되지 아니하고 날마다 끊임없이 부어지는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우린 사릌스(육체)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즉 우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충만을 계속 받지 않으면 내 안의 사릌스로 인해 세상과 짝하려는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릌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힘, 그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 밖에 없다. 그 충만이 계속해서 매일 나에게 부어져야 한다. 그것이 ‘은혜 위에 은혜’이다. 이 은혜 위에 은혜를 받도록 허락받은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신 그 충만이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자녀들 안에 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충만은 어제 받았다고 하여 오늘 안받아도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매일 받아야 한다. 아침식사를 했어도 점심이 되면 배가 고파 점심을 먹듯 매일 매순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충만을 계속 공급받아야 한다. 이것이 은혜 위에 은혜이다.

 

예수님도 사릌스의 한계 안에 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이 예수님 안에 거하심으로 마침내 인류를 향한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온전히 이루셨다. 이를 위해 예수님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가지셨다.

 

바울사도도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여러 번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배고픔을 겪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이 계속 부어져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이 사실을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이런 권면을 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나님의 자녀들이 체험하는 은혜의 경험은 점진적이고 무한하며 그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 충만함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날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충만함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나오면 그 순간 예수님 안에 거하는 충만함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내 안에 있는 사릌스의 본성이 되살아나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한 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진 충만함으로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종들이 나중에 세상 유혹에 무릎 꿇은 나머지 손가락질을 받는 존재로 전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이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사울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하는 것은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다. 단 한순간도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충만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릌스의 유혹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이런 권면을 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날마다 내 영혼을 말씀과 기도로 깨워야 한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기 위해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당한다. 영적방심은 내 영혼을 마귀의 밥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매일 예수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내 생각, 내 마음의 중심이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만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이 내 안에 부어진다. 그렇기에 회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죄가 있으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그 순간부터 내 영혼은 매마를 수밖에 없다. 마귀가 이런 나의 영적상태를 더 일찍 발견하고 나에게 빠른 속도로 대시한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걸려들면 당한다. 그래서 매일 깨어 있어야 한다. 하시라도 예수님과의 교제를 놓쳐선 안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다. 마귀의 밥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사릌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마귀가 공격할 때 재빨리 내가 할 일은 예수님 품안으로 쏘옥 들어가는 일이다. 그것이 회개이다.

 

그런데 회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보게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령에 민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일 삶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 하나라도 간과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적하는 한 마디 말이라도 건성으로 듣지 않는다. 그 속에 내가 회개해야할 것들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을 수밖에 없어서다.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운 마음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잃어선 안된다. 그 누구든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그 순간 마귀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릌스의 근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됨이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충만이 있다. 이 충만이 부어져야만 사릌스의 근성을 이길 수 있다. 승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만 주어지는 은혜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일순간이라도 내 생각과 내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한다.

 

내가 사릌스의 후예라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밖에 없다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충만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 사릌스의 한계를 뛰어넘어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만이 하실 일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을 거꾸로 뒤엎는 자’라고.

    

 

▶[엄무환 이전 칼럼] 카이캄과 5만원
http://www.timesisa.com/m/content/view.html?section=112&category=134&no=18908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www.timesisa.com>
 

엄무환 국장 hwan2778@timesi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