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94)] 마리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저 | 김수진 역 | 문학동네 | 376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세계적인 메가셀러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1993년 청소년소설 『안개의 왕자』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이후 『한밤의 궁전』과 『9월의 빛』을 연달아 내놓으며 ‘안개 3부작’이라 불리는 연작소설을 완성했다.
청소년을 위한 초기 연작소설에서 『바람의 그림자』와 같은 성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로 옮겨가는 단계에서 일종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작품이 1999년 발표한 소설 『마리나』이다.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 루이스 사폰의 나이는 서른이었고, ‘청춘’이라는 축복받은 시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깨닫고는 청소년을 위한 마지막 작품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청춘의 마지막 시기, 그 아름다운 시절과의 이별을 절감하며 쓴 작품이 『마리나』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그런 이유에서 『마리나』를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고백한다.
이 작품에서 루이스 사폰은 처음으로 자신이 나고 자란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삼았다. 작가는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음울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미스터리의 공간으로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시간과 기억, 역사와 허구가 온통 경계를 허문 채 뒤섞여 있는’ 이 마법과도 같은 도시의 분위기를 작품 안에 오롯이 살려냈다.
초기 청소년소설과 달리 구체적인 공간 배경을 설정한 것과 더불어, 『마리나』는 복잡한 서사와 가슴 아픈 사랑이 결합된 루이스 사폰 특유의 미스터리를 처음 선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열다섯 소년 소녀가 바르셀로나에 묻힌 엄청난 비밀을 파헤쳐나가는 이 소설은 미하일 콜베니크라는 인물에 대한 많은 이들의 증언을 퍼즐처럼 꿰맞추며 거대한 비밀의 실체에 서서히 접근해간다.
그 과정에서 루이스 사폰은 사체 썩는 듯한 악취, 공포를 일깨우는 기분 나쁜 소리, 소름끼치는 냉기 등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장치들을 동원해 장면장면을 생생히 묘사하며 긴박감을 극대화한다. 숨막히는 미스터리에 미하일 콜베니크의 가슴 아픈 과거와 이룰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오스카르와 마리나의 아련한 우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은 이제 비로소 자신만의 ‘바르셀로나 미스터리’의 태동을 예고한다.
홀로 도시 탐험을 즐기는 열다섯 소년 오스카르 드라이는 여느 때처럼 바르셀로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폐허가 된 저택에 사는 어여쁜 소녀 마리나를 만나 친구로 지내게 된다. 마리나가 오스카르를 바르셀로나의 외진 공원묘지로 데려간 어느 날, 두 사람은 검은색으로 온몸을 휘감은 여인과 이름도 없이 검은 나비 문양만 새겨진 묘석을 보게 된다. 호기심에 검은 옷의 여인을 미행하지만 여인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리고, 눈앞에는 잡초 무성한 온실이 나타난다. 온실 문에는 묘석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검은 나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온실 안은 시체 썩는 듯한 지독한 악취가 가득했고, 사람 크기의 인형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책상에 놓인 사진첩에는 기형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찍은 끔찍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기형아로 태어나 일찍이 목숨을 잃은 쌍둥이 동생 때문에 인간의 몸을 되살리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미하일 콜베니크는 정형외과용 기구 제작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단순히 의수, 의족 등을 제작하는 일을 넘어 꺼진 생명까지 되살리고자 하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특출한 재능과 사업수완으로 명성을 쌓은 콜베니크는 미모의 오페라 가수 에바 이리노바를 만나 결혼까지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식 날 에바가 염산 테러를 당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저택에 칩거하며 살아갔고 콜베니크의 재산과 명성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살던 저택에 큰 화재가 발생해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미하일 콜베니크와 에바 이리노바의 이름은 바르셀로나의 전설로 남게 됐다.
하지만 오스카르는 그들의 이야기에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감지한다. 콜베니크의 삶에 대해 추적을 시작하던 때부터 오스카르를 따라오던 사체 썩는 듯한 악취, 그리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와의 싸움, 오스카르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더욱이 이런 모험을 함께하던 친구 마리나는 오스카르가 한 발짝 다가가려 하면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다. 한밤중에 욕실에서 홀로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자신에게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마리나의 행동에 오스카르는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러나 우울함도 잠시, 오스카르는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바르셀로나의 거대한 하수도까지 추적을 계속해나간다. 그는 그곳에서 콜베니크가 남기고 간 끔찍한 생명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빛나는 청춘에 이별을 고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써내려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처럼, 오스카르와 마리나는 서로의 추억을 되새기며 유년의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했다.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소개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광고계에 몸담고 있다가 영화의 세계에 매력을 느껴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93년 『안개의 왕자』로 ‘에데베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자정의 왕궁』 『9월의 빛』과 『마리나』 등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현재 그는 미국 LA와 스페인을 오가며 소설을 쓰는 한편 스페인의 『라 방과르디아』지(紙)와 『엘 파이스』지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장편소설『바람의 그림자』는 2001년 스페인에서 첫 출간 직후 무려 101주 동안 베스트셀러 상위에 머물렀다. 곧이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 30여 개 국에서 모두 20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라라 소설 문학상’ 최종 후보작, 2002년 스페인의 ‘최고의 소설’ 그리고 2004년 프랑스의 작가, 비평가, 출판업자들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그 해 출판된 ‘최고의 외국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후 2008년에 『천사의 게임』을 발표하면서 또 한 번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에서 10개월 만에 170만 부가 판매되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미국에서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이른바 ‘사폰 현상’을 일으켰다.
『안개의 왕자』는 『9월의 빛』, 『한밤의 궁전』으로 이어지는 3부작 연작소설 중 하나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데뷔작이다. 사폰은 이 작품으로 에데베 문학상을 받으며 시나리오 작가에서 소설가로 화려하게 데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소설은 모두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감춰진 미스터리를 다루었다고 해서 〈안개 3부작〉으로도 불리는데, 풍부한 서사구조와 화려한 수사 등 소설의 교과서라 불릴 만한 요소들의 단초를 담고 있는 사폰 문학의 정수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9월의 빛』은 『바람의 그림자』와 『천사의 게임』에서 차용한 문학적 요소와 영화적 모티프의 여러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 그 밖에도 1993년 『안개의 왕자』가 에베데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사폰의 연작소설은 문학성에서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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