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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00)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00)

혜초 선배의 향기 서린 땅 간쑤성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그 구름 편에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서쪽 끝에 있네

따뜻한 남쪽 나라에는 기러기 오지 않으니 누가 계림으로 가 내 소식을 전할까?”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 시는 혜초 선배가 남천축국에 있는 산속 절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서 쓴 왕오천축국전에서 남긴 5개의 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시가 아니다. 이 시에 있는 ‘계림’이라는 단어가 먼 옛날 먼 곳에서 보낸 주인 없는 편지의 수신자 주소가 되어 그의 사후 1300여 년이 지난 후 한국 국민에게 안타깝게도 내용만 전달되었다. 편지 원본은 편지를 주운 자가 보관하겠다고 한다. 신라의 또 다른 명칭이 계림이라는 것은 멀리 인도에까지 알려져 있었고 애절한 향수를 담은 시를 읊은 혜초는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누가 계림으로 가 내 소식을 전할까?”라고 자신의 고향을 계림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신라임이라고 밝혔다. 이 시가 그의 사후 그의 국적을 찾아주었고 나와 우리 국민의 가슴 속에 부활하여 혜초라는 대선배를 가진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

 

돌아보니 굽이굽이 넘어온 산과 사막과 강이 많기도 했다. 어떤 곳은 그래도 넘을 만했고 어떤 곳은 가슴이 턱턱 막히도록 막막하고 심장이 터질 듯 고통스럽기도 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비바람 추위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고 어둠 속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달리면서 논어를 읽는 것보다 칸트를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사유를 하게 된다.

 

간쑤성의 첫 도시 과조우에 들어왔는데 같은 중국이라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아직도 거친 사막이 끝난 건 아니지만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신장웨이우얼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호텔 입구에 들어갈 때 비행기 타고 출국할 때와 같은 검문도 사라지고 자동차 주유소나 공원의 철조망도 없다. 무장한 경찰특공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조금 답답하던 가슴이 펴진다. 나도 이제 드넓은 중국의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중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곳은 오랜 시간 흉노의 땅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악몽이었던 그들은 서북쪽 중국과 몽골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고대 국가였다. 이들의 민족은 다양하였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주도세력은 바뀌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 모든 민족을 흉노라 불렀다. 진시황도 이들이 두려워 만리장성을 쌓았고 그의 사후 어지러워진 중국에서 천하를 덮을 기세를 자랑하던 항우마저도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 한나라 고조마저도 무릎 꿇린 것이 흉노의 선우 묵특이었다. 고대 중국역사에서 흉노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흉노의 움직임에 따라 중국의 역사는 요동을 쳐야만 했다.

 

서흉노가 한나라의 공격과 내분으로 망하고 우랄산맥 너머로 도망치는 기원전 36년에 유럽에는 악몽이 시작된다. 그들은 슬라브족을 노에처럼 부리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켜 로마제국이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흉노의 대규모 이동은 3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흉노는 유럽에 도착해서 선주민인 게르만족을 무자비하게 두들겼다. 게르만족도 이 동네에서는 나름 먹어주는 야만족이었으나 당시 세계 최강 중국과의 전투에서 갈고 닦은 흉노를 당할 수는 없었다. 말의 등자는 당시의 최첨단 무기였다. 등자를 밟고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흉노는 유럽인들에게 지옥에서 온 사자 같았을 것이다.

 

흉노의 이동은 유럽에 엄청난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현대 유럽의 국가들의 민족 구성과 국경선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이 이때이고 이때 고대에서 중세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헝가리는 훈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훈족과 마자르족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며 헝가리는 자기들의 조상이 흉노라고 학교에서 가르친다. 터키와 투르크메니스탄, 몽골도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한다.

 

1954년 산시성 시안 궈자탄이라는 마을에서 비석하나가 발견되었다. 864년 5월 29일 향년 32살로 사망한 당나라 거주 신라인 대당고심씨부인의 묘지명이다. 그리고 문무대왕의 능 비문에는 그의 선조라고 밝힌 김일제의 고향이 武威(무위)라고 말하고 있다. 문무대왕의 능 비문의 기록이 맞는다면, 그 선조의 原籍(원적)은 간쑤성인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광개토대왕의 활동무대가 이곳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바로 이곳 간쑤성 장량현 사람으로 이곳에서 불리지를 만나 결혼하여 주몽을 낳았다. 우리 민족의 시원의 발자취가 이곳에도 어려있는 것이다.

 

우리 상고시대의 앞마당이었을 이 땅을 달리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기 그지없다. 이제 무력으로 옛 고토를 회복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쳐 창의력을 발휘하고 평화의 불길을 온 세상에 확장시켜나가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활동영역을 넓게 펼쳐 문화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제 고운 흙가루가 풍화 퇴적된 그 유명한 중국의 황토고원에 들어섰다. 황토의 산봉우리들은 낮지만 이곳은 이미 해발 1500m에서 2000m에 이르는 고원지대이다. 이 황토는 비가 내리면 부드러운 지질 탓에 침식과 하천에 의한 토사 유출이 엄청나다고 한다. 한 번 패인 곳은 다음 비에 더욱 패여 마른 계곡이 날카롭게 패였다. 식물은 거의 자라지 못하고 겨우내 얼었던 고운 흙이 봄에 녹으면서 편서풍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 일본, 심지어 북아메리카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봄만 되면 곤혹을 치루는 황사(黃砂)이다. 황하는 이 황토고원을 휘감고 돌면서 황토의 퇴적물로 주위를 범람시키기도 하며 황해로 흘러들어 바다마저도 누렇게 물들여서 황해가 된 것이다.

 

간쑤성, 이제 정말 우리의 앞마당 같은 기분이 든다. 혜초 선배의 향기가 서린 땅이다. 어린 나이에 먼 길을 떠나 지금 내가 감내하는 고통과 인내로는 비교도 하기 힘든 고초를 헤쳐 나갔을 그의 담대함을 이곳에서 만난다. 그가 뼈에 사무치게 꿈꾸었던 평화로운 세상을 바람결에 만난다. 소설 ‘혜초’에서 작가 김탁한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그래서 같은 지역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있었으리란 상상만으로 고선지 장군과 혜초의 만남을 설정하면서 우리 민족의 활동이 그토록 광활했음을 보여준다.

 

혜초는 704년 신라에서 태어나 16세의 나이에 지금의 평택에서 바랑을 하나 둘러멘 채 중국의 광저우로 건너간다. 당시 신라는 20세 전후의 남자 중에서 잘생기고 말 잘하는 사람을 화랑으로 선발하여 명산과 대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게 하였다. 그중에서도 다시 선발하여 원행(遠行: 세계 여행)을 명하였다. 세계 여행의 먼 길을 떠나는 원행은 천부도의 수신(修身)이며 옛 고조선 삼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제도이었다. 당시 신라인들은 당나라에 유학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는 입당하여 인도에서 온 밀교승 금강지를 사사하였다. 구법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승려들은 대부분 국사(國師)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세상을 주유하며 다니는 것만큼 젊은이들에게 산교육이 없다는 것을 당시 신라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스님들을 포함한 많은 젊은이가 당나라로 유학을 오게 된다. 소설 ‘혜초’에서 한 구절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저는 머물러 경전을 파기보다 그 경전이 만들어진 자리를 손과 발과 몸으로 만지고 싶었습니다. 언어가 지닌 미망(迷妄)을 걷어내고 깨달음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깨달음의 자리에 있는 날!”

 

혜초가 바닷길로 인도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중앙아시아를 지나 간쑤에 도착한 것은 727년이었다. 신라의 승려이자 모험가이며 이 땅에 평화의 구원을 이루고자 했던 혜초는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그의 꿈과 함께 1300여 년간 묻혔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신비 속에 감추고 긴 지구여행을 마쳤지만 1908년 프랑스인 동양학자 폴 펠리오에 의해서 중국 간쑤성의 둔황 17굴, 61굴에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 극적으로 부활한 인물이다.

 

그는 분명 위대한 탐험가였으며 고승이며 또한 최고의 여행작가였다. 그는 문명 교류사에 또렷한 발자취를 남긴 개척자이고 선구자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식국(아랍)에 다녀왔으며 견문록을 통해 지구 반대편인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과 중앙아시아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다른 지구의 반대편에 전해주었다. 8세기 초는 이슬람제국이 흥성하여 서쪽 유라시아의 유일 초강대국이었고 당나라는 동쪽 유라시아의 초강대국이었다. 이 양대 강국의 접촉은 양대 문명의 접촉이고 동서교류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이 청년의 족적은 동서문명 교류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둔황이야말로 이번 여정에서 꼭 지나고픈 곳이었다. 둔황에 가면 아직도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신비가 나에게만 다가올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전에 KBS에서 방영된 ‘실크로드’ 연작 시리즈로부터 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펼쳐진 사구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타행렬이 화면에 보이고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기타로의 장엄하고 정신 몽롱하게 하는 생경한 악기 소리에 신시사이저 선율이 흐를 때면 나는 아련하게 눈을 감고 먼 나라를 꿈꾸었다. 어느 순간 내 영혼은 몸에서 빠져 나와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굴에 가부좌를 틀고 끝없는 명상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발견될 당시 두루마리 필사본은 제목은 물론 작가의 이름조차 낡아 떨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다 7년 후 왕오천축국전에 혜초가 신라 사람이라고 밝힌 사람은 일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였다. 이 시에 나타난 계림에 그는 주목했다. 혜초는 지금 중국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일대일로의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1400여 년 전에 이미 모두 거쳐서 생존한 유일한 인물이다.

 

혜초는 장안에 다시 돌아온 후 다시 스승 금강지와 함께 밀교 경전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787년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나의 생각은 ‘그는 왜 귀국을 하지 않고 이곳에서 입적했을까?’란 의문으로 변한다. 혜초가 귀국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안타까워진다. 그가 귀국해서 젊은 화랑들에게 그가 듣고 보고 만난 사람들과 아름답고 넓은 세상과, 역경과 공포와 눈물을 뻥을 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당시 우리 젊은이들은 더 많은 꿈을 크게 꾸었을 텐데! 그러면 그 피 끓는 젊은이들이 한반도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을 텐데!

 

그는 거친 파도가 그르렁거리는 바다를 건너고 사막의 뜨거운 햇살과 파미르의 혹한의 추위를 넘는다. 밀려오는 고독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도적 떼는 물리치고 서역 여인의 참을 수 없는 유혹은 뿌리치면서 바다 건너엔 무엇이 있을까? 아득한 설산 너머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허기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났다. 그 호기심의 두레로 들어 올린 시원한 추억과 경험을 ‘왕오천축국전’에 오롯이 담았다. 거기에 꿈꾸는 자의 갈망,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 더 나은 미래의 청사진을 담았다. 그는 구도승이기 이전에 나에게 모험의 선배였고 꿈과 영감을 가져다준 선지자이었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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