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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57)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57)
캐러반사라이에서 만나는 김구 선생의 꿈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어제 우리가 찾아낸 호텔의 이름은 캐러번사라이이다. 그 옛날 캐러번들이 묵어가던 캐러번사라이와 연관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옛날 그 캐러번들이 지나다니던 그 길에서 만난 그 이름만으로 감격스러웠다. 사라이는 터키어로 궁전이니 그야말로 대상들의 궁전인 셈이다. 캐러번사라이에서는 캐러번들을 왕처럼 대접하며 철저히 보호해주었다. 도적들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담도 높이 쌓고, 좋은 음식과 휴식을 취하도록 스파도 있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실크로드는 하나의 길이 아니다. 실크로 대변되는 문화가 동서로 오고가며 인류 역사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동맥과 같은 길이다. 그 길이 지금은 사상과 이념, 국가이익이라는 장벽에 막혀서 동맥경화에 걸려있는 것이다. ‘간자’는 아제르바이잔의 제 2의 도시이다. 일정상 이 나라의 수도 바쿠를 통과하지 않으니 간자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내가 만나는 가장 큰 도시이다.

 

사실 ‘간자’는 엊그제 이미 지나간 곳이다. 그 간자를 지나서 한참 가다가 엊그제는 호텔을 찾아다니다 노인 요양원 같은 데서 잤는데 어제는 지도상에는 ‘예블락’이라는 도시에 호텔이 여러 개 표시되어있었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모두 영업을 하지 않아 한참 헤매고 다니다 할 수 없이 다시 향한 것이 간자이다. 숙소를 못 찾고 헤매고 돌아다닐 때 몰려오는 피로감은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아제르바이잔의 내륙은 거칠고 황량한 광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여기서는 광야만 황량한 것이 아니다. 도시의 거리도 황량하다. 호기심을 가지고 눈길을 줄 만한 여자들은 베일로 가리고 몸을 황급히 피한다. 그나마 거리에서 황급히 피하는 여자를 보기도 하늘에서 별 따기처럼 어렵다. 이들이 사는 집안에 들어가 보지 않는 한 이 나라는 남자들만이 사는 나라라는 착각이 들기 일쑤이다. 불행히 그런 초청은 받은 적이 없고 엊그제 호텔 마당에서 빨간 옷을 입은 촌스러운 영화배우를 보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약간의 갈증을 해결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차를 에워쌓다. 나도 본능적으로 인파를 뚫고 들어갔다. 곤두박질한 차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 열린 차창 문으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의 사람은 피범벅이 되었고 눈이 뒤집혀 있었고 팔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사람들이 차문을 열고 안의 사람을 끌어내려 하지만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차 안에 내가 모르는 어떤 공포, 어떤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우리에게 있는 춘향전처럼 아랍과 무슬림 세계에 전해 내려오는 ‘라이라와 마눈’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유명하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이야기에 문학적인 영혼을 불어넣은 사람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그렇게 존경하며 신과 동급 취급을 하는 시성 나자미이다. 그는 12세기 페르시아 통치기에 살아서 보통 이란의 시인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제르바이잔의 간자에서 태어나 간자를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때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였으므로 이란 사람들은 그를 자기 나라의 시성으로 받아들이고 존경한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 남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라며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이지만 시적 재능을 타고난 주인공 까이스가 연인 라일라에게 바치는 연시를 썼다. 그런데 그것이 그 집안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청혼은 거절당하고 라일라는 부모에 의하여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까이스는 상사병에 걸려 발광을 하며 사람들에게 마즈눈(광인)으로 불리며 라일라의 환영을 좇아 사막을 헤매고 찾아다닌다. 라일라는 연인에 대한 흠모의 정과 남편에 대한 충절 사이에 홀로 괴로워하다 결국 몸이 쇠약해져서 죽고 만다. 마즈눈도 못 이룬 사랑의 마음을 시로 읊으면서 라일라의 죽음의 길을 따른다. 인류 역사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언제나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의 테마로 등장했던 위대한 연인들은 후회 없이 사랑하고 기꺼이 파멸에 몸을 던졌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저주와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대문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시민들의 문학적인 삶 속에 그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외세의 침탈을 받아가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이리도 당당히 나라를 다시 세운 저력은 바로 문화에 있다. 그들 역사의 대부분을 나라 없이 살아왔지만 이들이 어려운 시간을 살아낸 힘은 그들이 나라를 잃을망정 기필코 지켜낸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라가 없어도 유구한 꿋꿋이 지켜온 그들의 고유한 문화가 없었다면 어디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아제르바이잔은 일찍부터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같은 고대 문명뿐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명, 페르시아 문명, 그리고 몽골과 터키, 최근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그 영향을 받은 문명의 교차 지역이다. 종교도 초기 기독교와 배화교나 이슬람교 등 수많은 종교가 이곳을 지나갔다. 그럼에도 이 작은 나라가 자기 언어와 문화의 정체성을 꿋꿋이 지켜가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영국 사람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던 셰익스피어보다 자랑스러운 나자미 같은 시성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 문자와 발음 구조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원시적 정체성이 있다. 이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옹골찬 자부심과 자기 것을 지키려는 부단한 노력을 끝없이 해왔다.

 

오늘날 달리면서 만나는 코카서스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꿋꿋함과 당당함의 원천은 문화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에도 씁쓸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으니 그저 눈 맞춤만으로도 만족하는 나그네인데 거리에 여자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불만이다.

 

거리에는 우중충한 색상의 옷을 입은 우울한 모습의 남자들뿐이었다. 세계는 지금 정보기술의 급격한 발달과 촘촘한 인터넷망으로 문화의 개방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 소통하고 교류를 하는 것은 세계 평화를 이루어내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문화교류는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다문화의 공존을 전제로 해야 한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관, 미국식 문화를 최고로 여기며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방식은 제고되어야 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문화의 교류와 수호 사이에 어려운 방정식은 우리가 함께 평화의 교류를 하면서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몇몇 나라들, 특히 이슬람 국가들은 외래문화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도 점령군처럼 거칠고 압도적으로 밀어닥치는 미국문화에 대한 반감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동서양 문화교류는 자신의 것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것을 수용할 줄 알았던 유목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흥망성쇠가 유럽 역사에 변화를 가져왔고 아시아 제국의 운명을 바꿔놓은 건 사실이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배경화면이 한국 드라마인 것이 나그네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거기다 구멍가게에서 간식거리를 사려다 손에 잡힌 것이 초코파이였다. 이 비단길이 이제는 유라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드라마의 길이 되고, 풍물놀이의 길이 되고, 김치의 길이 되고, 초코파이의 길이 되고, 신라면의 길이 되고 아모레 화장품의 길이 되기를 나그네는 꿈꾼다. 그리고 보니 아까 만났던 양치기의 손에 삼성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우리 문화는 은은한 향기처럼 지금 아랍 중앙아시아 세계에 퍼져가고 있다.

 

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감탄하는 것이 그의 문화에 대한 혜안이다. 조국이 20세기 산업사회의 낙오자로 제국주의의 먹잇감으로 국권을 상실했을 때 3.1 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거기서도 견디지 못하고 자싱,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류저우, 구이린, 충징까지 4,000km를 풍찬노숙하면서 꿈꾼 것이 다시는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가 융성한 나라’였다. 그는 분명 문화가 꽃피우는 평화의 세기가 올 것을 예견한 것이다. 그는 문화의 힘을 강조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소원’에서 고백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富)는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文化)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시성이자 아제르바이잔의 시성 나자미의 고향을 달리며 김구선생의 ‘나의 소원’을 되새긴다. 문화란 행복을 찾아가는 순례길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페르시아나 아제르바이잔은 나자미를 갖었고, 셰익스피어와 비틀즈를 가진 영국은 인도 전체를 주어도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화려한 궁전과 궁전을 가진 프랑스는 와인에 이야기를 덧씌워서 문화 강국의 대열에 올랐다. 일본은 애니메이션으로 체면을 세웠고 문화적으로 열등감이 있는 미국은 마크 트웨인을 선발로 내세우며 할리우드와 디즈니 그리고 팝으로 밀어붙이는데 그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빈축을 사며 퇴조의 기색을 보일 때 한국 문화는 유라시아 시대를 이끌 새로운 가치인 조화와 융합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두 극단을 조화시키고 모순을 화합시켜서 둥그런 원으로 완성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갈등과 대립 끝에 하나가 제패하는 것이 아니라 어우러져 서로의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맛을 창출하는 비빔밥 문화가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1988년 런던에서 주인공 없는 넬슨 만델라 칠순 기념 콘서트가 열렸다. 미국의 가수 해리 벨라폰테가 무대에 오르자 스타디움에 모인 관중은 “만델라를 석방하라!” 함께 함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이날 무대에는 스티브 원더, 에릭 크랩턴, 휘트니 휴스턴 등이 나와서 공연하면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며 27년째 감옥형을 치르고 있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석방을 촉구했다. 이 콘서트는 전 세계 70여 개국 10억 명이 시청했다. 넬슨 만델라의 생일 파티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생일 파티였고 평화운동이었다. 이 콘서트를 지켜본 세계인들이 나서자 남아공 정부는 결국 그를 석방하고 말았다. 이것이 문화다. 문화의 힘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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