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735)] 붕대 감기
윤이형 저 | 작가정신 | 200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영화 홍보기획사에서 일하는 은정은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은정은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타인과의 감정 섞인 교류 없이 강퍅하고 완고하게 스스로를 가둬왔다. 그러나 8개월 전 그녀의 고성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된다. 아들 서균이 교회 수련회에서 눈썰매를 타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이다. 8개월이라는 시간은 온화한 성정의 남편을 비롯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고, 이제 그녀는 무참한 현실에 맞닥뜨린 자신에게 누구도 안부를 묻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점 없는 혼잣말과 욕설”을 “방언처럼 줄줄” 내뱉는다.
그러나 은정이 눈치채지 못한 따스한 응원과 위안의 기미가, 실은 존재했다. 그가 다니는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인 두 사람. 미용실 실장인 해미는 “지독하게 말수가 없”고, “언제나 온몸과 마음이 잔뜩 긴장”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은정에게, 자신의 ‘인생 책’인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선물하고는 8개월 전 마지막 염색 이후로 발길을 끊은 그녀를 걱정한다.
서균과 한반인 딸 율아를 둔 진경과, 그의 친구인 세연의 사연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단짝이었던 진경과 세연은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해서도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진경이 직장에 들어가면서 연락이 끊어졌지만, 진경은 아이 엄마이자 방과후독서 지도교사가, 세연은 출판기획자가 되어 페이스북에서 다시 만난다. 처음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특별했다. 교련 시간에 2인 1조로 붕대 감기 실기시험을 치르다 세연이 실수로 진경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였는데 두 사람에게 친해질 만한 공통분모라곤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 진경과 “고립된 문제아” 세연은 서로가 간절히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래도록 곁을 지켜주었다.
이처럼 『붕대 감기』는 친구에게 거는 기대와 허상, 그 허상이 깨졌을 때의 실망과 환멸, 그리고 이를 다시 회복해가려는 마음과 미묘한 갈등을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핍진한 현실 위에서 펼쳐 보인다. 그것은 “가정과 직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밖에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새로운 친밀감의 영역”이자 “순수하게 관계 내적인 속성에 따라 형성되고 지속되는”(심진경, 「작품 해설」) 관계다. 동료이거나 동지이거나 친구인, 이해관계 너머에 있는 ‘순수한’ 관계들의 유형은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다른 인물들의 사연을 통해 제시된다.
세연이 ‘여성들의 우정’이라는 출간물을 기획하며 취재를 요청한 대학 교수 경혜는 제자에게 ‘페미니스트 투사’라는 영광을 얻으려는 ‘꼰대’로 비춰진다. 채이는 경혜에게 친구가 되자고 먼저 손을 내민 당찬 학생이었지만, A교수의 추행 사실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쓴 뒤 보복을 당할까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그런 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친구 형은, 형은의 엄마인 명옥, 그녀의 동반자인 효령까지 많은 인물들의 사연은 서로 기대고, 간극을 벌렸다가, 다시금 교차하면서 태피스트리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직조되어 간다.
여성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들, 즉 가부장제,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미러링, 탈코르셋 등 페미니즘 이슈는 물론, 우리 사회를 둘러싼 온갖 억압과 폭력의 문제들은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이 많은, 나이 어린, 대학교수인, 고등학생인, 워킹맘인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어떤 연유로 서로 멀어지고 또 그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혹은 극복이 안 되었는지”, 그리고 관계의 속성과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소설에 따르면 이들은 저마다 삶의 무게와 피로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이다. 운전자는 수시로 바뀌지만 버스에 탄 일원들은 버스가 잘 운행되도록 독려와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경쟁자이자 적이 아니다. “돌려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도 않고” 열심히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면서 함께 읽거나, “오직 서로에게만 지어 보일 수 있던” 미소를 지닌 존재, 즉 친구인 것이다.
작가 윤이형 소개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2005년 「검은 불가사리」로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4년, 2015년 젊은작가상, 2015년 문지문학상, 201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 『러브 레플리카』 『작은마음동호회』, 중편소설 『개인적 기억』, 청소년소설 『졸업』, 로맨스소설 『설랑』 등이 있다. 『큰 늑대 파랑』은 2008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도서출판 작가)에 올해의 선정작으로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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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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