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 ] 설교 :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시사타임즈 = 고형진 강남동산교회 담임목사]
잠 24:13-18
성공에 대한 관심
고형진 강남동산교회 담임목사 ⒞시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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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원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발버둥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책들이 성공을 알려 주고 있는데 왜 성공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돌아보면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질까요?
성공만을 향해서
성공에 대한 수많은 책에서 알 수 있는 공통점 중의 하나는 성공은 실패의 결과물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와 성공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합니다. 무엇인가 시도를 하다가 원하는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아이템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 번창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기르면서 학교 성적이 만족치 못하면 자녀교육에 실패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실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성공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수할까봐 실패할까봐 자신 없는 일은 도전할 생각도 하지 않고 피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아이들이 하지 못하게 하고 부모가 대신 해줍니다. 위험한 일도 부모가 대신 해줍니다. 그렇게 실수나 실패를 외면하면서 성공만을 향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성공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진정한 성공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아예 시도도 하지 않고 성공할 만한 일만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걸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실수나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성장해서 실수나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맛보게 됩니다.
한 예로, 자랄 때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운전면허시험에서 떨어지면 어떤 줄 아세요? 인생이 끝난 것처럼, 인생의 낙오자라도 된 것처럼 절망합니다. 왜 그럴까요?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아서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패라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실패란 무조건 나쁜 것,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전지향주의, 성공지향주의가 가르쳐준 왜곡된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했습니다. 명문대학교에 진학했고 대기업에 입사했고 승승장구 진급도 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진급에서 누락되거나 명예퇴직을 당하게 되어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경우를 우리는 적잖이 보았습니다. 한 평생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어느 정치가가 언론에서 비리공직자라고 비난하자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제에 부딪쳐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제가 경기도 포천 근처의 장현이라는 지역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제 큰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 이벤트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아이에게 여행을 시켰습니다. 여정은 저희 집이 있던 장현에서 본가가 있는 잠실까지였습니다. 제일 먼저 시외버스를 타고 청량리까지 가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시청역까지 가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가다가 잠실역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했습니다. 그렇게 보내겠다는 말을 듣고 제 집사람은 안 된다고 만류했고 제 부모님은 ‘만약 애를 그렇게 보내면 너는 내 아들도 아니다’라며 야단이셨습니다. 사실 일곱 살짜리 어린애에게 그리 쉬운 길은 아니라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를 믿고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고맙게도 아이는 선뜻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2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데 3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며 어머님은 수도 없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쯤 되니까 저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님은 너무 걱정이 되시니까 집에 계시지 못하고 동네로 나가셨습니다. 이리저리 안절부절 못하고 걸어 다니시던 어머님은 문방구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락을 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셨습니다. 혹시나 해서 돈을 좀 넉넉히 줘서 보냈는데 그게 화근이 된 것입니다. 잠실역에서 내려서 버스 대신 택시를 타서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하게 된 아이는 남은 돈과 시간을 오락기 앞에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여행을 한 그 아이가 제일 좋아하고 또 잘 하는 과목은 사회입니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혼자 갑니다. 모르는 길도 잘 찾아서 갑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말도 통하지 않는 태국으로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10박 11일 동안 잘 지내다 왔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감행했던 그 단 한번의 경험이 그 아이에게는 길에 대한 자유함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모험 없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지금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연습할 때는 실패를 해도 됩니다. 아니, 실패를 많이 할수록 실전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성공할 확률이 점점 높아진다.”
실패는 성공의 과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패는 성공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말이며 성공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은 실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외에는 실패 없는 성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디슨은 전구 하나를 발명해내기까지 무려 147번의 실험을 실패했습니다. 많은 신문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에디슨에게 147번이나 실패를 하면서 기분이 어땠었는지 물었을 때 에디슨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실패라니요? 저는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147번의 실험은 제가 전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고 저는 148번 째 실험은 마지막 실험이었을 뿐입니다.”
에디슨뿐이 아닙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것은 806번째의 비행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라면 그들은 805번의 실패를 한 셈입니다. 우리는 한번만 실패해도 인생이 끝난 것 같이 생각하는데 라이트 형제는 어땠겠습니까? 여러분, 805번, 얼마나 끔찍한 숫자입니까? 어림잡아 계산해서 일년에 80번씩 실패를 했다고 한다면 10년 동안 실패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가지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10번이라도 실패를 경험해 보신 분이 있습니까?
성공에 대한 책을 보면 실패 없이 성공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실패를 통해서만 성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십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한 존 맥스웰(John Maxwell)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는 성적도 아니고 시험도 아니다. 한번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4전 5기
오늘의 말씀 16절을 보세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게 있으십니까? 지금 40대 이상 되신 분들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1977년 11월 26일. 파나마. WBA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 우리나라 홍수환 선수는 2라운드에서 네 번이나 다운을 당했습니다. 상대는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헥토로 카라스키야라는 선수로 11전 11KO승의 전적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운당한 채 쓰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뚝이였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러기를 네 번. 그렇게 2라운드를 마친 그는 3라운드 시작 48초 만에 상대를 KO로 쓰러뜨리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권투라는 경기가 생긴 이래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 날 TBC 방송국에서는 무려 스물일곱 번이나 재방송을 했으며, 당시 중계를 담당했던 원종세 아나운서의 감격에 찬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고, 경기 후 홍수환 선수가 했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은 단번에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홍수환 선수는 우리에게 4전 5기라는 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홍수환 선수가 단번에 전 국민의 인기를 끌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주먹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났었던, 실패를 실패로 끝내지 않고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서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그의 정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지금 넘어지셨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로 주저앉지 마세요. 일어나시면 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일어나시면 됩니다.
의인도 넘어진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면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세요. 무슨 말씀일까요? 의인도 넘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 중의 하나가 바로 의인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로 그렇습니까? 의인에게는 시련이 닥치지 않습니까? 의인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인이 더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가며 정직하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 부도를 맞기도 하고 자기 맡은 일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열성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진급에서 누락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의인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억울해서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의인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의인도 홍수가 나면 악인과 동일하게 수해를 입고, 비행기가 추락하면 동일하게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만 무사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에 놓여지고 환란이 있으면 그 환란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악인과 다를 바가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분명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제와 환란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인식의 차이입니다.
넘어지고 나서
문제와 환란이 있으면 의인도 악인과 동일하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그 재앙으로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의인이 악인보다 더 많이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의인은 넘어진 채로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지만 악인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고 만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성공의 여부는 실패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실패를 한 후에 다시 일어났느냐 일어나지 않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실패한 실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실패한 비행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들이 이루어낸 성공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겪었던 수많은 실패는 그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 축구팀 코치가 실의에 빠진 선수들에게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함께 나눈 이야기입니다.
코치 : 여러분, 마이클 조던이 포기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선수들 : 아닙니다.
코치 : 라이트 형제는 포기했었는가?
선수들 : 아닙니다.
코치 : 에디슨은?
선수들 :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코치 : 그렇다면 엘머 윌리암스는?
코치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한 선수가 코치에게 엘머 윌리암스가 누구냐고 묻자 코치는 대답했습니다.
코치 : 물론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중간에 포기를 했기 때문이다.
실패는 분명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성공을 이루기 전에 도중에 포기해버리면 실패는 과정이 아니라 실패라는 결과로 남게 됩니다.
실패에 대한 반응
존 맥스웰은 그의 저서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반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반응은 노여움, 즉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고 그 분노를 원망과 불평, 비난으로 터뜨리는 반응을 보입니다.
둘째반응은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 감추기 때문에 그 잘못을 반복하게 되고 따라서 실패는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스탠리 저드(Stanley Judd)는 “실패를 감추기 위하여 노력하는 힘을 낭비하지 말고 대신 실패로부터 배우고 다음 단계의 도전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반응은 속력내기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실패를 했다는 생각 때문에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이전보다 더 열심히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마음에 대한 보상일 뿐, 상황을 호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했을 때에는 잠시 쉬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윌리암 딘 싱글턴(William Dean Singleton)의 “노력하라 그리고 멈추고 생각하라 그런 뒤에 다시 노력하라”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반응은 변명하기입니다. 실패를 하면 누구나 당황스럽습니다. 그래서 변명함으로써 자기를 방어하려는 본능이 꿈틀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변명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다음에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게 할 우려가 아주 많습니다. 실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 반응은 포기하기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는 정말 실패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중단한 것이다.” 포기는 실패를 성공을 향한 과정이 아니라 단지 실패로 끝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실패를 경험해보셨습니까? 아니 지금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녀교육에, 인간관계에, 사업에, 혹은 인생에 실패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실패라는 과거와는 작별을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실패로 남게 되지만 여러분이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는 그 순간, 여러분이 생각하는 실패는 이미 실패가 아닙니다.
꿈이 사라졌습니까? 그러면 다른 꿈을 꾸면 되지 않습니까? 1000만원의 빚을 지고 계십니까? 그 때문에 잠도 안 오고 마음이 무겁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1억을 벌 수 있는 꿈을 품으십시오. 그 꿈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1000만원의 빚을 갚고 9000만원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고민하십시오. 내가 1억을 벌면 1000만원은 얼마 되지 않는 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1억을 벌 생각은 안하고 1000만원 갚을 생각만 하니까 머리가 아프고 답답하고 암담한 것입니다. 1000만원의 빚을 진 사람은 1000만원을 벌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1억의 빚을 진 사람은 1억을 벌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빚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사업을 하다가 빚을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빚 때문에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내 인생을 돈 때문에 실패했다고 포기해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비록 1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버리면 실패한 것이지만 다시 일어나서 작은 돈이라도 벌기 시작했다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라
존 맥스웰은 실패를 딛고 다시 전진하기 위한 지침을 세 가지 말해주고 있는데 그 첫째는 일어나라, 둘째는 극복하라, 셋째는 계속 나아가라 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성공을 향한 첫 걸음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성공에 도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쓰러져 앉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일어나십시오. 문제 앞에서 방황하며 주저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부딪치고 극복하십시오. 이제 문제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넘어져서 주저앉는 이유는 그들이 소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있기 때문에 소망을 봅니다. 주저앉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29절에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심야기도회를 합니다. 찬양과 말씀, 기도로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마지막 축도를 하기 전에 항상 함께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은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입니다.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 찬양을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순간에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주님이 손을 붙잡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고난의 순간에도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고 인도해주시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우리를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게 하는 힘, 바로 주님이 주시는 소망입니다.
미국에 한 중년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서 수술을 하다가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함께 버스를 타고 아내의 직장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내가 출근길에 익숙해 질 무렵, 남편은 이제 아내 혼자서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내에게 혼자 다니라고 말을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이 너무 섭섭했고 심지어는 배신감까지 느끼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출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한 길이었어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아내는 넘어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2년 쯤 지난 어느 날, 버스기사가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부인은 참 복도 많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앞도 안 보이고 이제는 남편도 내게 지친 것 같은데요. 이렇게 혼자 더듬거리면서 다니게 하고 말이지요.” 아내가 슬픈 어조로 대답하자 버스기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아닙니다, 부인. 매일 남편이 부인의 뒤에서 버스 타는 걸 지켜보고 뒷자리에 함께 타고 있다가 부인이 버스에서 내리면 따라 내려서 부인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뒤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얼마나 가슴이 뭉클한지 아세요?” 버스기사의 말을 들은 아내는 남편에게 품었던 섭섭함이 한 순간에 다 녹아내려 눈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랍니다.
저는 남편의 심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혼자 더듬거리면 길을 갈 때에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고, 또 가다가 넘어질 때에 일으켜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남편의 마음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틀거리고 휘청거릴 때,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시며 묵묵히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극복하가, 계속 나아가라”
여러분, 걱정 말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이겨낼 수 없는 어려운 순간에는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손을 잡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우리는 결코 실패자도 패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승자와 패자에게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J. 하비스의 ‘승자와 패자’라는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승자와 패자》
승자는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실수했을 때 '너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넘어지면 뒤를 본다.
승자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쉬지만
패자는 허겁지겁 일하고, 빈둥빈둥 놀고, 흐지부지 쉰다.
승자는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패자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한다.
승자는 구름 위에 뜬 태양을 보고
패자는 구름 속의 비를 본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서는 쾌감을 알지만
패자는 넘어지면 재수를 탓한다.
승자의 주머니 속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 속엔 욕심이 있다.
승자가 즐겨 쓰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이고
패자가 자주 쓰는 말은 '해봐야 별 수 없다'이다.
승자는 일곱 번을 쓰러져도 여덟 번 일어서지만,
패자는 쓰러진 일곱 번을 낱낱이 후회한다.
승자는 더 좋은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패자는 갈수록 태산이라 생각한다.
승자는 달리는 중에도 이미 행복을 느끼지만
패자의 행복은 경주가 끝나야 결정된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패자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승자의 꿈을 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축복하여 주시고 우리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했던 어렵고 힘든 순간에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다시 넘어질지라도 주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을 믿사옵니다. 손잡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프로필
고형진 목사
무학교회 교육전담목사 소망교회 부목사 및 청년부 담당 현) 강남동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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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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