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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역사의 변곡점,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칼럼] 역사의 변곡점,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시사타임즈 = 장계황 박사] 역사를 살펴보면 그 시대상황 속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많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지만, 그 당시 만약 이렇게 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볼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만약’이라는 상황이 가장 안타까운 시대현상을 필자는 소현세자 독살(?)사건으로 본다. 우리역사에서 시대의 변곡점이 될 수 있었던 사건으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영토학자 장계황 박사(한국역사영토제단 이사장) (사진자료 = 시사타임즈 DB) (c)시사타임즈

시대 상황

 

광해가 망해가는 명을 적극적으로 대하지 않고 신흥세력인 후금과 가까이 하는 등거리외교를 펼치자 명에 사대하던 신하들에 의해 반정을 일으키고 반정에 의해 왕에 오른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삼전도의 굴욕을 맞이한다.

 

그 당시의 조선은 명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식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으나, 명은 지는 해이고 만주족이 세운 후금은 떠오르는 해로서 1636년 국호를 청으로 하여 제대로 국가 형태의 틀을 갖춘다. 청과 조선은 1627년 정묘호란을 통해 형제관계를 맺고 유지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청과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나 이에 인조는 항거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벌어지는데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맞이하여 인조는 청의 왕 앞에 나가서 삼배를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찢는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 의식을 행하고 청은 인조의 두형제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심양으로 데리고 감으로서 마무리 된다.

  

소현세자

 

비운의 세자인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사실 상 외교 창구 역할을 한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였으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으로 청과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외교술이 능한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국가 주요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는 1637년 4월에 심양에 도착하는데 이때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함께하여 약 200여명이 있다 보니 세자와 함께 작은 조정의 역할과 기능을 했다. 심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審館)에서 생활했는데, 심관은 양국 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기능을 했고 이를 소현세자가 맡아서 처리 했는데 업무 능력이 뛰어나서 청의 신뢰를 받았다.

 

청이 명을 제압하고 마침 북경을 점령 하는데, 청 황제는 소현세자를 함께 북경으로 데리고 간다. 소현세자의 북경 생활은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아담 샬과의 만남

 

북경에 머무는 동안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으며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담샬과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되는데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통한 새로운 세상을 계획한다.

 

▲독일출신의 예수회 소속 아담 샬은 선교사이자 천물학자였으며 소현세자에게 서양문물을 전파했으며 천주에 대한 사상을 심어 주었다. (사진출처 = 역사저널 그날 방송 캡처) (c)시사타임즈

아담 샬은 중국 포교 1세대인 마테오리치의 뒤를 이어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가톨릭 포교활동에 힘쓰며 천문·역법에도 밝아 월식(月蝕)을 예측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었다. 명나라 말에 북방의 청에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으나, 명이 망하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담 샬의 지위로 인해 소현세자는 천주당과 문연각에서 그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조선이 일찍 서구문물을 통한 개혁을 하는 최절정 시기였던 것이다.

 

소현세자에게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 받은 선물은 천주상·지구의·천문서 등이었다. 소현세자는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천주교가 국교가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천주당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조선 최고의 비극 – 소현세자의 죽음

 

8년간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었고 고양의 소경원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인조 23년 6월 27일).

 

명을 섬기는 세도가의 반정에 의해 자신과 무관하게 왕이 된 인조는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청과 가까워 질수 없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을 경작해서 생산된 곡식을 서양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 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증은 없지만 당시 상황과 심증 적으로는 독살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사대부가에서는 명을 멀리하고 청과 가까운 소현세자가 반가울리 없다보니 독살에 심증이 가는 것이다.

 

인조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은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를 한 기억이 있는데 세자인 소현은 청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권력의 속성상 죽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 상황은 인조를 왕으로 만든 사대부들이 모두 숭명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보니 청과 가까운 소현세자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엿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은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장손인 세손(世孫) 이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하나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아 훗날 제17대왕인 효종으로 등극한다. 당시 영의정 김류 등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는데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고, 이듬해인 1646년에는 소용 조 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 씨도 죽이고 다음해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조가 소현세자의 세자빈과 자식들에게도 무자비하게 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인조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역사의 변곡점을 바라는 조선사회의 비극이었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 후기사회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근대사는 암울한 시기였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성리·주자학에 얽매여 실리는 팽개치고 명분 싸움만 한 것이 불행한 역사를 만들어 낸 직접적 원인이다. 다시 말해 근대화가 늦었다는 것이고 세계정세가 돌아가는 판을 읽지 못하여 사대사상을 중심으로 한 성리·주자학의 명분 정치가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비교적 동아시아에서 일찍 개화를 한 나라인데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보다 219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이미 소현세자는 서학을 인정하고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드리기로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67년 대정봉환이 이루어져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이듬해인 1868에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방사회로 나가는데 이 시기의 개방이 오늘날 일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메이지 유신보다 219년이나 앞선 시기의 소현세자 죽음은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 역사 흐름을 바꾸어 놓은 큰 사건이다. 역사의 주요한 변곡점으로 조선이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셈이고 또한 서학이라는 다양한 학문과 철학 등 정신세계를 자연스레 받아들임으로서 성리·주자학에 매몰되어 한계를 보인 조선 후기 사회에 영향을 많이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청나라의 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청과 가까운 소현세자의 왕위 등극은 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동아시아를 지배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심양에서 북경으로 이전을 감행 할 당시 인구가 적은 만주족의 한계로 인하여 유조변 인근을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봉금지대를 설치하는데 이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이 가능하여 영토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당시까지도 조선사회는 명나라를 황제의 국가로 모시면서 조선의 임금이나 신하 모두 명나라 황제 입장에서는 같은 신하라는 명분으로 왕권을 약화 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조선 후기 사회는 몰락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서구의 문물뿐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받아들이는 개방과 개혁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覺永堂 學人

靑島 장계황 / 行政學博士

 

한국역사영토제단 이사장

한러공생위원회 대표

대한민국ROTC 중앙회 통일복지위원장

사단법인 ROTC 통일정신문화원 이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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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황 박사 ckh050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