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46)] 정신기생체
콜린 윌슨 저 | 김상훈 역 | 폴라북스 | 352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 콜린 윌슨의 철학 SF 소설 『정신기생체』. 문학사적인 의의와 읽는 재미를 겸비한 해외 과학소설의 고전과 최신작을 충실한 해설과 함께 소개하는 「미래의 문학」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데뷔작 『아웃사이더』에서 ‘실존주의적 위기’라는 철학적 화두를 통해 비평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의 기본 이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아웃사이더 체험에 대한 직접적이며 역사적인 사변을 SF의 형식을 빌려 전개한다.
소설 형식으로 아웃사이더 철학을 전개한 걸작
영국의 고고학자 길버트 오스틴의 수기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스틴이 대학 동창인 심리학자 카렐 바이스만의 자살 후 그의 유언에 따라 한 무더기의 원고를 상속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자살과 원고는 인류 진화와 ‘정신기생체’의 비밀에 얽힌 거대한 변화의 시작에 불과했다. 저자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 의식의 무한한 잠재력과 양면성에 대한 새로운 실존주의적 관점을 논리적 극한까지 추구한다.
『정신기생체』에서 윌슨은 “절대다수의 인간이 스스로의 엄청난 잠재력을 1퍼센트도 채 발휘하지 못한 채로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그에 대한 답은 “18세기 이래 인간이 ‘마음의 암’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이 심암의 원인으로 지목된 ‘정신기생체’는 SF 특유의 은유와 직유가 교차하는 영역에서 태어난 매력적인 외계의 ‘괴물’인 동시에, 우리의 삶과 정신을 실제로 지배하는 무미건조함과 지적인 나태함에 대한 통렬한 규탄이기도 하다.
윌슨은 작중인물의 입을 빌려, 20세기 들어 자살과 우울증이 급증한 것은 산업화의 부작용 때문이 아니라 ‘실현되지 못한 인간 잠재력의 복수’로 인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위시한 20세기 실존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후설의 현상학現象學에 대한 독창적인 고찰에서 비롯한 것이다. 소설 내에서 주인공 오스틴이 ‘정신기생체’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또한 후설의 현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와 뉴웨이브 SF의 팬이 쓴 장르 오마주
『정신기생체』가 발간된 1967년은 SF사史적으로는 J. G. 발라드와 마이클 무어콕을 중심으로 영국발 뉴웨이브 운동이 맹위를 떨치고,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K. 르귄, 필립 K. 딕 등의 젊은 미국 작가들이 세대 교체를 거쳐 새로운 시대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중요한 시기였다. 문학 비평으로 등단한 콜린 윌슨은 언제나 SF계의 이런 조류 바깥에 서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 장르를 애독해온 독자였다.
『정신기생체』는 과학소설인 동시에 20세기초 미국의 괴기소설 작가이자 지금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H. P.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윌슨은 비평서 『문학과 상상력』에서 러브크래프트를 너무 폄하했다는 미국의 원로 작가 어거스트 덜레스의 항의를 받고 이 소설을 쓰려는 영감을 받았다. 작가 서문에서 직접 밝혔듯이 콜린 윌슨 본인도 러브크래프트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과학기술이나 세계정세는 출간한 지 반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보면 소박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자살과 우울증과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의 암흑면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21세기를 현실세계의 정신기생체들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섬뜩하게 예언적이다. “깊이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한다고 해서, 그것을 건강함의 척도로 볼 수는 없다”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경구처럼 말이다.
작가 콜린 윌슨 소개
콜린 윌슨은 1931년 6월26일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셔 주의 주도인 레스터에서 노동계급 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처음으로 글을 읽는 법을 배운 뒤로는 독서에 몰두했고, 자연과학, 심리학, 철학 서적에서 《위어드 테일즈》와 《안락의자 과학》 등의 펄프잡지까지 닥치는대로 탐독함으로써 광범위한 교양을 쌓았다. 16세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생계를 위해 모직 공장에 취직했다. 단조로운 공장의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T. S. 엘리엇을 위시한 위대한 영국 시인들의 시에 탐닉했다. 그 뒤에는 실험실 조수와 세무서 공무원 등으로 일하다가 영국 공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단조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제대한다.
1950년대는 농장일이나 도랑을 파는 뜨내기 인부로 생활비를 벌며 독서를 계속했고 이때 읽은 『바가다트 기타』에 촉발되어 시작한 명상은 윌슨의 우울증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해 여름에는 프랑스를 여행하며 미국인 철학자 레이먼드 덩컨을 만나 잠시 교류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인 레스터로 돌아와서 여러 직종을 전전하며 데뷔작인 『어둠 속의 의식』(1960)과 문학 평론 등을 쓰기 시작했다.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고 창작에 전념하려고 작심한 윌슨은 낮에는 마르크스와 쇼가 집필을 했던 대영박물관의 독서실에서 자료를 찾아가며 『어둠 속의 의식』을 썼다. 밤이 되면 근처의 햄스테드 히스 공원에서 방수 침낭 하나만 가지고 노숙을 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콜린 윌슨은 『어둠 속의 의식』 집필중 그 이론적 기반이 된 문학 평론 부분을 독립시켜서 『문학의 아웃사이더』라는 제목의 비평서를 쓰기 시작했다. ‘실존주의적인 위기’라는 관점에서 카프카, 카뮈, 헤밍웨이, 헤세, 로렌스, 반 고흐, 쇼, 니체, 도스도옙스키의 저작물을 폭넓게 분석한 이 책은 1956년 5월에 『아웃사이더』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자마자 문단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됏다. 윌슨은 에디스 시트웰과 필립 토인비를 위시한 비평가들의 격찬에 힘입어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유명인사가 됐다. 자신이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지식인 영웅으로 떠받들여지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다음 해 두 번째 아내인 조이와 함께 콘월 주로 낙향했다.
그 이래 그는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서양사, 범죄사, 철학, 심리학, 종교, 성과학, 신비주의, 오컬트 SF, 미스터리, 스파이소설, 전기, 초일상적 현상, 초(超) 고대사 등 폭넓은 분야에 걸친 120여편의 저작물을 발표했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재인(才人)이자 대중 저술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밖의 대표작으로는 『패배의 시대』(1959),『문학과 상상력』(1962),『성욕의 기원』(1963),『아웃사이더를 넘어서』(1965) 등의 문학 비평서와, SF 소설인 『현자의 돌』과 『스파이더월드』4부작(1987-2002), 논픽션인 『오컬트의 역사』(1971) 등이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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