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433)] 동물들의 침묵
존 그레이 저 | 김승진 역 | 문강형준 편 | 이후 | 268쪽 | 16,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휴머니스트들은 인류가 신화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떠들지만 자신들이 믿는 문명의 진보가 사실이 아니고 신념이며 또 다른 신화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진보라는 신화는 싸구려 음악처럼 뇌를 마비시키면서 사기를 진작시킨다.” 그레이는 행복과 자아실현이야말로 그러한 신화 가운데서도 최악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대로 되어야만 행복해진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는 이들 신화는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상정하고 그에 미치지 못한 삶은 비루하고 무의미한 삶으로 격하시킨다.
‘진정한 자아’란 대체 무엇인가? 낭만주의의 이상에 기댄 이 관념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고유성과 독창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삶의 본질인 공허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 존 그레이의 주장이다. “이 신화는 단 한 종류의 삶에서만 아니면 아주 소수의 비슷비슷한 삶에서만 당신의 삶이 꽃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기다리면서 혹은 스스로가 가짜라고 의심하면서 만성적인 비참함에 빠져 살아간다.
『동물들의 침묵』이 조지프 콘래드의 단편 「진보의 전초기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콘래드야말로 제국주의 시대에 휴머니스트들의 신화인 ‘진보’가 어떻게 인류 역사를 오명에 빠뜨렸는가를 예민하게 인식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콘래드는 벨기에 제국주의자들에게서 식민주의의 야만성을 발견한다. 쿠르초 말라파르테도, 아서 쾨슬러도, 조지 오웰도 진보에 대한 믿음이 배신당하고 문명이 순식간에 야만으로 전락한 폐허의 현장에서 인간이 처한 실존적 진실을 깨닫는다. “‘야만인’과 ‘문명인’이라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과 영원히 전쟁을 치르는 ‘인간 동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들 신화가 만든 ‘의미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레이는 인간이 신화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J. G. 발라드의 묵시록적 소설에서 ‘의미의 폐허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신화의 힘에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신화를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그에게 좋은 신화는 ‘환상을 부풀리는 게 아니라 환상을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 보르헤스, T. E. 흄 등은 인간 삶의 최종 상태가 질서가 아닌 혼돈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들의 독특한 ‘체념’의 정서로부터 그레이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를 발견한다. “세계에 의미가 부여돼 있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의미에 갇힐 일도 없다.”
존 그레이는 ‘행동’을 통해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그 어떤 믿음도 거부한다. 그러나 ‘행동’의 반대편에서 인간사의 모든 갈등과 충돌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묵’을 추구하는 인간의 또 다른 욕구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다. 갈등과 충돌은 인간 정신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속성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아의 평온을 위해 침묵을 수련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막스 피카르트 같은 이는 동물의 침묵은 구원되지 않는 침묵이기에 인간의 침묵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았지만, 존 그레이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그는 ‘인간 동물은 자신의 속성대로 존재하는 데서 놓여나기 위해 침묵에 기대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일종의 타고난 권리로 침묵을 즐긴다’고 하며 인간의 침묵에 그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는다.
책 제목인 ‘동물들의 침묵’은 그래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폐허인 현실에서 인간이라는 특수한 종種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간 동물의 오만에 대한 비판이자 그런 인간이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동물들의 침묵에 대한 헌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에 대한 희망 없이, 의미를 추구하려는 노력 없이, 환상이라는 위안 없이’ 사는 삶은 대체 어떤 삶일까? 전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그냥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동물들의 침묵』은 그런 삶의 형상을 ‘동물들의 침묵’을 통해, 삶의 혼돈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프로이트, 마우트너, 베케트, 그리고 J. A. 베이커 등의 삶과 그들의 유산을 통해 흐릿하게나마 보여 준다.
『동물들의 침묵』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진행한 인터뷰에서 존 그레이는 “유토피아적 비전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그 비전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제를 쓰고 인터뷰를 진행한 평론가 문강형준 씨의 말대로 그레이의 사유는 한국에서, 비록 새로운 행동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성찰을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다중적인 내면과 행동”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성찰로 이어질 것이다.
작가 존 그레이 소개
2008년까지 런던 정경 대학(LSE) 유럽 사상 교수로 재직했다. 지금은 『가디언』 『뉴 스테이츠먼』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등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철저한 반反휴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에서는 인간의 구원과 진보에 대한 신념이 불러 온 파괴적인 결과를 성찰해 좌우를 막론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14개 언어로 번역된 False Dawn(1998)을 비롯한 수십 권의 저서들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됐다. 최근에는 불멸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과 주술적 과학의 허상을 꼬집은 The Immortalization Commission을 썼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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