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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147)] 릴리트

[책을 읽읍시다 (1147)] 릴리트

프리모 레비 저 | 한리나 역 | 돌베개 | 347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프리모 레비의 단편 소설집 『릴리트』. 이탈리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며 대표적인 증언문학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국내 독자들에게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로서의 위치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레비는 1938년 인종법이 발효되기 전까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크게 자각하지 않은 채 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또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최우등으로 졸업한 전도유망한 화학자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한 관심도 이미 학생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물론 레비의 작업들에서 나치, 수용소, 홀로코스트는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서 뗄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지만 이것들만으로 레비의 전부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레비는 생전에 국내에 소개된 증언문학 성격의 저서들 외에도 단편소설집, 에세이, 인터뷰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최근 레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화학자로서의 면모에 좀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릴리트』는 총 3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총 36편의 짧은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각 부의 제목은 ‘가까운 과거’, ‘가까운 미래’, ‘현재’로 모두 시간을 의미하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표현하는 시간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다. 왜 레비는 이 소설의 들어가는 문을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들로 썼을까? 그리고 왜 과거, 현재, 미래 순서가 아닐까? 시제 앞에 ‘가까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걸까?


레비가 이러한 시간 인식을 전면에 드러낸 이유는 각 부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다소 쉽게 찾을 수 있다. 1부에 수록된 작품들은 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다룬다. 그곳에서의 지독한 고통과 처참함, 그리고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이것이 인간인가』의 로렌초와 엘리야, 『휴전』의 체사레를 다시 소환해 그들의 삶을 좀 더 집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아우슈비츠에서 경험은 레비에게 ‘지나간’ 저 멀리에 있는 과거가 아니다. 언제든 상기하고 언제든 새로 쓰일 수 있는 현재와 밀착해 있는 시간인 것이다. 제목을 ‘가까운’ 과거라고 붙인 이유 역시 독자들에게 아우슈비츠가 오래전에 일어난 것이 아닌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2부는 현재가 아닌 ‘가까운 미래’로 넘어간다. 여기에는 환상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다. ‘이종교배’가 가능할 법한 미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보인다. 3부 현재는 여기에는 1부와 2부에서 다룬 이야기들이 혼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씨앗을 품는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레비에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분절되어 나타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릴리트』에서 가장 주목해볼 만한 부분은 레비의 ‘경계 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는 레비가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어떻게 전복시키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이는 소재부터 글쓰기 방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이 과정에 함께하는 독자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상태로 낯설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레비는 전작에서부터 끈질기게 인간과 인간성을 자신의 글쓰기의 화두로 삼아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선악은 어떻게 내재되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또한 인간은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가?와 같은 인간 본성의 문제에 계속 천착해왔던 것이다.


『릴리트』에서도 이러한 레비의 고민은 꾸준히 이어진다. 특히 1부에 수록된 소설들 중에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제목에서부터 이름이 등장하거니와 인간에 내재된 양면성을 보여주는 데 적지 않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인간을 혐오하거나 가치판단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더 깊게 이해해보기 위한 레비의 치열한 과정으로 여겨진다. 인간성에 대해 끈질긴 성찰 끝에 나왔을 법한 문장들이 이 책에 다수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도 레비의 그 무구한 노력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작가 프리모 레비 소개


세계적인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9세기 초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으로 건너온 그의 조상들은 토리노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작은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었다.(『주기율표』의 「아르곤」 참조) 레비는 1940년대 초중반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특별히 화학이라는 학문·기술에 매력을 느껴 토리노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으며, 1941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유대계였던 그는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주기율표』의 「니켈」과 「인」 참조) 몇 군데의 직장을 떠돌며 마지막 광기를 내뿜던 파시즘을 냉소적으로 거부한 채 살아가던 레비는 저항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제2차 세계대전 말 정치적인 의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고, 나치스의 그림자가 밀라노와 토리노를 뒤덮자 파시즘에 저항하는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했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그 부대는 별다른 활동도 하기 전에 파시스트 공화국 군인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레비는 포솔리 임시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주기율표』의 「금」 참조)


레비가 이송된... 세계적인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9세기 초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으로 건너온 그의 조상들은 토리노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작은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었다.(『주기율표』의 「아르곤」 참조) 레비는 1940년대 초중반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특별히 화학이라는 학문·기술에 매력을 느껴 토리노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으며, 1941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유대계였던 그는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주기율표』의 「니켈」과 「인」 참조) 몇 군데의 직장을 떠돌며 마지막 광기를 내뿜던 파시즘을 냉소적으로 거부한 채 살아가던 레비는 저항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제2차 세계대전 말 정치적인 의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고, 나치스의 그림자가 밀라노와 토리노를 뒤덮자 파시즘에 저항하는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했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그 부대는 별다른 활동도 하기 전에 파시스트 공화국 군인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레비는 포솔리 임시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주기율표』의 「금」 참조)


레비가 이송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중에서도 화학 공장과 붙어 있는 제3수용소(모노비츠 수용소)로, 강제노역수용소인 그곳 수인들은 대부분이 헛되고 거짓된 노동으로 삶을 소진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그는 건강한 체력, 화학 박사라는 이점, 시기를 잘 맞춘 몇 번의 행운으로 극소수의 생존자 대열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훗날 그 자신이 인정한 대로 지칠 줄 모르는 인간에 대한 관심, 단순한 생존본능이 아닌, 반드시 살아남아 목격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의지, 그리고 점차 동물화·사물화 되어가는 동료 수인들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보겠다는(그럼으로써 자신도 인간의 마지막 흔적을 간직하겠다는) 고집스런 결의야말로 그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인 요인들이었다.(『이것이 인간인가』의 「부록 1」 참조)


레비는 1945년 몇 달에 걸친 힘겨운 여정 끝에 토리노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이것이 인간인가』의 집필에 들어갔다. 1947년 이름 없는 출판사에서 소량 출간되었던 이 책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질 뻔했으나 1957년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재출간되면서부터 수많은 독자들을 만나 전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역·출판되었다.


그는 귀환 직후부터 이미 몇 군데 실험실과 공장을 거쳐 니스·에나멜·합성수지를 생산하는 공장에 취직을 한 상태였다.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아우슈비츠의 증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 후에도 공장을 그만두지 않았고, 1977년 퇴직할 때까지 총감독으로 일하며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근 30년 동안 작가와 과학자, 혹은 작가와 기술자로서의 "두 가지 영혼" 중 어느 한 쪽도 놓치지 않았고, 그로써 과학자와 작가라는 두 개의 영혼이 상호보완적인 차원을 넘어 불가분의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주기율표』의 「크롬」, 「부록 1」 참조) 『주기율표』와 『멍키스패너』 등의 작품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이러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특별한 열정과 관심은 그의 작품 세계의 또 다른 흐름을 특징짓는다. 그리고 이는 '인간다움의 가장 중요한 계기로서의 노동', 혹은 '거짓된 노동을 통해 파괴되는 인간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아우슈비츠 경험을 다룬 작품들과 만난다.


1963년에 그는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주제로 한 두번째 책 『휴전』을 발표했다. 레비의 첫 작품에 반한 이탈로 칼비노가 표지글과 추천사를 썼고, 제1회 캄피엘로 상을 수상했다. 1975년 세번째 회고록인 『주기율표』를 발표했다. 1978년 『멍키스패너』를 출간해 스트레가 상을 받았다. 철탑, 다리, 석유시추 장비들을 제작하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도는 피에몬테 출신의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책은 출간 후 곧바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프랑스어판을 접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은 서평을 남겼다.


매우 즐겁게 읽었다. 내가 특히 노동에 대한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프리모 레비는 위대한 민속학자다. 게다가 책도 정말 흥미롭다.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1982년 출간되자마자 비아레조 상과 캄피엘로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언급된 것 외에도 그는 시와 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번역가로도 진지하게 활동해 레비스트로스, 프란츠 카프카 등의 작품을 이탈리아어로 옮겼다.


미국의 유대계 작가 필립 로스는 프리모 레비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작가들이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부류로 나뉘다는 사실이 〔……〕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두 부류란 바로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레비는 춱를 기울이는 쪽이다. 〔……〕 사람들이 항상 그에게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이 글로 씌어지기 전에 이미 충실하게 기록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집중해서 꼼짝 않고 듣는다. 마치 저 돌 벽 너머 천장에서 무언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엿듣는 다람쥐처럼.(『주기율표』의 「부록 1」 참조)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호기심 많고, 유쾌하고, 예의바르고, 신중하며, 인간에 대한 믿음과 자유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지닌 낙관주의자. 그리고 동시에 한번 뿌리가 뽑히더라도 다시 글쓰기와 일과 가족과 공동체 속에 안정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 총체적이고 소외되지 않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전범(典範)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 이런 그의 모습은 아우슈비츠라는 극단의 체험도 완전히 바꾸어놓지 못했다. 그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고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1986년에 아우슈비츠의 경험에 대한 철저한 사유와 성찰을 집대성한 역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출간했다. 토도로프는 이 책에서 거의 극한까지 도달한 레비의 성찰을 두고 그가 "장대(기준)을 너무 높이 들어올렸다"라고 썼다. 레비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87년 토리노의 자택에서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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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