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703)] 트렁크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한국문학의 새로운 활력’, ‘비범한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김려령 작가가 흡인력 강한 소설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왔다. 신작 장편 『트렁크』에서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과 리얼리티 넘치는 명쾌한 화법으로 인간관계와 사랑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심리 전개 대신 재치 있는 대화와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려령 작가는 그간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너를 봤어』 등의 작품을 통해 대중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폭 넓은 사유와 개성 넘치는 문체로 우리 삶의 기저에 가닿는 깊이 있는 서사를 구축해왔다. 특히 『완득이』에 이어 두번째 스크린셀러가 된 『우아한 거짓말』 이후 작가는 일상적 삶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견하고 고발하는 데 천착해왔다.
『트렁크』는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더욱 공고해지고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엄밀해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내게는 세상 전체가 사막이었다. 살아남는 게 오히려 신기하고, 타인의 갈증에 무섭도록 냉담한 곳이었다. 서걱서걱. 나는 한모금의 물이 간절했는데 내 입의 침마저 말렸다. 고개를 숙이면 그 참에 목뼈를 부러뜨리려 했고, 고개를 들면 날선 칼로 목을 치려 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올해 스물아홉살의 주인공 ‘인지’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인 NM(new marriage) VIP팀에서 입사 육년차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다른 부서의 사원들이 미혼 남녀의 결혼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것과 달리 인지는 직접 VIP회원의 기간제 부인인 FW(field wife)가 되어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 면접에서 떨어진 날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입사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인지는 N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시절,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애자였다는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고 결국 떠나게 만든 어머니에 대한 반감과 취업의 어려움으로 망명하듯 NM에 입사한다.
네번째 결혼을 마친 인지는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종전의 결혼생활에 비해 순탄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지 앞에 ‘엄태성’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인 ‘시정’의 부탁으로 휴가기간 중 한번 소개팅을 가졌을 뿐인데 엄태성은 자신을 단칼에 거절한 인지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을 품고 스토킹을 시작한다. NM보안팀은 인지가 계약 남편과 함께 사는 집까지 집요하게 찾아온 엄태성을 제압한 뒤 인지 몰래 격리시킨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지나 5포 세대, 7포 세대라는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인구 1,000명당 혼인율은 통계 산출한 1970년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을 보였고 어렵게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웨딩푸어’, ‘하우스푸어’ 등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가난 때문에 사랑과 결혼이 좌절되는 시대에 김려령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설정한 ‘기간제 부인’ ‘출장 결혼’은 어떤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모습으로 가슴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어느새 독자들의 마음에 들어 앉아 현실 같은 이야기 속으로 치닫게 한다.
『트렁크』는 결혼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여러 관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온 작가의 산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결혼과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형식과 내용을 꼬집고 비틀고 그 이면을 들춰내며 관습이 얼마나 고루한 것인지,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지는 현실적 욕망이 얼마나 속물스러운 것인지 이야기한다.
작가는 다시 폭력에 대해 말한다. 타인의 삶에 무책임한 호기심을 갖고 개입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나아가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력을 끼치려는 욕망이 결국 자신의 삶을 그르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사랑’의 어두운 이면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다시 사랑에 서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끌어안으며 연민한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 사랑처럼.
작가 김려령 소개
마해송문학상과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석권하며 2008년 가장 주목해야 할 거물급 신인의 등장을 알린 작가. 진지한 주제의식을 놓지 않으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필력이 단연 돋보인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증조할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것을 자양분으로 하여 진지한 주제의식을 놓지 않으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필력이 돋보이는 작가이다. 기억의 호수에 등장하는 기억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건망증과 착각 그리고 기시감과 기억상실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비밀들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다채롭고 유쾌하게 재현한『기억을 가져온 아이』로 제3회 마해송문학상을 수상했다.
공개입양된 아이 하늘이를 주인공으로 가족 사이의 진실한 소통과 이해에 관해 이야기하며 ‘구성해 가는 것으로서의 가족’을 잘 보여준『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로 제8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정해진 길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대신,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며, 온실의 화초는 절대 알지 못할 생활 감각과 인간미, 낙천성을 가진 아이의 이야기를 그린『완득이』로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완득이』는 연극으로도 각색되었으며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대표 작품으로 『가시고백』『우아한 거짓말』,『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기억을 가져온 아이』, 『요란요란 푸른아파트』,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 『완득이』,『너를 봤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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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준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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