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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5)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5)

우루무치에서 만난 우렁각시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내 마라톤이 마냥 고통의 연속인지 알고 측은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듯이 나의 마라톤에도 오아시스처럼 청량하고 달콤한 시간들이 있다. 그러니 지나치게 측은 해 할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여행자에게 지나친 도덕적 잣대를 가져다 댈 필요도 없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내가 달리고 있는 유라시아대륙의 북위 40도 부근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사막들이 거의 모여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막대(沙漠帶)의 곳곳에 오아시스 도시가 산재해 있는데, 그것을 연결하여 동서를 이은 길이 바로 ‘오아시스로’이며 실크로드이다. 이런 거친 사막과 초원지대를 6개월 이상 달리고 있다. 그래도 적응이 안 되서 아침마다 새로운 행성을 걷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 옛날 캐러밴들이 낙타를 몰고 사막을 지나다 길을 잃거나 실성하게 되는 것은 단조로운 광경이나 뜨거운 태양에 인지능력을 상실해서만은 아니다. 광대무량한 평원에서 텅 빈 느낌이 무서움과 외로움에 어떤 커다란 충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곳에서 육체적인 고통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나무꾼들이 선녀를 꿈꾸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목동들에게 선녀는 더 간절한 현실의 도피처인지도 모른다. 이런 곳을 오래 달리는 나도 우렁각시를 꿈꾸며 상상하는 것이 단조로운 생활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오랜 역사에서 지속해서 구전되며 변화와 변이를 거듭한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우렁각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남방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우렁이는 풍부한 영양가로 임산부나 젖을 먹이는 부녀자에게 좋은 영양공급원이자 식수를 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런 우렁이가 아름다운 여인이나 소녀로 변신하는 이유는 생김새가 아름다운 곡선이 여인의 섬세한 자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도 공안들과 씨름 끝에 60km의 구간을 잘라먹게 되었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땀방울로 수를 놓아가던 유라시아의 평화 벨트가 누더기가 되어 속이 상해하면서 창기라는 도시의 시내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옆으로 지나가던 하얀 승용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물병이 하나 내게 건네진다. 물병은 하얀 손에 쥐어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승용차 안의 하얀 손의 주인에게로 시선이 갔다.

 

우렁이같이 생긴 하얀 승용차 안에는 달항아리 백자같이 하얗고 둥근 얼굴, 사막의 밤하늘에 빛나는 푸른 별 같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내 가슴은 하얗게 멈추어버렸다. 방금 격정적인 입맞춤을 끝냈지만 아직 격정이 안 가신 듯한 붉은 입술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피나는 훈련을 받은 서역의 무희이런가! 어찌 저렇게 절제 있는 아름다운 손을 내밀어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가! 황량한 벌판을 끝없이 달리면서 거의 실성하기 직전에 상상 속에서 보았음 직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나는 잠시 정신이 나간 것 같아 방금 전에 건네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래도 정신이 안 들어 어리버리하고 있는데 그녀는 우렁이 껍질 같은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와 “짜요!”하면서 중국어로 무어라 말한다. 정신이 바짝 들어있어도 알아듣지 못할 앳된 여자의 목소리 무늬가 물결의 파장처럼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영어로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고, 네덜란드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말하였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도 어리버리 해졌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도 잠시 넋이 빠졌던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녀도 나보다 훨씬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더니 휴대폰 번역기에다 “당신은 정말 멋있어요.”를 써서 보여주고는 자신도 마라토너라며 휴대폰 안에 마라톤을 뛰는 사진과 메달을 보여준다. 나는 이 번역기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바벨탑의 징벌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날이 곧 오리라 믿는다. 그리고는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살짝 팔짱을 끼는데 그 부드러운 느낌은 사막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릴 때 불어오는 산들바람보다도 더 시원하고 아련하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오늘 어디까지 달려가세요?” 물었다.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살짝 패였다. “우루무치까지 달려가서 그곳 호텔에서 잔다.”고 답했다. 그녀는 “오늘 저녁은 제가 초대하겠어요.” “감사합니다.” 호텔에 와서 씻고 쉬려는데 이곳 한인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조금 후에 갈 테니까 로비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저녁 시간에 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때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럼 바쁘신데 굳이 오지 않으셔도 좋다고 말했더니 꼭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은 그리 나를 염려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곳 신장웨이우얼지역에서 일어날 재난이나 불편함을 최대한 부풀려 경고를 하고는 갔다. 그의 말은 여기서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려 불편했다. 한참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하지 말라는 경고같이 들렸다.

 

약속 시각이 다 되어서 그녀에게서 마라톤을 좋아하는 친구하고 같이 가도 좋으냐고 메시지가 왔다. 호텔 근처의 아늑한 식당에 자리를 잡아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도 몇 병 주문했다. 샨산은 한족이며 아까 길거리에서 나와 만난 여자이다. 플라워 아티스트라고 했고, 도도는 휘족이며 영어 선생이라고 했다. 그녀들은 나의 오른쪽 왼쪽에 앉았다. 휘족이나 위구르족이 한족과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종교나 음식, 역사, 언어 모든 것이 달랐다. 이슬람교도들은 한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밥을 먹지 않는다. 종교적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배고픔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도의 통역으로 대화는 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이야기는 그녀들에게는 삼장법사의 서유기 수준으로 전설적이기까지 한 나의 마라톤이 주제였다. 그녀들의 달리기 사랑 이야기도 내가 들어주고, 내가 달리는 이유가 하나의 한국을 위해서이기도 한다고 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최근의 제일 큰 뉴스인 남북회담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도도는 김정은 위원장이 남쪽 분계선을 넘어왔다가 문 대통령 손을 잡고 다시 북쪽 경계선을 넘어갈 때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는 내 가슴도 왠지 울컥해졌다.

 

맥주도 몇 잔 돌았고 사막 한가운데 도시의 빌딩 너머로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고, 그녀의 동그란 얼굴은 사막에 지는 노을빛처럼 붉게 물들어왔다. 먹고 마시는 사이 처음에 불편했던 격식은 자취를 감추고 경직되었던 동맥의 피가 더 따뜻하게 흐른다. 어느덧 우린 오랜 친구같이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샨산은 가끔 나의 손을 잡기도 한다. 내 손안에 있는 그녀의 손이 사막의 가녀린 새처럼 푸드덕거린다. 잡은 손을 통하여 뭔가가 저릿저릿 넘나들었다. 처음 본 여인과 단지 손을 마주 잡는 것만으로도 내 깊은 곳의 열정이 마른 사막의 지하수처럼 길어 올려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시간은 자비심도 없이 째깍째깍 흘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사랑한다는 것은 선녀탕에서 멱감는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벗겨진 신발을 주워들고 그 신발에 맞는 발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고,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들어오는 노총각을 위해 밥을 해놓는 우렁각시이다. 모든 욕망에서 해탈한 수도승 같은 모습과 작은 유혹이라도 찾아 나서는 바람둥이의 모습 두 모순이 내 한가운데서 요동을 친다. 여행에 나서며 만약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유혹을 만나면 귀의하려고 했었다. 지금은 충분히 거부할 수 있었다. 욕념을 맞는 것도 공부요, 이기는 것도 공부다. 삿된 생각이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이기도 하니 그 또한 피할 일도 아니다.

 

황량한 사막을 달리다 오아시스처럼 나타나 우렁각시처럼 밥을 사주고 같이 밥을 먹어주는 우렁각시들과의 시간은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없는 평화의 시간이었다. 오랜 기간 홀로 달리려면 많은 결핍을 강요당하고 또 스스로 알아서 그것을 감내한다. 사실 스치는 여인의 살결이 내게 평화였다고 고백하는 것도 지금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름다운 여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며 손을 맞잡고 사진을 찍으며 유혹에 흔들리며 오고가던 나의 미묘한 감정의 교류를 고백하는 것이 용기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때 내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내 달리기가 사적인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나만이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민이 함께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이제는 내게 쏠려있다. 더러는 나를 초인이라 부르고 위대하다고까지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보통 이하의 사람이라는 걸 고백해야 한다. 혹시 모르는 불쾌해하는 시선들 앞에서 나의 인간적인 미묘한 감정은 존중받고 싶다. 그날 샨산은 지족선사를 무너뜨리고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는 황진이처럼 살가웠다. 유혹을 따돌리려는 필사의 노력 때문인지, 사막의 도시의 열기 때문인지 이마에 땀이 송송 났었다.

 

평화통일의 관점에서만 나의 마라톤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롯이 개인적인 욕망과 삶을 다 내려놓고 내게 광야의 초인이 되기를 요구한다. 또 마라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평화통일의 구호 같은 정치적인 것 다 내려놓고 열심히 달려서 그저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모습만 보고 싶어 한다. 나를 단순히 여행자의 관점에서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용기에 박수를 칠뿐이다.

 

나는 여러 번 반복해서 고백해왔듯이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 분명히 우리 역사에 광야의 초인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럴 위인도 아니고 그런 허울 좋은 울타리에 스스로 틀어박히고 싶지도 않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광야의 초인이 아니라 사랑에 울고 웃어가면서 때론 거친 모험의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얻어지는 진주 같은 평화의 결정체를 얻는 사람이다. 오늘 내가 분명 확인한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이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의 몫이라는 체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더 아름다운 로맨스를 꿈꾸면서 딱 그 자리에서 멈췄지만 오랫동안 우려먹을 곰탕 같은 추억을 폭 끓였다.

 

만인을 아우르려면 인간 내면의 깊은 본성까지 도달하는 울림을 줘야 한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런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너머에서 얻어지는 소중한 평화이다. 그저 초인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뿐하게 유라시아를 달려와 “나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려왔노라!”고 떠벌리는 허위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 다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 같은 소시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리에 누워서도 조금 전 내가 경험한 기분 좋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떨림의 기분이 이어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오늘 밤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실개천을 폴짝 뛰어넘고 싶었었다. 나는 용기 있는 자가 되는 대신 바보가 되기로 결심했다. 바보가 되어 이기는 마음의 공부를 했다. 유라시아를 달리며 초원의 그 수많은 아름다운 꽃들을 하나도 꺾지 않은 자만이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떠나고 나면 낙장불입의 화투처럼 다시 손에 들어올 일 없지만 화투로 인생 바꿔본 적 없으니 재미있는 ‘우렁각시’의 일장춘몽(一場春夢)을 황량한 사막에서 꾸었다 친다. 내 안에 어떤 격력한 힘과 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겸비한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다.

 

발단 전개만 있고 절정을 건너뛰고 결말을 쓰고 나니 참 간이 심심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아직 절정은 없었다. 유라시아를 달리는 지금이 절정이다. 나의 달리기는 내가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자극하여 깊어지고 확장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는 중이다. 그건 분명 통일을 넘는 유라시아 시민 정신이다. 나는 이제 유라시아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라시아 시민 1호가 되었다. 유라시아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하고 여행하고 모험하며 평화를 이루는 유라시아 시민 되기 운동에 앞장서고 싶을 뿐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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