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43)] 목수의 연필
마누엘 리바스 저 | 정창 역 | 들녘 | 240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 마누엘 리바스의 소설 『목수의 연필』. 21세기 세계문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엄선해 소개하는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시리즈의 26번째 책이다. 작가를 스페인의 인기 소설가에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올려놓은 이 대표작은 에스파냐 내전을 배경으로 사랑과 증오로 복잡하게 얽힌 세 남녀의 숙명적인 이야기를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갈라시아 인들, 나아가 전쟁의 비극을 통해 인간이 지닌 사랑과 관용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라틴아메리카 마술적 사실주의의 적자, ‘매직 리얼리스트’ 마누엘 리바스
마누엘 리바스는 권위 있는 문학상(‘국가문학상’, ‘토렌테 바예스테르 상’ 등)을 수상했다. 또 스페인에서는 유일하게 권위 있는 비평상(‘에스파냐 비평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작가이다. 그의 문학은 소설뿐 아니라 시와 희곡 등 문학 장르 전반을 아우른다. 또한 열다섯 살, 이른 나이에 언론계에 입문한 그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다양한 언론매체에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매 작품마다 인간에 대한 폭넓은 사유, 인간의 삶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과 성찰을 담아낸다.
『목수의 연필』은 마누엘 리바스의 대표작이자 스페인 중에서도 지역색이 강한,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토속성과 시적 여운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페인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인류의 비극으로 남아 있는 ‘에스파냐 내전(1936~1939)’을 배경으로 삼는다.
비극적인 전쟁을 소설의 시공간으로 차용했던 헤밍웨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카탈루냐 찬가』)과 달리 마누엘 리바스는 갈리시아 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당사자로서 겪었던 혹독한 전쟁, 그로 말미암은 갈등과 상처, 풀지 못한 역사적 상흔을 생생하면서도 심도 있게 그려낸다.
사랑과 증오로 복잡하게 얽힌 세 남녀의 숙명적인 이야기는 갈리시아 인들, 더 나아가 전쟁의 비극을 통해 인간이 지닌 사랑과 관용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되새겨 보게 한다. 『목수의 연필』은 작가에게 ‘에스파냐 비평상’을 안겨줬을 뿐 아니라 ‘엠네스티 상’을 수상하며 작품의 가치를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진실과 정의가 무의미한 시대, ‘사랑과 관용’은 어디까지 유효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두 축은 연인 사이인 다 바르카 의사와 마리사, 둘을 흠모하면서도 증오하는 에르발의 삼각관계, 그리고 에르발과 죽고 나서도 환청으로 그의 곁에 머무르는 ‘화가’의 관계이다.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작가는 늙은 다 바르카를 인터뷰하러 온 신문기자와 에르발의 고백을 귀담아 듣는 마리아를 등장시켜 시점, 현재와 과거 등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 전지적 작가시점(혹은 관찰자 시점)과 1인칭 시점,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며 마술적 사실주의의 기법을 선보이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이야기는 다 바르카와 마리사의 러브스토리, 그리고 마리사를 향한 에르발의 짝사랑이다. 눈여겨볼 것은 ‘현실의 승자’와 ‘사랑의 승자’가 일치하지 않은 채 끝까지 긴장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에스파냐 내전에서 프랑코 군에 선 에르발은 공화주의자인 다 바르카를 감옥에 넣고, 그를 감시하는 간수 역할을 자처한다. 사실은 오랫동안 집요하게 눈여겨봐온 지역 유지의 딸이자 다 바르카의 연인 마리사를 훔쳐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마리사와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욕망은 더욱 탐욕스럽게 끓어오르고, 다 바르카를 향한 질투와 증오 또한 그만큼 짙어진다. 그러나 에르발의 비뚤어진 욕망은 혼란한 시대에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다 바르카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마리사와의 사랑을 어렵게나마 이어나가는 것을 돕는다.
작가는 ‘현실’과 ‘사랑’이라는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두 인물의 대치와 충돌을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으로 삼아 긴장감과 궁금증을 소설의 끝까지 이어나간다.
숙명과도 같은 세 사람의 관계에 작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화가’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소설의 주요 테마인 ‘사랑과 관용’의 유효성과 의미를 시험해본다. 작가는 마술적 기법을 통해 에르발의 손에 처형된 화가를 살려내고 그의 곁에 머물게 한다. 우연찮게 화가가 가지고 있던 ‘목수의 연필’을 획득한 에르발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이상한 감정을 경험하고 환청을 듣게 된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죽인 화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인데, 처음에는 극렬하게 거부했다가 점차 그에게 의존하고, 그의 이야기를 갈구하게 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법부터 자신과 아들의 관계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에르발의 내면에 변화를 몰고 온다. 하지만 반사작용이 일어나듯 에르발의 내면에는 화가와 대척점에 선 ‘강철인간’이라는 존재가 감지되면서 그의 악의(惡義)는 예전보다 더 극렬하게 반응하며 극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갈리시아의 환상적인 민담과 은유로 빚어낸 ‘미래의 고전’
에스파냐 내전은 표면적으로 프랑코주의자들로 대변되는 군부 지지정당 ‘팔랑헤당’과 보수 가톨릭, 산업자본가의 우파가 한 축으로, 사회주의자와 지방자치주의자, 도시노동자와 소작농 등 좌파가 한 축이 되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은 『목수의 연필』은 극렬한 대치 과정을 보여주며 역사에서 남아 있지 않은 ‘패자의 기록’에 주시한다. 그 패자의 기록을 이야기하는 것은 놀랍게도 프랑코주의자에 선 에르발이다.
승자인 에르발은 때로는 담담하게, 고백하듯이, 때로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채 그 시절을 내뱉는다. 그래서 더욱 사실적이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중심인물뿐 아니라 질곡의 현대사 현장에 있었던 이들에게도 존재감을 부여한다. 패배자가 되어 교도소에 갇힌 의사, 어부, 시장, 도시노동자, 레슬러, 화가, 정신이상자 등을 화가가 귀에 꽂고 다니던 ‘목수의 연필’을 통해 후대에 각인시킨다.
화가의 손을 통해 구현되는 수감자들은 갈리시아 지방의 주도(主都)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포르티코 델라 글로리아(영광의 문)’에 조각된 성자들의 모습을 띤다. 마치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제의처럼 다가온다. 또한 소설 곳곳에서 갈리시아 지방의 민담, 모스부호 같은 비유와 은유, 우화와 삽화 등은 풍성한 이야기에 다채로운 빛을 발한다.
작가는 또한 전쟁이라는 대립 속에 인류가 끊임없이 갈등하지만, 공존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테제들을 심어놓는다. ‘화가’와 ‘강철인간’으로 대립되는 선과 악의 대립, 교도소 가톨릭 사제와 노보아 박사로 대변되는 기독교 사상과 진화론의 충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프랑코주의자 대 반프랑코주의자의 경계를 넘어 소설 곳곳에 살며시 스며들고, 마누엘 리바스의 은유적인 언어와 결합하면서 다양한 해석과 분석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작가 마누엘 리바스 소개
마누엘 리바스(1957년, 코루냐 출생)는 열다섯 살에 갈리시아 지방 일간지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여러 대학에서 언론학과의 교재로 사용하는 『저널리즘은 이야기다』(1998)와 『욕실의 여인』(2002)『갈리시아 왕국의 스파이』(2004)는 이 분야의 수확물이다.
마누엘 리바스의 문학은 시와 단편, 장편, 희곡 등 문학 장르 전반을 아우른다. 작가는 ‘토렌데 바예스테르 상’과 ‘국가 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집 『자기, 나한테 뭘 원해?』(1996, 『나비의 혀』 수록)로 에스파냐 산문 문학을 이끌어갈 차세대 기수로 떠오른 데 이어, ‘비평상’과 ‘엠네스티 상’을 수상한 『목수의 연필』(1998)로 독창적인 작가로 입지를 굳힌다. 두 작품은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토속성과 시적인 여운이 묻어나는 언어와 이야기에 대한 진정성과 절실함이 함축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와 연극 문자로 각색된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밤의 마을』(1997)과 『눈의 실종』(2009), 개인적으로 세 번째인 ‘비평상’과 ‘올해의 책’ 수상작인 장편 『책은 악을 태운다』(2006)와 『모두가 침묵이다』(2010) 등이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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